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0 - 3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0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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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을 읽으면서 머릿 속을 비집고 들어온 역사적 배경은 다름 아닌 '물산장려운동'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의 중요성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일까.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것쯤으로 간단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헌데 토지 10권에서는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시각과 방향이 당시 무산자 계급 운동과 맞물려 있었던 만큼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이상현과 선우일은 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물산장려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 한한 것이야? (...) 인도식이다, 중국식이다, 남의 형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에게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는 일제에 대한 저항 아니겠느냐, 그 말이야. 중국과 다르다 하며 반대하는 놈들, 별 무소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설사 일본놈 자본에 눌리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가정하더라도 3.1운동 이후, 이 시기에, 어떻게 일으킨 불꽃인데? 그걸 끄려고 덤비는 놈들은 다 반역자다! 몇 사람의 기업가가 돈 좀 벌게 된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구. 새 발의 피라구. 그걸 못 새겨서, 아 그래 초가삼간 타는 것보다 빈대 타 죽는 것이 시원하다는 심보 아니고 뭐겠냐 말이야. 일본놈이건 조선놈이건 착취당하기론 마찬가지라구. 길가에 쫓겨 나앉아서 집 찾을 생각은 않고 싸움질하는 꼴밖에 더 되겠느냐 말이다. 계급투쟁을 나쁘다 하는 게 아니야. 계급투쟁 그 자체도 투쟁대상은 일본이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엔 말이야."
"(...)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비난을 퍼붓는 이곳 좌파 과격분자들의 이론과 의돈형님의 이론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형님 말씀이 영세한 자본, 불리한 조건으로 풍부한 자본, 유리한 조건, 그리고 뿌리를 깊이 내린 그들과 경쟁하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고 존립하는 것조차 그들 뜻대론데 자본이 최소한도 유통을 유지하려면 노동자들 임금에서 재주부릴밖에 달리 길이 있겠느냐는 거지. 일본인 업체나 일본인에게 고용되면 일자리 잘 얻었다 하는 것이 일반의 인심 아니야? 왜냐, 든든하고 조선인들보다 임금이 후한 때문이 아니겠어? 일자리는 모자라고 노동력은 많고 결국 남아나는 노동력은 임금이 싸도 흡수되게 마련인데, 불평불만은 싼 곳에 있지. 비싼 곳은 적어도 싼 곳이 쓰러질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 아냐? 장차 노사문제로 혼란을 겪게 될 때 제일 먼저 칼끝에 올려지는 것이 조선인 기업가인 것은 뻔한 일이지. 그러니 몇 사람을 살찌우는 대신 그들은 일본자본가의 방패로 삼는 동시 민족분열의 원천도 될 수 있다는, 나는 의돈형님이 말한 중에서 이 한가지만은 경청할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착취하는 데 일본놈 조선놈 다를 것이 없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란 말이야. 일본이 지금 사회주의의 물결을 두려워하고 골머릴 썩이는 것도 사실이지." (P332~335)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의 여파로 유화 정책(물론 기만이지만?)으로 정책을 전환한다.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되고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철폐문제가 가시화되자 한국인 자본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은 같아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물산장려회가 만들어지고 전국적으로 홍보가 진행, 확산되며 물산장려운동은 대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우리 손으로 만든 제품을 쓰자는 운동은 애국심에 호소할 수 있었던 만큼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측면이 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923년 이후 물산장려운동은 쇠퇴하는 흐름을 보인다. 한국인 지주들은 물산장려운동 초반만 해도 그것이 자신의 밥그릇을 지켜줄 수 있다 생각했지만 일본 자본에 비해 규모나 기술 면으로 취약했던 국내 자본은 수요를 따라갈 생산력과 기반을 애초에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가와 상인은 수요를 맞추어야 했던 데다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값을 터무니 없이 올리기도 하면서 국내 경제는 대혼란이 초래되었다. 또 이 때 러시아 혁명 이후 국내에도 공산주의 비밀결사 단체들이 속속들이 만들어지는 상태였다.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조선은 현재 일본 제국주의이자 자본주의의 노예이기 때문에 이를 깨부수어야만 민족 해방 및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다 주장했다. 이들 중 일부는 물산장려운동이 자본가와 중산층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기심을 조장한다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던 것이다.

3.1운동으로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반향은 컸다. 이로 인해 상해 임시정부가 생겨났으나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김구를 비롯하여 각종 파들의 내분과 갈등으로 체계적인 정부 운영 및 독립 운동 지원이 이어지지 못했다. 또 러시아에 가 있던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코민테른에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공산당 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로 나누어 대립하였고 거기에 러시아 내전(볼셰비키 적군 VS 민족주의 백군)에 일본군이 참여하여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이 발생하면서 그 곳에서도 더 이상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국내에서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 변경으로 일부 지식인들 중 개량주의자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친일의 길을 걷는 사람이 생겨났다.


10권에 특히나 마음이 아팠던 것은 야무네와 딸인 푸건의 이야기였다. 시집 가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자신이 들어와서 남편이 아프게 되었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너무하지 않나. 또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된 홍이와 명희도 있었다.
수녀가 되었어야 했나 생각하던 명희도 마음이 아팠고 끝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앉은 홍이와 장이도 있었다.

'어째서 우리 조선여자들은 결혼 못하는 것을 그렇게 수치스럽게 여기는 걸까. 독신주의를 이단시하며 모멸과 조롱으로 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몽달귀신이니 처녀귀신이들 하고 사후까지 액신으로 처우하는 것은 결국 독신자를 사악한 존재로 보기 때문일 게야. 중을 보고 흔히 중놈이라 하는 것도 독신자를 경멸하는 의식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P456)

"저는 저 나름대로 복음전도에 있어서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는가 많이 생각해보았고, 또 체험에서 얻어진 것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애국사상과 복음을 함께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간벽촌에 있어서 기독교란 아주 생소하고 서양사람 종교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리고 미신적으로 믿어지는 불교며 무당들, 점쟁이를 통한 귀신신앙도 뿌리깊은 것입니다. 유교에서 오는 조상숭배도 그렇고요. 그러나 아무리 몽매무지한 사람에게도 내 나라를 잃었다, 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심정적으로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조선에 있어서 독립사상과 기독교 정신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전도정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P460)

종교는 인간을 향한 구원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사회 개혁을 위한 목소리는 낼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여옥이 말했던 것처럼 종교가 개인의 구원만을 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나라는 뺏겼는데 신에게 빌어 자신만 구원받으면 무얼 하겠나?

