현대 이전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방어시설이 지켜주는 공간이었다. 성벽은 군사적 목적을 상실한 뒤에도 관세구역의 경계로서 기능을 이어갔다. 이 기능까지도 필요없게 된 뒤에는 공간의 상징적 표지로 남았다. 역사적으로 모든 제국은 성벽을 쌓을 수 있는 기술 조직 재정 능력 덕분에 주변의 ‘야만인’을 복종시키고 패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야만인은 성벽을 허물 줄은 알아도 성벽을 쌓을 줄은 몰랐다. 성벽과 성문은 도시와 농촌, 집약과 분산을 가르는 경계였다. - P867

인류가 발명한 사회기반시설 가운데서 그 어떤 것도 도시구조를 파괴하는 데 철도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철도의 등장으로 "전통 도시의 내부 구조가 처음으로 열상을 입었다." - P874

사람들이 철도건설에 열정을 보였던 이유는 철도와 역이 도시 내부로 들어오면서 건설에 방대한 양의 토지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도시 내부의 철도와 기차역 공사가 끝났을 무렵에 영국의 철도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도시 전체 면적의 5퍼센트에서 9퍼센트 사이였고 추가로 10퍼센트 정도의 토지에 대해 간접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철도는 거대한 뱀처럼 도시 안으로 파고들어와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도시 안에 철도와 역을 건설하면 빈민가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현실의 결과는 달랐다. 철거민의 이주대책에 대해서는 누구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 P875

마차는 도시교통에서 중요한 초기의 발명품이었다. 마차 운영에는 특별한 선진기술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민간 마차주가 상업적 서비스를 제공했다.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선을 정해진 가격으로 운행하는 교통수단으로서의 마차는 미국인의 발명품이었고 1832년에 처음으로 뉴욕 거리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24년 후에 도시 여객마차가 파리의 거리에 등장했다. 마차 운임은 운영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말이 끄는 버스의 속도는 빨라야 사람의 평균 보행속도의 두 배를 넘지 못했다. 마차는 또한 많은 양의 말똥을 쏟아냈다. - P879

궤도전차의 등장은 도시의 시내 교통에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가져왔다. 궤도전차의 속도는 마차철도보다 두 배나 빠르면서도 요금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앞에서 전차를 타고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 P883

19세기 말, 인류는 아직 자동차 시대에 진입하지 못했다. 자동차라고 하는 새로운 기술혁신이 처음에는 미국에서, 다음으로는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문자 그대로 도시의 폭발을 불러왔다. - P884

지하철은 철도기술과 하수도 공사를 통해 터득한 터널기술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런던 지하철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도시계획자가 마련한 구상이 아니라 찰스 피어슨이란 개인이 제시한 창의적인 아이디어였다.
최초의 지하철에는 창문도 없는 열차를 증기기관차가 앞에서 끌었다. 폐쇄된 터널 안에서 이런 기술은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열차 안의 조명은 석유등이나 가스등이라 매우 어두웠고 열차가 만석이 되면 경사면을 오를 때 기관차가 멈추거나 후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시의 부동산 거물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 위나 아래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철도도 그랬지만 지하철도 처음에는 회의론자들의 비판의 대상이었다. - P885

교외화는 도시 주변지역의 발전 속도가 중심지역을 초월하는 과정, 그래서 도심지와 교외지역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방식이 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대략 1815년에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반면에 유럽인은 도심에서 벗어난 곳에 거주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았다. - P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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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는 20세기 후반에는 공항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라와 나라 사이, 대륙과 대륙 사이 거래와 교류의 핵심 접촉점이었다. 먼 나라를 건너온 여행자가 이국에 도착한 후 첫 번째로 보게 되는 것은 부두의 각종 시설과 항구 연안의 건축물이었으며, 여행자가 처음 만나는 사람은 세관 직원, 부두의 짐꾼이었다. 여객, 화물, 대륙을 넘는 이민의 무리가 몇 배로 늘어나면서 해운업의 중요성은 규모면에서나 문화적 의미에서도 전례 없이 높아졌다. - P826

새로운 항구는 특수한 세계를 형성했다. 곳곳에 화물이 산처럼 쌓였고, 쿨리들이 맨몸으로 짐을 날랐고, 가끔씩 기계도 보였다. 그곳은 상류사회 사람들과 가족을 이끌고 이민하는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내리는 부두와는 단절되어 있었다. 두 부두는 각기 독립된 세계였다. - P832

