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B. 필립스(Ulrich B. Phillips): 1918년 옛 남부의 노예제가 아프리카 미개인들과 본토 태생의 그 후손들에게 영광스러운 문명의 인장을 남겼다 -> 한두 세기 전 니그로들은 아프리카 야생에 살던 니그로다, 미국에 끌려온 이들과 후손들은 일정량의 문명을 획득했고 근대문명사회의 삶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니그로의 진보는 문명화된 백인들과 어울린 결과다, 막대한 수의 니그로들이 문명화된 백인 국가에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한데 앞으로 이들이 백인 남성들의 나라에서 평화로운 체류가 어떻게 가능하며 진보와 후퇴 중 어떤 식으로 흘러갈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은 플랜테이션 시스템이다.
미국 남부 노예제.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노예제.
그런데 이 노예들 중에서도 여성 노예의 특수한 상황은 탐구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여성 노예는 ‘성적으로 난잡하다’, ‘모계중심 성향을 갖는다‘라는 편견으로 여성 노예의 상황은 가려져 있었다.
노예제 논쟁은 1970년대 들어서서 다시금 부상하면서 출판물은 쏟아졌지만 노예 여성을 조명하는 책은 출간되지 않았고 노예제 시절 흑인 여성에 대한 관심도는 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흑인 가정에 대한 허버트 거트먼의 연구는 돋보인다.
거트먼은 흑인 가정의 활력이 노예제의 가혹함보다 더 강력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를 증거로 제시.
‘아내다운 성향’을 공식화하고, 노예 여성은 노예제라는 특수 상황에서 가정 내 꿈이 좌절되었다는 점 이외에 백인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 거트먼이 가정, 노예 공동체 전체에서 흑인 여성들을 다차원적으로 고찰했다면 그의 주장은 더 강력해졌을 것이다.
노예 시스템은 흑인을 재산으로 정의하였다. 소유주 입장에서 노예는 무성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흑인 여성들은 그들의 눈으로 볼 때 비정상적이었다.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노예로 운영되던 목화 산업 소유주들은 노예 여성의 출산 능력에 주목했다. 노예의 재생산으로 사업을 이끌어가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들은 노동력 증대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낳은 자식은 그저 똑같은 노예로 취급될 뿐이었다.
게다가 여성이어서 성적 억압에 취약했다. 그것은 강간으로 행해졌다. 소유주의 경제적 지배력이 성적 통제력과 맞물리면서 이루어지는 행태다.
임신한 여성들은 정상적으로 농장 노동을 해야 했고 하루치 할당을 채워야 했으며 항의하면 다른 일반 노동자들이 받는 채찍질까지 당해야 했다.
여자 노예들은 자유로운 노동자나 남자 노예보다 훨씬 이익이 많이 남았다. 유지 비용이 덜 들었기 때문이다.
산업화로 여성은 어머니와 주부로 규정되고 이는 열등함의 표시였다. 하지만 노예제의 위계는 이 19세기 여성성 이데올로기에 들어맞지 않았다다. 남녀 노예는 모두 노예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성 노예가 여전히 불합리한 부분은 더 있지 않았던가? 일반화하기에는 애매하다.
흑인 가정에 대한 악명 높은 보고서인 1965년 연구인 ‘모이니핸 보고서’에서 말하는 바는 흑인 사회 내 사회경제적 문제가 모계중심의 가족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억압의 근원은 남성 권위자가 부재해서 빚어진 문제다.
-> 그래서 남성 권위자를 세워야 한다!라는 요구(남성우월주의)로 이어졌다.
한편 사회학자 리레인워터(Lee Rainwater)는 일자리, 임금인상, 경제개혁책을 제안, 민권운동과 시위를 지속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럼에도 모이니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 결과 흑인들은 어머니와 자식 간의 우월적 관계를 강조, 남자와는 약한 연결고리를 가진 가정을 꾸린다는 주장이 횡행하게 된다.