당시 종교계에 독립 운동가들도 있었지만 친일에 몸담은 자들도 많았기에 뼈아픈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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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1-19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독립운동가도 있고 친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 거겠죠 그래도 종교인은 좀 낫기를 바라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19 09:01   좋아요 0 | URL
종교 노선들도 분열과 갈등이 존재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종교로 인하여 여전히 세계는 갈등 중이잖아요. 당시에도 기독교 내부에서 폭력 노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나라가 이 모양인데 종교인이라고 신에게 귀의하는 전도 운동만으로 되겠느냐, 그런 독립운동을 하는 대중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었구요.

독서괭 2023-01-19 04: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부분 들으면서 물산장려운동, 화가님이 나중에 써주시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반갑습니다😆 이리저리 복잡한 역사적 상황들이 펼쳐지는데 운전하며 듣다보니 가끔 흐름을 놓치기도 하고;; 그냥 박경리선생님의 깊은 공부와 입체적인 논쟁 묘사에 감탄할 뿐입니다.
저도 아무네 너무 맘 아팠어요 ㅠㅠㅠㅠ 그 시대 딸 가진 어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에효 ㅠㅠ
덕분에 역사 공부 하고 갑니다.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3-01-19 09:01   좋아요 2 | URL
읽으면 바로 써야 하는데 한 번 놓치니까 계속 지나가게 되더라구요. 저도 이번 편은 꼭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썼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뻐요^^
저도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에 감탄하고 놀라곤 합니다. 들으면서도 소름이 돋을 때가 몇 번씩 있어요. 어쩌면 그렇게 그 시대를 살다간 인물을 마치 지금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처럼 적어놓으셨을까 싶은 생각이요. 덕분에 저도 역사, 사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진짜 푸건이 시어머니 너무했어요ㅜㅜ 자기 자식만 소중한지 쩝! 저도 감사합니다.
 
춘추좌전 - 상 - 전면개정판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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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책 읽기를 시작하면서 하나라, 은나라 시기를 지나면 춘추 시대를 만나게 된다.  
전국 시대는 죽고 죽이는 혼란의 시기였으나 7웅을 중심으로 정권이 구성되므로 헷갈림이 덜하다. 그러나 춘추 시대는 다르다. 어찌나 많은 지방 정권들이 존재하는지 보고 있으면 머리가 혼란하다. 예를 들면, 진은 3개가 있는데 한자를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당연히 지도상 위치도 다르고 민족의 특성도 다르다. 한글 번역만 보고 접근했다가는 오인하기 쉽다. 그러므로 춘추 시대를 공부하는 것은 특히나 원전을 같이 보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춘추좌전을 읽어야 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 바탕이 되는 <춘추>가 춘추 시대를 담고 있는 경전이 아닌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춘추 시대를 산 다양한 사상가들의 경전과 고전이 있지만 그런 책은 시대상은 알 수 있어도 당시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춘추>는 공자가 편수한 것으로 알려진 노나라 역사서이다.  
기원전 722년(노은공 원년)부터 기원전 468년(노애공 27년)에 이르는 총 255년 간의 역사가 담겨 있다. <좌전>은 전한 제국 초기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춘추>에 대한 다양한 '전(傳)' 중 지금까지 살아 남은 3 종류(춘추좌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중 하나인데 가장 유명하다. 
그렇다면 세 가지는 어떻게 다른가? <좌전>은 역사기술식으로 경문을 풀어내고 있는 반면 <공양전>과 <곡량전>은 질문과 답으로 경문의 뜻을 해석하고 있어 의리론에 입각하여 서술되어 있다. 이는 시대적 배경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다. 
<좌전>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전의 원전을 토대로 만들어졌지만 <공양전>과 <곡량전>은 분서갱유 이후 경전을 암송하던 사람들에 의해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만을 확인할 때는 <좌전>만한 것이 없다. 다만 <좌전>의 기록 자체는 소략하여 그것만 읽어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번역 해설서들의 도움이 있어야 원문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나라 역사를 읽는다고 춘추 시대를 알 수 있는가? 알 수 있다. 노나라는 지방 정권 중 어찌 보면 약소국에 속한다. 그렇기에 진(秦)이나 진(晋), 초(楚)나라처럼 강대국을 비롯한 각 지역의 열국과 관계를 맺으며 정권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면 당시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그 와중에 나타난 영웅과 못난 인물들도 만나게 된다.

좌전을 읽어보면 '인의예지'에 입각한 논리에 의한 해석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공자가 편수했다고 알려진 책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진나라의 난서가 군사를 이끌고 가 정나라를 쳤다. 이에 정나라가 행인(외교사절) 백견을 보내 강화하도록 했으나 진나라 군사가 오히려 그를 죽였다. 이는 예의가 아니다. 군사가 서로 싸우더라도 사자가 얼마든지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일이다. 이에 초나라 자중이 진(陳)나라를 쳐 정나라를 구했다. (...)"

춘추좌전 1권은 BC 552년 양공 21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200 여년의 시간 동안 기억에 남는 사건은 역시 제환공과 진문공이 패자가 되는 순간, 초장왕이 패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 아닐까. 제환공과 진문공은 부인할 수 없는 춘추오패였고 초장왕은 논란은 있지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다만 그들이 패자가 되는 데 있어서 참모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제환공에게 관중이 있었듯 진문공에게는 선진이 있었고 초장왕에게는 손숙오가 있었다. 리더의 단독 행동만으로 패업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생각한다. 물론 그 패업에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기본이 되어야겠지만.

이들이 패자가 된 순간을 좌전의 기술로 확인해보자.

장공 15년 : 기원전 679
15년 봄, 제후 · 송공 · 진후 · 위후 · 정백이 견에서 만났다. 여름, 부인 강씨가 제나라로 갔다. 가을, 송인 · 제인 · 주인이 예를 쳤다. 정나라 사람이 송나라를 침공했다. 겨울 10월.
- 노장공 15년 봄, 제환공과 송환공, 진선공, 위혜공, 정여공이 다시 견 땅에서 만났다. 이로써 제나라가 비로소 패자가 되었다. 가을, 제후들이 송나라를 위해 예나라를 쳤다. 이 틈을 타 정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했다.
-> 확인할 수 있듯 제후들이 견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 제환공이 패자가 되었음을 알기는 어렵다. 그곳에서 만남으로써 서로 간에 약속을 한 것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음이다.