사회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항구도시(특히 점진적으로 공업화한 항구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시장의 다양성과 유동성이다. 이런 도시에서 노동력 수요의 출처는 매우 다양했다. 선원에서 짐꾼까지, 조선소의 숙련기술자에서부터 경공업 분야의 비숙련 노동자까지, 선장과 1등 항해사에서부터 도항사와 항구공사 기술자까지, 그리고 온갖 종류의 서비스업이 존재했다.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었다. - P834

식민시대 초기의 건축은 아시아의 건축언어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프랑스 식민자들은 호치민에서는 정치적 메시지를 확고하게 전달하기 위해 베트남식 건축 요소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그들의 의도는 프랑스 문명의 우수성을 베트남 전체에 전파하고 전 세계에 프랑스 문화의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코린트 양식, 네오고딕 양식, 초기 바로크 양식 등 각종 건축 양식이 뒤섞였다. 같은 시기에 영국령 인도에서도 역사적 전통을 대하는 태도에 거리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최소한 영국식, 프랑스식, 베네치아식 고딕 양식에다 이른바 ‘인도-사라센’ 양식이란 건축 요소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있었다. - P844

식민도시의 많은 특징은 있다와 없다로 나누는 ‘2진법’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식민도시의 격리 혹은 ‘종족적 분리’를 주목하고 어떤 역사학자들은 다른 문화의 혼합, 융합 또는 이종교배를 주목하여 여러 대형 식민도시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찬양한다.
어느 쪽을 주목하든 둘 사이에는 미세한 여러 층차가 존재한다. 식민도시의 사회적 구성요소는 원칙적으로 식민자와 피식민자 둘로 나뉘지만 그것이 생활의 모든 용역을 빠짐없이 규정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위계와 종족적 위계는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겹친다. 인종차별이 성행하던 시대에도 피부색과 종족적 동질성이 계급적 차이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했다. - P847

‘식민도시’의 이상형이란 분명한 윤곽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식민지에 있는 도시라고 해서 모두가 전형적인 식민도시는 아니다. 그리고 유사한 기능을 가진, 식민지에 있는 도시와 비식민지에 있는 도시 사이의 차이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도 안 된다. - P850

19세기 식민주의가 만들어낸 놀랍고도 새로운 형식의 식민지는 통상항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통치자들은 외국인의 무역활동을 특정 지역에 한정하고 엄격하게 감시 통제했다. 중국, 일본, 조선이 1840년부터 잇달아 국제무역을 개방하기 시작한 뒤로 열정적인 자유무역 신봉자라도 시장의 힘만 믿었다가는 이 새로운 경제 공간에 ‘침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수한 제도가 필요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한 위협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온갖 종류의 국제적 협의—실제로는 ‘불평등조약’—를 거쳐 서방 상인들에게 일방적인 특권이 주어졌다. 그중 가장 중요한 특권은 아시아 국가의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치외법권이었다. 이 밖에도 서방은 자신의 무역관리 기구를 만들어 소재국 정부가 관세정책을 통해 가하는 통제를 벗어날 수 있었다. - P853

로우(미국의 중국학, 도시사 학자: 1947~)의 훌륭한 분석에 따르면, 1861년 개항 이전의 한커우는 서방 사회학에서 주장하는 정태적이며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정부의 절대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동방도시’가 결코 아니었으며 또한 1861년 이후의 한커우는 절대로 전형적인 ‘식민도시’도 아니었다. 한커우 사회는 외래 인구의 유입을 받아들여 보다 다원적인 도시가 되었으며, 지역 엘리트가 주도하여 사회 저층 집단도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활동 영역을 찾을 수 있는 공동체를 발전시켰다. - P862

식민도시는 제국도시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제국도시는 제국의 통치 중심이자 식민자의 권력의 원천이었ㄷ. 제국도시의 정의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제국도시는 정치권력의 중심이자 정보의 집결지다. 제국과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주변부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생겨난 기생적인 수혜자이며, 또한 지배이념의 상징적 전시장이다. - P864

도시계획과 건축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런던은 제국의 수도라 할 수 없었다. ‘제국적’ 특징은 런던의 다른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항구와 부두에서 일하는 수많은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 노동자, 런던 시내를 관광하는 다양한 피부색의 여행객, 식민지에서 귀국한 관리들의 이국정취가 넘치는 생활방식, 음악당에서 연주되는 해외 작곡가들의 작품이 런던의 진정한 제국적 위상을 반영했다. 제국의 핵심 실력이 최대한 빛을 발한 곳은 밤거리를 밝혀주는 가스등이었다. 런던은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었다. - P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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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고대의 기원이자 현대의 요람이다. 도시는 그 주변을 이끌어가고, 권력을 행사하고, ‘상대적’으로 진취적이기 때문에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19세기의 도시에서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 P760

도시는 지구의 보편적 현상이다. 국가는 유럽인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도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도시문화는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중동의 나일강 유역과 지중해 동부, 중국과 인도, 훨씬 훗날의 일본, 중부아메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에서 각기 독자적인 도시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농업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도시의 물리적 형태와 생활방식은 유럽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다.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적인’ 도시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거의 하나도 예외도 없이 강인한 토착 도시문화와 충돌했다. - P763

19세기 동안 ‘도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특히 19세기 후반은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된 시기였다. 역사상 어떤 시대도 사회생활에서 19세기와 같은 공간 밀도의 변화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도시인구의 증가속도는 이전 몇 세기보다 훨씬 빨랐다. 영토가 광활한 몇몇 국가에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도시 주민의 생활방식이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 주도적인 생활방식이 되었다. - P764

도시의 찬란한 현대성은 (긴 역사에 비추어보면) 순간일 분이다. 때로는 현대성이 지속된 기간은 수십 년에 불과했다. 현대성은 질서와 혼란의 평형, 인구의 유입과 유효한 기술구조의 융합, 구조화되지 않은 공공 공간의 개방, 탐색과 시험 가운데서 흘러나온 에너지였다. 현대화의 전제는 ‘전통’ 시대가 끝났을 때에도 도시가 여전히 특정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비도시와 구분되는 특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광대한 면적과 분산된 인구, 여러 개의 위성도시로 구성된 다축 방사형 거대도시에는 내부의 경계도 외부의 경계도 모호하고, 도시의 착취대상이자 도시주민이 ‘소풍’이란 명분으로 소비했던 교외지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의 19세기는 대도시의 형성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 P771

지금까지 도시화는 기계화된 공장식 생산의 보편화와 함께하는 도시 규모의 급속한 성장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도시화와 공업화는 동전의 양면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관점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오늘날 도시화란 더 넓은 의미에서 사회발전의 가속화, 인구 밀도의 증가, 전혀 다른 환경 아래서 진행되는 사회구조의 재편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인간이 더 긴밀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의 형성이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더 빠르게 정보를 교환하고,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양호한 제도적 환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 P773

근대 초기에 유럽 도시 인구의 절대치는 중국 일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동아시아에는 더 많은 거대도시가 있었다. 유럽은 1550년 이후 첫 번째의 도시화 물결을 경험했고 1750년 이후 두 번째의 물결을 경험했다. 도시인구의 비중은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두 배로 높아졌다. 1650~1750년에 유럽의 도시화 정도는 일본에 비해 약간 낮았고, 장강 하류지역과는 근접했고 중국 전체의 수준보다는 높았다. - P782

도시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흔히 비교분석을 통해 도시의 구조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대 중 소도시 사이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협조적’이냐 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19세기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온전한’ 도시 등급체계가 있었다. 코펜하겐과 스톡홀름으로 대표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이런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1913년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와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큰 도시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19세기 90년대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사라토프의 인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건설된 전형적인 주청부 청사 소재지인 이 도시는 주로 행정과 군사적 고려에서 나왔고 그 기능 또한 시종 이 범주를 넘지 않았다. 역동적이었던 제정시대 말기에도 이 도시의 인구는 5만 명을 넘지 않았다. 등급이 분명한 도시체계가 없는 것이 러시아 현대화의 중요한 장애였다. 일본은 반면에 등급이 분명한 도시 계보의 이상에 비교적 근접한 나라였다. 중국도 역사적으로 이런 특징을 갖추었으나 19세기에 인구 1~2만 명 사이의 소도시는 중국에서 찾기 어려웠고, 대도시의 빠른 성장도 소수 대도시에 국한되었으며, 이 도시들조차도 한결같이 해안지역 또는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 P784

한 사회의 탈도시화는 개별 도시의 위축을 수반한다. - P789

19세기에 도시의 성장은 과거의 어떤 시기보다도 시장과 민간 추진력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역동적인 몇몇 대도시의 성장은 ‘민간부문’의 역량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런 도시는 더는 권력과 귀족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정치적 위상이 높은 도시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 P794