희공 28년 : 기원전 632
28년 여름 4월 기사, 진후와 제 · 송 · 진(秦)나라 군사가 초나라 사람과 성복에서 싸웠다. 초나라 군사가 크게 패했다. 5월 계축, 공이 진후 · 제후 · 송후 · 채후 · 정백 · 위자 · 거자와 천토에서 결맹했다. (...)
- (...) 초나라 군사들이 공격권에 들어오자 진나라의 중군 주장 선진과 부장 극진이 중군의 정예부대인 공족(진문공의 친위부대)을 이끌고 초나라 군사의 옆을 치고 들어갔다. 그러자 호모와 호언도 말머리를 돌려 중군과 함께 자서의 군사를 협격했다. 이에 초나라의 좌군도 마침내 궤멸되고 말았다. 이로써 성복의 대회전은 초나라 군사의 대패로 귀결되었다. 단지 자옥이 휘하 군사들을 수습하여 움직이지 않은 까닭에 초나라의 중군만은 무사했다.
- 5월 11일, 진문공이 정문공과 결맹했다. 5월 12일, 진문공이 초나라의 포로 등을 주양왕에게 바쳤다. 5월 14일, 주양왕이 진문공을 예주로써 대접하면서 술과 음식을 권했다. 주양왕이 진문공을 후백수로 임명케 했다. (...) 5월 28일, 왕실의 경사인 왕자 호가 앞장서 왕궁의 뜰에서 제후들과 동맹을 맺으며 (...)
-> 성복전투의 승리로 진문공은 패자에 오른다. 진문공이 패자에 오르는 것은 드라마틱한 순간이다. 형제들의 기에 눌려 쫓기는 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겪은 후 오른 자리이기 때문이다.

선공 12년 : 기원전 597
12년 봄, 초자가 정나라를 포위했다. 여름 6월 을묘, 진나라의 순림보가 군사를 이끌고 가 초자와 필에서 싸웠다. 진나라 군사가 크게 패했다. 가을 7월, 겨울 12월 무인, 초자가 소를 멸했다. 진인 · 송인 · 위인 · 조인이 청구에서 동맹했다.
- 6월 15일, 군수품을 실은 초나라의 치중이 필 땅에 도착했다. (...) 초장왕이 말했다. "무력을 과시해 제후들을 위협한 것은 '집병'을 하지 못한 것이오. '금폭'과 '집병'을 못했으니 어찌 '보대'할 수 있겠소. 또 강대한 진나라가 상존하고 있으니 어떻게 '정공'을 이룰 수 있겠소. 백성들의 기대와 어긋난 일이 아직 많으니 어찌 '안민'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겠소. 다른 사람의 위기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고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의 번영을 꾀했으니 어찌 '풍재'를 이뤘다고 하겠소. 무에는 이같이 7가지 덕이 있는데 나는 한 가지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후손에게 보일 것이오. 용무는 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오. (...) 지금 진나라는 죄를 지은 것이 없고 백성들은 충성을 다하여 죽음으로써 군명을 받들고 있소. "(...) 황하 강변에서 하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선군의 사당을 지어 승전을 고하고는 이내 회군했다.
-> 사실 초장왕은 열국들이 모두 인정하는 패자에 올랐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본인도 강대국인 진을 꺽지 못했음을 자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필 싸움에서의 승리로 스스로 패자에 올랐다고 하고 있다.

번역자인 신동준 선생님 책으로 나는 올재 클래식스 버전을 갖고 있어 사실 그것으로 읽었다. 기존에 선생님 번역으로 몇 권의 동양 고전을 읽어서 읽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간혹 원문이 실리지 않은 단어가 이해가 안 갈때는 사전을 찾아보면서 읽었다. 공부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좌전을 읽으면서 중국의 역사 문화의 시작을 이해할 수 있는 첫 걸음이라 생각했다. <사기>나 <자치통감> 등은 이후 시기를 다루기 때문에 춘추 시대 역사를 알기는 어렵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동주 열국지>까지 추가로 읽는다면 더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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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1-15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도 다 같은 ‘진‘이 아니군요? ^^ 화가님께는 중국역사도 쉬울거 같아요~!!
예전에 세계사 수업시간에 중국 나라 변천사 외우던 기억이 납니다 ㅋ

거리의화가 2023-01-16 09:18   좋아요 1 | URL
저는 세계사 수업을 받은 기억이 워낙 오래되놔서...ㅋㅋ 어쨌든 한글로는 이름이 다 같은 ‘진‘인데 한자로는 다 달라서 주의를 기울여야되더라구요^^ 중국 고대사 중 춘추 시대 관련 역사서를 읽는 것은 어쩌면 고전 이외에는 거의 처음이라 지도와 연표 봐가며 천천히 읽었습니다.

희선 2023-01-16 0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은 중국 역사 잘 아시겠습니다 저는 아는 게 없네요 중국은 진나라가 여럿이어서 한자도 함께 써야 알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16 09:19   좋아요 1 | URL
희선님 저도 잘 몰라서 시작했어요^^ 이럴 때 한자 공부해둔 게 도움이 되네요. 물론 중국어 공부할때도요^^;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1 - 하.은.주~춘추 시대 : 신화에서 역사로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1
진순신 지음, 박현석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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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각지에 정권이 동시에 병립하여 각각의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역 정권들은 끊임없이 흥망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신화는 함몰되어 버린다. 어떤 이유에선지 함몰을 면한 일부가 세상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신화는 역사를 반영한 부분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전체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단편적인 반영이다. 어떤 의도에 따라 허구로 조작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화에서 역사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고고학상의 발견은 극히 구체적인 역사 그 자체의 흔적이다. 그러나 흔적은 흔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역사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허구로 조작한다고 말했지만, 그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신화가 기록된 것은 국가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뤄져서, 그것을 더욱 강화할 필요를 느낀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8세기에 접어든 뒤였기 때문에 허구에 의한 조작의 조직성이 높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P13

이야기중국사 1권은 중국의 신화, 전설의 시기부터 춘추 시대까지를 다룬다. 작가 진순신은 당대 최고의 중국역사문학가였다고 하는데 출생지는 일본 고베이고 본적은 타이완의 타이베이다. 1924 년생으로 중국인으로 태어났으나 1990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다고 한다. 때문에 작가가 일본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지녔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특히 앞 부분의 신화 부분은 중국 고대 신화와 일본 신화의 신들을 서로 비교하며 나열해 놓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신화는 역사 시대에 와서 필요에 의하여 선택적으로 취했다고 여겨진다. 일본의 신화가 역사 시대에 구미에 맞게 역사서에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지에 흩어진 신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 중 그 때까지 구전되어 남은 것은 100%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회자될 만한 이유가 있어서 남은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의 기록이 승자에 의해서 채택된 것이듯 신화도 정권을 유지하고 홍보하는 수단이 되지 않았을까.

요가 제위(位)에 있고, 순이 섭정을 할 때
공공을 유릉(幽陵)으로 유배 보내 북적으로 바꾸고,
환두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해 남만으로 바꾸고,
삼묘를 삼위(三危)로 옮겨 서융으로 바꾸고,
곤을 우산(羽山)에 극(極, 유패)하여 동이로 바꾸고,
라는 처분을 했다.
북적, 남만, 서융, 동이라는 중국의 ‘사이관(四夷觀)‘이 여기에 나타나있다.
만들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적, 만, 융, 이 등 중원에서 보면 변경에 있는 각 부족은 처음부터 변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원에서 추방되어 사방의 변경으로 가게 된 것이라 되어 있다.
이것은 요와 순의 실재, 비실재 문제와는 상관없이 유력한 각 부족이 중원 주변에서 멀리 떨어진 땅으로 옮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상식이었다고 여겨진다. - P65

공자로 인해 요순 임금은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하다. 한반도는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이로 불렸는데 북적, 남만, 서융, 동이라는 용어가 요순 시대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니 놀랍다. 물론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인 것이지만 당시 중원은 지금보다 훨씬 영역이 좁았던 만큼 그 나머지는 모두 변경 지대였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무렵 중원의 부족들이 변경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부터 사이관이 출현하였다.

요의 주요한 사적은 백성에게 시간을 준 것, 천문의 관측이었다. 순은 부모에게는 효, 동생에게는 애, 아내는 그에게 정절을 지켰다. 주군인 요를 섬길 때는 현명한 사람들을 모아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실패한 사람을 처분했다. 순의 주요한 사적은 인사(人事)와 관련이 있었다. 우는 말할 것도 없이 치수가 가장 큰 업적이었다. 준(準, 수평을 재는 도구), 승(縄, 직선을 재는 도구)을 왼손에, 규(規, 각도를 재는 자)를 오른손에 들고 분투를 거듭하다 결국 반신불수가 됐을 정도였다. 구주를 개척하고 천하를 둘러보고, 구산(九山)을 다스리고, 구천(九川)을 끌어들인 것과 같이 그는 어디까지나 '지(地)'의 일에 일관했다. - P91~92
하라는 국호는 우가 처음으로 봉해진 나라의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그 후 전국적(全國的)인 정권은 시조가 처음으로 봉해진 땅의 국명을 국호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상(商, 은), 주, 진(秦), 한, 위, 진(晋), 수, 당, 송 모두이 관례에 따른 것이다. 몽골 정권은 특별히 어디에도 봉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명이 아니라 추상적인 가명(名)을 골라서 원(元)‘이라고 명명했다. 원에 의해서 하 이후의 전통이 무너진 셈이다. - P102

국호가 땅의 국명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된 것이 하나라 때부터이다. 이전까지는 씨족 공동체 사회였으나 이 때부터 사유 재산이 발생하고 계급의 격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의 우(禹) 임금은 왕조의 시조이기도 했으나 치수(治水)에 공을 들여 만민의 고통을 없앴기에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을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성왕으로 이름을 알린 것이다. 또한 나라의 근본 제도를 안착시킨 왕이기도 하다.

전승에 의하면 하와 은은 조상이 같지만, 계열이 다른 부족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서로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가 멸망하고 은의 천하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생활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틀림없이 하는 권력의 자리에 안주하여 수장이나 그 주변의 간부들이 타락했을 것이다. 사람들도 퇴폐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기반의 생활권 속에서 보다 청신한 기풍을 가진 은이 힘으로 권력을 대신했다. 단절이나 혁신보다 계속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은에서 주로의 교체는 흔히 ‘은주혁명(殷周革命)‘이라 일컬어지듯 커다란 변혁이었다. 그것은 계속이라기보다는 단절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그에 비해서 하와 은의 교체는 일종의 사회 발전 선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P118

하나라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고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그 실존을 부정하는 반면 은나라는 은허의 발굴로 실존하는 역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은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을 '상(商)'이라고 불렀는데 그 시조가 하남성의 상이라는 나라에 봉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중국에서도 '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대체로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왕조가 바뀌는 과정은 어느 역사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 왕조 내부의 부패와 혼란 등이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은나라 사람들의 행동은 전부 점복(占卜)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점복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실권이 점복을 관장하는 사람의 손에 쥐어질 우려가 있다. 왕이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점쟁이들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 스스로가 점복을 행해야만 한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갑골을 구워 나타난 점괘를 판단하는 것은 왕의 몫이었다.
은나라의 왕은 일종의 법왕(法王, 사제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신과 조상신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고 점복을 관장했으니 성직자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수장으로서 현실의 정치도 맡았다.
이와 같은 제정일치 체제에서 왕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는 자, 신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은나라의 왕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 신이었다. - P152~153

하는 역사가 아닌 신화 시대에 가깝고 은은 실존하는 문명이므로 분명 존재하는 왕조였으나 신화와 역사 시대의 중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은은 여전히 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제정일치 사회의 모습이 엿보이는데 마치 고조선의 단군처럼 제사장이 군장의 노릇을 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은은 기력이 쇠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여력이 충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 힘의 분산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일단 주의 아들인 녹보를 제후로 봉하기는 했지만, 무왕은 감시를 위해 자신의 동생인 숙선(鮮)과 숙도(叔度)를 녹보에게 붙여 은의 옛 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늑대의 재보를 나누고, 거교의 식량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일곱 개의 구멍을 보기 위해 주가 해부했다고 하는 비간의 무덤에 정중하게 흙을 쌓아 올리고, 주 때문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를 석방했다. 이 일련의 일들은 주 무왕의 이른바 ‘인정(仁政)‘이었다.
그런 다음 무왕은 서쪽으로 개선했는데 도중에 이곳저곳을 들렀다. 신정권의 성립을 알리고 선무공작(宣撫作)을 펼쳤다. - P234