대부분의 도시체계는 개방적이었다. 19세기에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된 지역에서는 국가는 점차 국가경제의 조직자로 진화해갔고 도시의 공업화는 국가경제 안에서 역할의 중요도가 높아갔다. 이와 동시에 ‘거대’도시는 교역 이주 통신의 국제적 네트워크와 직접 연결되었다. 대도시는 자본의 집적과 분배를 담당하고 동시에 ‘국가 간’ 연결의 기반 역할을 했다. 도시의 발전은 국가형성의 직접적인 결과도 아니고 공업화의 부수현상도 아니다. - P796

도시체계의 함의는 두 가지 방식—수직과 수평—으로 해석될 수 있다. 수직적 해석은 피라미드 모형을 차용한다. 가장 밑바닥에는 무수한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정상에는 핵심 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중간에 규모에 따라 여러 정착지가 계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농촌의 정기 시장도 있고, 고정된 시장 조직을 갖춘 소도시도 있고, 서비스와 관리기능을 함께 갖춘 중형 도시도 있다. 수평적 해석에서는 도시 사이의 관계, 도시가 소속되어 있으면서 도시 기능과 발전을 지원하는 네트워크를 관찰 대상으로 한다. - P798

한 도시가 일정 규모를 넘어서게 되면 단일한 기능으로 그 도시의 성격을 분류하기 쉽지 않다. 이때 도시는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도시는 흔히 다원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노동력을 고도로 특화된 분야에 집중하는 도시가 있다. - P803

한 국가의 수도는 인구의 다소에 관계없이 정치적 군사적 권력 중심으로서 다른 도시와 구분된다. 그 밖의 특징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다. 수도는 최고 통치자의 거주지이며 중앙 관료기구의 소재지이다. 수도의 노동시장은 흔히 다른 도시에 비해 서비스업에 기울어 있다. 수도에서 사는 주민들에게 통치자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어떤 정치체제이든 수도는 대중정치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 P809

19세기에 지구상에서 극히 소수의 도시만 런던과 파리 모형을 따라 각종 기능을 한곳으로 집결시킨 전능형 도시로 발전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활력이 넘치는 대도시라도(예컨대, 도쿄와 빈) ‘제2도시’와의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로마에서는 이원관계의 연원이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것은 세속정권과 바티칸 사이의 대립이었다. - P814

19세기 30, 40년대의 맨체스터가 ‘충격의 도시’라고 불렸던 이유는 도시의 구체적 공간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 들어선 많은 7층 높이의 공장건물들은 미학적 고려나 도시경관과의 조화라는 개념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이런 풍경이 흔하게 늘어선 곳은 도시의 중심지역이 아니라 교외지역이었다.
어떤 도시는 완전히 공업지역으로서 건설되었고 오랫돈안 공업이 도시의 유일한 존재목적이었다. - P820

맨체스터, 버밍엄, 리즈 같은 도시는 대중의 참여라는 자신만의 자원을 동원하여 공업화 초기단계에서의 혼란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 도시는 박물관과 시립대학을 설립하여 공동체 기반시설을 개선했으며, 위엄 있는 건물을 세워 장소의 권위를 높였다. 공장지역 주거지의 형태는 다양했다. 대형 공업도시의 빈민굴처럼 생활환경이 열악한 원시적인 판자촌도 있었지만 작업장과 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이 견딜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업적 가부장제의 전시장으로서 공장주도 함께 사는 주거지역이 있었다. - P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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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여성 심리학은 무기력하고 박탈된 조건을 반영한다.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여성의 많은 특질들, 즉 직관력이나 동정심과 같은 특질들은 생물학적인 경향이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어떤 결함이나 가부장제가 부과한 필요를 통해 개발되어왔을 것이다. 여성의 정서적인 ‘재능’은 성차별에 의해 발생한 전반적인 비용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자유와 위엄을 판 대가로 사들인 특질들을 낭만화하는 것은 비논리적이고 위험하다. 그런 특질이 비록 ‘훌륭한’ 것이며, 노예 상태를 조금이나마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압제자의 분노와 슬픔을 달래어 하루 정도 더 그의 손을 붙들어둘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 P484