은은 상제의 뜻에 따라 점을 친 내용을 갑골문자로 일일이 기록으로 남길 만큼 뛰어난 기술 문명을 가진 나라였다.
주 무왕이 은에 선전포고를 하며 "지금 은왕 주는 그 부인의 말을 듣고 스스로 하늘에서 떠나고, 그 삼정(천, 지, 인)을 훼괴하고, 그 왕부모제(王父母弟)을 멀리하고, 그 조상들의 악을 끊어 버리고, 음성(淫聲)을 만들어서 정성(正聲)을 변란(變亂)하여, 부인을 이열(怡悅, 기쁘게 함)했다. 이에 지금 나 발(무왕의 이름)은 이를 삼가 천벌을 행한다."(P228) 출정했다. 은의 주력부대는 노예 병사들이기 때문에 싸울 마음이 없어(노예에서 비로소 해방된다는 생각에) 무기를 거꾸로 들고 싸우며 주나라 군대의 위해 길을 열어 주었다. 이 때 은의 주왕은 자존심이 상해 스스로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왕국유는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에서 주의 제도 가운데 은의 제도와 가장 커다란 차이를 보인 것은 ‘입자입적제(立嫡制)’와 ‘묘수제(廟數制)’와 ‘동성불혼제(同姓不婚制)‘였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후 중국 윤리의 근본이 되었기 때문에 주에서 중국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은의 그림자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주는 봉건제를 도입함으로써 각지에 여러 가지 문화가 병립하는을 허용했다. 주 시대에 여러 가지 요소가 움트고, 서로 섞이게 되었다.
신성왕조 시대는 귀신에 반하는 문화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채로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주가 성역을 해방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문화도 해방된 지역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 P271

은과 주의 결정적인 차이는 결국 봉건제일 것이다. 주 시대에 들어오면서 각 지방 정권은 각자의 문화를 가진 국가로 존재하면서 자신들의 국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서로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힘이 약하면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 문화가 이 때 자연스레 섞이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천하가 넓어졌다.
첫 번째는 예전까지는 변경이라 여겨졌던 지방으로 중원의 제후가 이봉(移封)된 경우다. 오(吳)나라의 조상이라 여겨지고 있는 의후(侯) 적(矢)이 그랬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두 번째는 토착세력이 중원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중원화한 경우다. 삼묘의 후예인 듯한 초나라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세 번째는 제후의 변경 개척이다. 객사현 출토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의 동북 진출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P387

춘추 오패라는 말이 있다. 춘추 시대에 다섯 명의 패자가 등장했었다는 말인데, 책에 따라서 다섯 명의 이름이 각각 다르다.
누가 뽑든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은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 두 사람이다. 진(晋)나라의 문공은 다름 아닌 환공 말년에 제나라로 망명했던 진나라의 왕자 중이다. '제환, 진문(齊桓晋文)'은 패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유력한 인물은 초나라의 장왕이다. 대부분의 문헌이 그를 오패에 넣었지만 오직 『한서』의 「제후왕표서주(諸侯王表序注)」만은 초나라의 왕인 장왕을 오패에서 제외했다. 초나라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 고른 것인 듯하다.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해서는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나라의 양공(襄公),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 등의 이름을 여러 책에서 들었다. 이 사람들은 패자로 보기보다는 패자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지만 패업을 이루지 못한 '준패자(准覇者)'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P434

역사에 인물의 비중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춘추 시대에 쟁쟁한 인물들이 비슷한 시기에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우연치곤 묘하다. 나는 특히 공자도 높이 평가한 관중과 안영, 춘추 오패의 이야기들이 정말 재밌었다. 그 중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은 춘추 오패에 반드시 들어가는 인물이지만 나는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 월나라의 구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우리가 흔히 들어 알고 있는 토사구팽 등의 고사가 여럿 나온다. 여전히 이것들이 기록에 남아 구전되어 지금까지 인용되는 것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송나라의 수도에서 열린 '미병지회'에 모인 것이 14개국의 대부로 이전까지의 회맹과는 달리 제후들이 아니었다는 점에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에서 행해진 회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창자는 송나라의 군주가 아니라 대부인 향술이었다. 또 교섭의 사전공작 단계에서도 초나라의 자목(子木)과 진(晋)나라의 조맹(趙孟) 등과 같은 대부급 인물들이 활약을 했다.
군주가 국정을 전담하던 시대는 끝나고 실권은 그 밑에 있는 귀족이나 중신들의 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 P484
진(晋)나라의 분열은 틀림없이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향에서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구국(舊國)의 분열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위치했던 지방이 천하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오나라의 운하와 월나라의 해로가 중국을 한층 더 긴밀히 연결시켰다.
어느 사이엔가 나타났다가는 눈 깜빡 할 사이에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흥망은 그야말로 일장춘몽과도 같다. 그런 만큼 그 짧았던 시대의 역사는 시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 P553

오나라 시기 만들어진 운하가 중국 내륙의 물길의 시작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고 월나라의 해로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에 중요한 이동 루트이다. 두 나라는 이제 저물고 전국 시대를 통과하게 되면서 이름이 사라지지만 운하와 해로는 중국에 이후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과 나라는 사라져도 작업은 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운하를 만들기 위해 고생한 백성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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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1-08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 역사는 아는 게 별로 없군요 거리의화가 님은 이런 책을 좋아하시고 많이 보셔서 잘 아시겠습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일본 역사와 신화도 잘 아는군요 저 때 나온 말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09 10:11   좋아요 0 | URL
저도 중국의 역사를 잘 몰라서 시작했어요. 이 책은 사두기만 하고 방치했다가 이제야 읽었습니다^^; 네 작가가 나중에 일본으로 귀화했더라구요. 두 나라의 신화를 비교하니 신선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고사는 중국 뿐 아니라 한중일 사회에서 곳곳에 쓰이는 것 같습니다. 유용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레이스 2023-01-12 0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의 서재는 역사책으로 가득하네요^^
진순신의 책 몇권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1-12 09:05   좋아요 1 | URL
오... 몇 권씩이나 갖고 계시는군요. 저는 이 시리즈만 갖고 있어요. 한문 공부와 역사 공부를 하다 보니 중국사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토지 9 - 3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9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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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뇌와 광포! 대체 어떻게 하면 그리 미칠 수 있는 건지. 미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힘들지도 모르지. 두 형제는 드디어 만났고. 그놈의 신여성이란 단어는 그럴 거면 왜 붙이는 걸까? 남녀 평등 부르짖지 말라고? 여자들도 엄연히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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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1-07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여성론 운운하는 남자들 엄청 짜증나더라구요~

거리의화가 2023-01-07 18:53   좋아요 1 | URL
마지막에 임명빈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데 한숨 팍팍!ㅋㅋ

독서괭 2023-01-07 20:46   좋아요 1 | URL
하 저도 그부분 듣고 페이퍼 쓰고 싶었는데 못 썼네요🤬
 
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945 이후 - 서로 의존하는 세계 하버드-C.H.베크 세계사
이리에 아키라 책임편집, 이동기 외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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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의 세계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류의 결속과 분열 사이에 있는 그 간극을 메울 정도로 일련의 상호 연동 관계로 빠져들었다. 1945년 이전에는 변화의 동력이 주로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 기술과 이데올로기였다면, 1945년 이후에는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그 과정에 참여해 앞서 존재했던 수많은 분리의 장벽들을 없앴다. 비서구 지역의 국가와 사람들은 서구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적응하기보다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심지어 사람들이 서로 간의 차이를 점점 더 많이 인식했을 때조차 인류의 결속에 관한 의식은 계속 성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자연생활환경과 함께 공유하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21세기에 닥친 핵심 질문이 되었다. (P15)

현대 세계는 보통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시작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전 베크 세계사에서는 이와 다르게 20세기 전후부터 1970년 무렵까지 넓은 범위를 다루었다. 이는 전후 많은 국가들이 탈식민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고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념 갈등이 시작되면서 냉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베크 세계사 마지막 권에서는 1945년 이후 전후 복구 과정과 이념 갈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세계가 연결되는 초국주의를 다룬다. 이로써 1945년 전후의 세계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들여다본다.

제2차 세계대전은 경제와 기술의 발전에서 유럽 침식 경향을 가속화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을 실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유럽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독일이 유럽 대륙을 패권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결국 양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패권은 외부의 개입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었다. 독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유럽 국가들은 더는 유럽에서 자력으로는 경쟁과 균형의 옛 체제를 회복할 수 없었다. (P23)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유럽의 세기는 기울고 미국과 소련이 부상하였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고 유럽의 대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참전국들에 전쟁으로 쏟은 비용이 막대했으나 전후 비용은 더 막대했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차등이 없었다.
미국은 1947년 초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 안정화를 위해 '마셜 플랜' 정책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서유럽 정부들이 자신의 편에 서기를 기대했으나 거부되자 마셜 플랜에 참여하기를 포기했다. 동유럽 국가 정부들은 마셜 플랜 정책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소련 지도부의 압박으로 대신 소비에트 블록이 만들어졌다.
트루먼 행정부는 마셜 플랜을 통해 서유럽을 재건하며 자유주의적 체제를 강화했다. 스탈린은 서독의 국가 건설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으나 서독도 서유럽 블록 체제에 합류하였다. 1949년 말에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가 붕괴한 자리에 대립하는 두 개의 권력 블록이 만들어졌다. 그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의 두 승전 주역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유럽은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뉘었다. (P51)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 끝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 트루먼은 베이징 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장제스를 구하는 군사작전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1950년 1월 12일에 딘 에치슨 국무부 장관은 아시아의 미국 '방위선'은 일본에서 필리핀 군도까지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것에 따르면 타이완의 국민당도 아시아 대륙의 여타 다른 정권들도 미국의 군사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P55~56)
한반도는 미소 갈등의 최전선이었다. 내전은 국제전으로 비화되었고 일본은 공산화를 막는다는 미국의 결정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을 연이어 체결하였고 자위대를 창설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대서양 지역과 같은 정치 결속을 갖지 못했다. 일본과 일본의 옛 지배 지역 사이에 반목이 지속되었고,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문제가 생겼다. 그로 인해 1954년 초에 미국이 '공산주의 침략자들'에게 맞서자며 제안한 군사동맹에는 영연방국가들인 영국과 오스트리아, 뉴질랜드를 빼고는 단지 필리핀과 태국, 파키스탄만이 참여했다. (P65)
인도는 상이한 지역에 따른 행정 권리를 넘길 대상이 불분명했다. 네루는 하나의 인도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은 이슬람 주민을 위한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이로써 인도 통합은 실패하였으며 1947년 8월 15일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각 독립국가로 선포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종속되는 것에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그 지역을 장악할 때 협력했던 전근대 지배 엘리트들에게도 각을 세웠다. 아랍 민족주의는 팔레스타인의 갈등으로 가속화되었다. 그것은 1917년 11월에 영국이 그 지역에서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거주지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말미암아 촉발되었다.

시온주의자들은 나치의 인종 학살 이후에도 아직 유럽에 남아 있는 유대인 난민들에게 시급히 새 고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로비를 한 끝에 1947년 11월 29일에 유엔 총회는 3분의 2의 지지로 두 개의 국가를 건설해 서로 결속시키는 분단 계획을 통과시켰다. (...) 1954년 5월 14일에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을 떠났고, 유대인 군은 이미 강자의 지위를 차지했고, 유대인 국가 평의회 의장은 곧장 독립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했다. (P69~70)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영국으로 인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물론 이들간의 기본적인 종교, 민족주의적 갈등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말이다.

서구 열강과 동유럽 블록 국가 모두 재정적인 이유로 재래식 군비 계획을 1950년대 초에 계획했던 규모대로 이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의 지도부는 모두 점차 핵 억지력에 의존했다. 핵폭탄 투입을 경고하면서 재래식 군비의 결함을 보충하거나 고비용이 드는 재래식 무기고의 감축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핵 억지 체제로 넘어가니 핵무기로 인한 절멸 공포가 생겨났다. 그래서 핵무기를 보유한 양대 열강 지도부는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생긴 인지 오류와 핵무기 대치 상태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인해 대화가 지속되기는 극히 어려웠고, 그 결과 동서 준비 관계에서 새로운 긴장이 계속 발생했다. (P106~107)

카터는 전략 군비를 제한하는 정도가 아니라 과감하게 감축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미 국방부는 새 협상안을 마련했지만, 그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렵게 달성된 양보안을 다시 미국의 헤게모니 지위에 유리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소련 군부가 그것에 맞서는 요구를 제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동시에 카터는 소련 내의 체제 비판가들에 대한 지지를 과시하듯이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것은 오히려 체제 비판가들을 더 심하게 탄압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행동으로 인해 브레즈네프는 카터와 직통선을 만들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팽창 전략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카터는 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자문을 받아 들여 ‘중국 카드‘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1978년 5월에 카터는 브레진스키를 베이징으로 보내 전략 협력과 기술 지원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했다. 10월 중순에 미국과 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외교 관계 채택을 알림으로써 세계 여론을 놀라게 했다. (P133~P134)

고르바초프는 ‘56’ 세대였다. 그것은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공격할 때 사회화되었으며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을 가졌지만 사회주의의 ‘개선‘을 희망했던 당의 관료들을 말한다. 그를 서기장으로 끌어올린 ‘옛 동지‘ 대표자들과 고르바초프의 근본적인 차이는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의 확신에 사로잡혀 소련제국의 불편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P167)
이념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 본 리더의 모습들을 통해 생각할 점이 많다.