많은 면에서 서로 유사하기는 하지만 여성들은 집단과 관련해서 볼 때 남성들보다 훨씬 더 많이 고립되어 있다. 여성들은 공적인 집단이나 권력집단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어머니로서 여성들은 (성장하고 나면 어머니를 떠나는) 아이들과 ‘집단화’되어 있으며, 일시적이고 피상적으로만 다른 여성들과 연결되어 있다. 공원에서, 여성이 보조적인 기능을 하는 곳에서, 이성애주의자들의 파티 등에서만 서로 뭉친다. 이처럼 여성들은 필수적인 임금 노동보다는 ‘자유롭게’ 선택한 사적인 생활에서 연결될 때 서로 일시적으로 친구가 될 뿐이다. - P494

전통적으로 남성뿐 아니라 여성은 남성의 희생이나 협력보다는 다른 여성의 도움이나 희생을 보다 쉽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기대가 비교적 안전하고 성공 확률이 높다. 이는 심리적으로 우리 문화가 남성에게 보다 높은 가치를 매기면서 남성이 최고가 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여성들끼리 서로를 ‘감시 단속’하는 역할을 부여했음을 나타낸다. 심지어 페미니스트 운동에서도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특정한 지원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알고 지내는 남성으로부터도, 혹은 자선 기관이나 산업체, 정부와 같은 공적이고 남성적인 관계당국으로부터도 지원을 요구하지 않는다. 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여성은 남성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제할 수가 없다. 남성들의 신체적 성적 보복이나 더 나아가 경제적으로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 P501

페르세포네-프시케-신데렐라로서의 여성은 특정한 것을 성취할 수 없다. 여성이 여성의 자격으로서 세계 평화나 보편적인 개인의 행복과 같은 목적을 남성이 성취하는 것보다 쉽고 빠르게 성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와 반대로 힘없는 인간으로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욱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남성은 사회계급상 상대적으로 힘이 있기 때문에 ‘여성적’ 특성이 공적인 영역으로 흡수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기 위해 ‘남성적’ 특성을 갖추도록 장려하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여성이 처음으로 조직화해 성취를 이룬 것은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자녀 양육, 낙태, 피임과 같은 이슈와 관련된 것들이다. 집단으로서, 이익집단으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여성들은 이제야 경제 종교 전쟁 평화 과학 예술 등의 보다 ‘중대한’ 이슈들을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 P506

나는 이성에 의한 강간과 임신이라는 생물학적인 사실과 의미가 가부장제 가족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었다고 믿는다. 남성들이 자신의 유전적 불멸성을 증명하려는 욕구 또한 주요 요인이었다. 이러한 욕구가 너무 강렬해서 남성들은 자녀가 자신의 정자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당연히 여성의 몸을 식민화하고 여성의 자유를 제한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여성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 강간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 혁명적이다. 여성이 잠재적인 전사(물리적인 방식을 포함하여 단어가 지닌 모든 의미에서)로 간주되는 것 역시 시대착오적이 아니라 혁명적이다. 만약 이런 일들이 실현된다면 현대 생활에 급격한 변화가 일 것이다. - P516

의식이 기적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여성이 권력을 획득하지 않고 가부장제를 물리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 P517

내가 성별 간 전쟁을 시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전쟁을 치러왔다고. 그리고 그런 전쟁에서 여성은 언제나 패자였다고. 여성들이 이런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 것은 남성이 ‘승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 반면 여성은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여지껏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우리가 이미 치르고 있었던 성별 전쟁의 비전은 좀 더 확실해질 것이다. - P523

여성은 다른 사람의 힘과 기술에 대한 사랑과 의존을 자기 자신의 모든 힘과 기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성은 정서적 현실의 핵심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다고 간주되는 만큼이나 신체적 기술적 지적 현실의 핵심으로도 곧장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용기와 신념과 분노와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벅찬 기쁨과 절박함이 요구된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지략 있는 여성만이 다른 여성과 이런 것들을 공유할 수 있고 필요한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 - P525

여성은 세계를 ‘구하기’에 앞서, 남편과 아들을 ‘구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과 딸을 ‘구하기’에 나서야 한다. 여성은 오로지 배우자나 생물학적 자녀를 갈망하고, 보호하고, 보살피는 외골수의 무자비함을 자기보존과 자기계발에 집중하는 ‘무자비함’으로 바꾸어야 한다. - P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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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또는 아시아계 미국 노동자 여성이 "그만 일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를 보살펴줄 수 있는 남자가 필요하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뜻하는 바와 느끼는 바를 이해한다. 그녀는 두 직장을 겸업하기보다 한 직장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백인 여성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가정주부’로서의 그들의 노동 없이는 남편이(혹은 정부가) 먹고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노동이 무한히 소중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든 계급과 인종의 여성들이 가족을 공적인 제도 혹은 여성에게 특히 억압적인 제도로 파악할 수 있도록 사회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P404