미국 금융계와 의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의 이탈에 개의치 않았지만, 실제로 미국의 힘과 이익을 구현할 금융거래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들은 브레턴우즈 체제로 미국이 잠재적으로 소모적인 대규모 해외 원조 정책을 그만두어도 되리라고 기대하며 달러의 지위를 그 통화 체제의 ‘기축통화‘로 끌어 올렸다. 실제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각국은 자국 통화를 금에 ‘연동‘(국제 통화 기금 체제 안에서 합의된 환율 패리티 범위로 통화 가치를 고정하는 것)해야 했지만, 달러가 사실상 환율을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달러는 새로운 금본위가 되었다. 국제 거래는 달러로 이루어졌고, 모든 국가는 자국 통화 가치를 달러에 대한 비율로 규정했다.(35달러가 금 1트로이온스로 교환되었다.) 이 체제는 1950년대초 전후 재건 국면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되지만, 세계 전역에서 상품과 용역의 값은 달러로 지불되었다. 따라서 다자간 협정 체제의 토대는 달러였다. (P220)

2차 대전 후 미국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만들고 문호 개방을 하며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세계화의 체제를 선도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주도에 의한 무역과 금융의 민주화는 다원주의와 권력의 공유를 가져왔다. 유럽과 아시아의 신 세력이 부상하며 미국의 지도력은 도전을 받게 된다. 세계화는 세계적 협력을 요구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독특한 지점은 3~5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1, 2부가 세계를 이끈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주목했다면 3부에서 4부는 미국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동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 이유와 맞닿아 있다.

3부는 전후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인해 지구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 인류가 지구 생태 환경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출현한 단계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를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인류는 그 수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다른 종의 영향력을 크게 압도하면서 환경과 지구 생태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얼마나 오래 그렇게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먼 훗날 인류세는 하나의 지질 연대로 보기에는 너무 짧은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국제 지질학회는 지금 인류세를 그 학문적 개요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씨름하고 있다.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우리 편에서 보면 다행이기도 하고 속박이기도 한데, 인류세는 앞선 지질시대들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P385)

저렴한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인류는 기후 변화를 목도하게 되었으며 경제와 의학 발전으로 인해 맞은 압도적인 인구 증가는 역설적으로 지구 자원의 부족을 느끼게 했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자연은 파괴되었으며 생물다양성은 줄어들었다.
저렴한 에너지는 인간에게 새로운 지렛대를 제공했다. 그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일을 성취했고 더 빠르고 멀리 이동했으며 돈을 벌었고, 때로는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코 환경을 변화시켰다. 저렴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그렇게 했다. (P421)

우리는 소수의 선호하는 식물 종과 동물 종을 선택하여 단순한 경관 안에서 관리했으며 이러한 경관에 잘 적응하는 다른 소수의 종들(쥐, 사슴, 다람쥐, 비둘기 따위)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경관에 살았던 다른 식물과 조류, 포유류, 곤충, 양서류의 수를 크게 줄이거나 이들을 제거했다. 이 점에서 윤리적질문은 언제나 거의 동일하다. 우리는 인간과 소, 닭, 돼지는 수십억 개체에 달하지만 호랑이와 코뿔소, 북극곰은 겨우 몇천 마리에 지나지 않거나 전혀 없는 세상에 만족하는가? (P474)
놀란 세계는 부랴부랴 환경보호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의 대중적 환경보호 운동은 인간 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더 완전하게 인식하는 길을 닦았다. (P567)

21세기로 접어드는 세계 주요 대도시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뉴욕이나 파리, 도쿄, 두바이, 뭄바이, 나이로비 같은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느 도시에서나 같은 의류 상표를 볼 수 있고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같은 호텔 체인에 묵고 같은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같은 것들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한곳에서 더 다양한 것들을 접하기도 했다. 도시 주민, 식습관 그리고 음악, 영화, 연극, 문학 같은 문화 상품은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인 성격을 띠어 갔다. 이러한 곳에서는 동질화와 이질화가 나란히 진행되면서 혼성적인 세계 문화가 나타났다. (P571)

4부는 인류가 교류하며 만들어진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 각 지역의 문화는 지식을 생산하고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사실 세계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경제학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벤처기업의 통합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효과를 설명하려고 처음 사용했다. 세계화 지지자들은 우월한 경제적 문화적 관행을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아울러 창조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참여자 모두를 위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회의론자들은 기업의 탐욕과 경제적 착취가 각 지역의 자결권을 침해한다고 경고했다. 세계화는 또한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창출해 주었지만, 주변부 주민들에게는 종속을, 나아가 모두에게 더 큰 불평등을 초래한 것으로 비쳤다. (P572)

사실 나는 세계화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회의적인 면에 아무래도 더 기운다.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적 불평등은 문화적 흐름에서도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과연 세계의 각 시민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1970년대 들어 서구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과 더 직접 연관된 정치 운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은 정치 체제를 바꾸지 못하는 무력함을받아들여서라기보다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지역적·개별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등장한 운동들(예를 들어 환경 운동, 여성 운동, 게이 운동과 레즈비언 운동 등)은 국적이나 젠더, 인종에 상관없이 개인의 행복에 더 큰 관심을 표명했다. 이 운동들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동시에 세계적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동반자 관계, 가족, 공동체를 조직하는 대안적 방법을 실험했다. 성인을 위한 대안 노동환경과 어린이를 위한 대안 학습 환경을조성한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파편화tragmentation는 1960년대 운동의 힘을 분산시켰고, 동시에 서유럽과 미국의 사회적·문화적 풍경을 점차 변화시켜 나갔다. (P643)

서구에서 시작된 이런 운동들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영향을 끼쳤다. 세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런 흐름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종교가 냉전과 맞물리며 세계 각지를 분열시키고 냉전 종식 후에도 정치와 결합하며 종교 민족주의로 이어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1979년 이란 혁명,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 중동의 종교적 갈등을 통해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다원주의가 종교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정치에 종교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쉽지 않겠지만 부디 마사 누스바움의 관용주의에서 희망을 찾아본다.

누스바움의 대안은 19세기에 오귀스트 콩트가 처음 제안하고, 존 스튜어트 밀이 가다듬은 "인류교"에 바탕을 두었다. 이 종교는 "공적 제도나 공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는 도덕 감정인 연민"을 신봉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 애국심은 타인을 향한 관용과 연민을 담고 있기에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자긍심을 길러 준다. "자유로운 사회는 다원주의에 대한 존중을 훼손하지 않고, 이러한 종류의 도덕적 이상[연민]을 확립하며, 그것을 뒷받침할 도덕 교육을 장려할 수 있다. 이 이상은 평등과 존중의 공적 규범과 결부되어 공적 정치 문화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따라서 관용적 국가는 공적 활동에서 종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기보다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용을 국민 정체성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이다. (P689)

5부는 세계의 발전을 초국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초국적 역사, 초국적 접촉, 초국적 의식, 초국적 기억을 통해 전 세계가 공유하는 역사와 문화, 기억이 있음을 확인한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힘의 방정식이 냉전의 전부였다면 냉전은 그렇게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우리는 소련 뿐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 사회가 미래의 물결이라는 인상을 심으며 자본주의와 서구에 반대하는 여론의 관심을 끈 덕분에 세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냉전의 군사적 토대 뿐 아니라 이념적 토대에 대한 도전이 세계의 지정학적 지도를 뒤흔들고 뒤바꾸어 놓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도전은 근본적으로 초국적이었고, 전 세계적인 인권 운동과 세계 평화를 위한 운동에서 소련과 서구 모두에 맞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냉전 종식에는 이런 모든 요소가 담겨 있었고, 지정학적 ‘현실realities‘만을 원인으로 지목한다면 기본적으로 동어 반복일 것이다. 즉 냉전이 그러한 ‘현실‘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고 본다면 ‘현실‘이 변해서 냉전이 끝났다는 주장은 뻔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지정학적 게임이 벌어지는 무대가 크게 변해서 점차 게임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핵무장국도 여전히 존재하고 국제 관계와 국가 간 경쟁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초국적 세력이 꾸준히 그 자리를 침범해 가는 중이었다. (P825)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힘겨루기는 미소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냉전은 오래 이어졌다. 하지만 냉전 종식을 위해 많은 국제 기구들이 만들어지는 등 초국가적인 도전이 끊이지 않았기에 허물어질 수 있었다. 국가의 노력, 리더의 결단이 냉전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냉전이 끝나고도 여전히 인류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겨누는 것이 공멸의 길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말의 세계는 이렇게 초국적인 존재들이 국경을 초월한 다양한 층위의 활동과 감정을 보여 주는 만화경 같았다. 초국적 존재는 대부분 국경이 낮아지고 국경을 초월한 정보 획득과 의사소통이 쉬워지면서 생긴 새로운 기회를 활용해 자신과 타인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계를 폭력과 혼란의 도가니에 몰아넣을 활동을 벌인 부정적인 존재도 소수 있었다. 결코 초국적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물론 세계에는 초국적이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다른 나라나 사회와 물리적으로 단절된 사람도 있었고, 원칙과 취향, 성격 등을 이유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이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초국주의의 일부 측면에는 반대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P859)

인류는 끊임없이 교류와 단절을 이어가며 지금껏 발전해왔다. 최근 들어 각국에 우경화 정부가 들어서고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흐름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커다란 전쟁을 겪은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놀라운데 현재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이 벌어져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현실이 씁쓸하다. 과연 세계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마지막 장에서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정치적 이력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그는 적어도 초국주의에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뒤이어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가 들어섰다는 것은 자국에도 건강하지 못한 일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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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2-31 2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계화라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은 더 좁아진 느낌이에요. 네모난 영상으로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세상을 보는 느낌 ㅠㅠ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텐데 잊히기만 하는거 같아 안타까워요. 화가님 편안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마니 받으세요 *^^*

거리의화가 2022-12-31 21:14   좋아요 1 | URL
냉전 이후 분열과 갈등이 끝날 줄 알았건만 여전히 반목은 계속되고 있네요. 말씀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그들만의 싸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제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요^^;
미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픈 것은 좀 나아지셨는지ㅠㅠ 새해에는 건강하세요.

미미 2022-12-31 2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베크 세계사 45년이후를 올해 클리어 하셨군요!!
세계적인 우경화 현상은 과거 전쟁,역사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벽돌장인 화가님 화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1-01 18:12   좋아요 0 | URL
네^^ 클리어하고 2022년을 끝내고 싶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ㅎㅎㅎ 앞 권들은 언제 나올지 모르겠지만 나오면 그때가서 읽는 것으로 하려구요.
미미님 올 한해 복 많이 받으시고 독서 생활도 화이팅입니다!*^^*

2022-12-31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1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3-01-01 0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945년이후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화가님, 한분야를 깊이 읽어내시는 모습, 항상 존경합니다.
내년에도 읽기 화이팅이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거리의화가 2023-01-01 18:17   좋아요 1 | URL
이 책에도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군데 군데 언급됩니다. 한반도 뿐 아니라 미소 등 많은 국가들에 냉전을 더 심화시킨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뿌리깊은 이념 갈라치기도 여전한 요즘 생각이 깊어집니다.
페넬로페님의 올해 책 읽기 힘껏 응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독서괭 2023-01-01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성실한 독서생활 하자구요!! 😆

거리의화가 2023-01-01 18:18   좋아요 1 | URL
괭님. 해피 뉴 이어!ㅎㅎㅎ 올해도 함께 즐겁게 읽어요^^

희선 2023-01-01 0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자기 나라 이익만 생각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나라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좋은 쪽으로 흐르면 좋을 텐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도 끝나기를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 잘 챙기시고 2023년에 하고 싶은 거 즐겁게 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01 18:19   좋아요 1 | URL
회의적인 사람이라 회의적인 생각만 듭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겠죠^^;;;

희선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올해도 희선님의 읽고 쓰기 응원합니다^^

새파랑 2023-01-01 0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의 역사 연구는 2023년에도 계속될거 같습니다~!! 2023년도 즐거운 독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거리의화가 2023-01-01 18:19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응원 고맙습니다^^ 올해도 좋은 소설 많이 소개해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