모든 남자들(백인)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권력과 특권을 우선 포기하도록 하라. 그들이 아내, 비서, 창녀, 모성으로부터의 평안, 정보, 특권적인 어린 시절 등을 먼저 포기하도록 해보라. 그런 다음에라야 비로소 여성이나 유색인종은 ‘선’이나 ‘평등’의 구원적 특징을 고려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까지 여성과 유색인종은 모든 공짜술과 악수와 트로피와 내부 정보와 ‘살인’을 원할 것이다. 억압 받는 집단은 다른 집단에 못지 않게 권력의 가치를 내재화한다. - P405

‘정신질환’을 선별하고 치료하는 데서 인종차별적 관행의 증거를 찾기란 어렵다. 첫째, 유아학대나 강간과 같은 경우 통계학적인 접근이 그다지 용이하지 않다. 둘째, 대다수 제3세계 사람들은 개별적인 심리치료를 받기에는 그야말로 너무 가난하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통제받을 뿐 아니라, 보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진다. 셋째, 정신의학적 진단과 치료에서 인종차별은 대체로 계급 및 성별에 따른 편견에 의해 좀 더 복잡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흑인 여성과 남성들이 정신의학계에서 차별당하고 오해받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신질환 관련 시설에 고용된 사람들은 인종을 막론하고 입원 환자들에게 잔인하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 P409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흑인이자 여성은 폭력과 자기파괴와 편집증 사이를 비틀거리며 걷는 위치에 있다. 흑인 여성은 흑인 남성이 흑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고 백인 여성을 선호하며 돈이라고는 벌어 오지 않고 아내나 흠씬 두들겨팬다는 점을 전 생애에 걸쳐 분명히 깨달았다. 흑인 남성은 딴 여자들과 놀아나지만, 흑인 여성은 백인 남성으로부터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는 점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흑인 여성들의 눈에 백인 여성들은 굴러먹은 여자들이고 유치하고 부유하며 인종차별적이다. 가장 가난한 백인 여성들마저 자신들에 비해서는 부자이다. 백인 여성은 사랑할 수 없고 강하지도 못하다. 세상에! 그런데도 뭐가 좋아서 남자들은 백인 여성에게 안달하는가. 반면 흑인 여성은 강하지만 그들 역시 굴러먹었고 가난하고 인종차별적이고 백인 남성이나 ‘좋은’ 흑인 남성을 얻는 데 목을 맨다. - P414

많은 심리학자들이 페미니즘에 공감하는 이유는 페미니스트들에 성적으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 페미니스트들은 자기 아내들보다 훨씬 ‘흥미로운’ 여성이다.
대다수의 정신과의사들은 지방 정신병원이나 군립 정신병원 등에 성별에 따라 정형화된 노예 노동이 공공연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들은 의학적이고 심리적인 ‘실험’이 자기 환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축소해 말한다. 그들은 직원회의에서 ‘지저분한 농담’을 하고 페미니스트들의 불평을 조롱한다. 여성들을 존경하기보다는 기꺼이 동정하려고 하며 분노하는 여성보다는 불행한 여성을 좀 더 편안하게 느낀다. - P454

오늘날, 페미니스는 페미니스트 심리치료사를 포함해 스스로를 ‘유색인종 페미니스트’, ‘포스트모던 앤드 글로벌 페미니스트’, ‘퀴어 앤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제3세대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한다. 학계의 페미니스트들은 점점 ‘비활동가’ 또는 ‘반활동가’가 되어가거나 ‘활동주의’를 주로 미국에 반대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자매살해와 같은 서로간의 싸움에 대해, 그리고 영아살해 또는 모친살해를 방불케 하는 나이 든 여성들과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다른 여성에게 모함받고 따돌림당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썼다. 일반적으로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 세대의 여성이 그랬던 것과 달리 다른 여성에 대한 환상이 적다. 그들은 여성이 경쟁적이고,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이 주제에 대해 유용하고 실용적인 책을 쓰기도 했다. 그들 모두가 계속해서 승승장구하기를.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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