E. 프랭클린 프레이저(E. Franklin Frazier)는 노예제가 흑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극적으로 묘사, 흑인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한편 흑인 여성들의 독립성과 자립성을 오독하여 경제적 필연성도 전통도 남성적 권위에 대한 복종심을 주입하지 못했다며 개탄(니그로 가족: 1939년 출간)
노예제와 자유 속에서의 흑인 가정(by 허버트 거트먼, 1976년 출간): 남편, 아내, 아이가 노예로 마구 팔려가면서 가족은 생이별하면서 가정이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가족의 유대 관계와 문화 규범, 같이 있고자 하는 욕구는 유지되었다.
흑인 여성들은 백인 여성들처럼 가정 내 역할에서 중요성이 낮게 평가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흑인 여성들이 흑인 남성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노예생활 실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요단강아 흘러라(by 유진 제노비스)에서 흑인들이 노예제에 결부된 가부장제를 받아들였다는 주장. 대부분의 여성이 자기 남자들이 수모를 당할 때마다 자신 역시 같은 신세가 된다? 딸들에게는 강인한 여성 모델이 필요한 것처럼 아들들에게는 강인한 남성 모델이 필요하다? -> 전형적인 가부장주의
미국 니그로 노예 반란(American Negro Revolts by 허버트 앱시커)에서 노예로서 자신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흑인 여성은 드물다?
노동과 폭력에 내몰린 노예들은 도망했고 그들과 후손들은 도망 노예 공동체를 남부 전역에 만들었다. 이 공동체는 플랜테이션을 상대로 약탈 원정을 떠나기 위한 기지 역할을 하면서 봉기 지도자 파견 등 노예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저항 행위에는 도망이나 봉기, 사보타주만이 아닌 읽고 쓰는 능력을 은밀하게 습득하고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야학)하는 것도 있었다.
알렉스 헤일리가 자기 조상들의 삶을 다룬 소설 ‘뿌리’에서 독학을 하고 몰래 신문을 읽으며 정치 현안을 익히고 이웃들과 나누는 모습이 묘사된다.
노예 소유주들은 흑인 여성들의 기를 꺾기 위해 강간이라는 테러를 권장했다. 그럼에도 성적 학대 문제가 문헌에는 얼버무려지고 노예 여성들이 백인 남성의 성적 관심을 부추긴다고 넘겨짚는다.
여러 세대 여성들이 노예제 시기에 자행된 성범죄의 증거를 보존하기 위해 행했던 시도를 기록인 코레기도라(Corregidora, by 게일 존스Gayl Jones)
톰 아저씨의 오두막(by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는 노예제 폐지 운동 계열의 문학 중 유명 -> 이 책으로 많은 여성들이 노예제 반대 투쟁에 결집
하지만 작품 속 노예의 삶은 현실을 왜곡한 측면이 있다. 작품 핵심 여성 인물이 당대 대표 모성상을 옮겨놓은 흑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앨리자는 흑인 얼굴을 한 백인 모성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거트먼에 따르면 제도화된 노예 규범들이 여성들에게 혼전성관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크게 부여했음에도, 여성들은 결국 영구적인 결혼생활에 정착해 자신과 남편의 소득을 바탕으로 가정을 꾸렸다. 모권사회 이론과 대립하는 충분한 기록을 바탕으로 설득력을 갖춘 거트먼의 주장들은 엄청나게 소중하다. 하지만 거트먼이 가정 내에서, 그리고 전체 노예 공동체 내에서 흑인 여성들의 다차원적인 역할을 구체적으로 탐구했더라면 그의 책은 훨씬 더 강력해졌을 것이다. - P31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이 똑같이 노예 소유주의 절대적인 권한에 복속되어 있는데 노예들 사이에서 남성우월주의가 힘을 얻는다면 명령 체계에 위험한 균열이 촉발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노동자로서의 흑인 여성들은 ‘더 약한 성‘이나 ‘주부‘로 대우받을 수 없었으므로, 흑인 남성들은 ‘가장‘이라는 인격의 후보일 수 없었고 ‘가족 부양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결국 남자, 여자, 아이가 모두 비슷하게 노예 소유 계급의 ‘부양자‘였기 때문이다. - P35
노예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를 고용하는 대부분의 직물, 대마, 담배공장에서 노동력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 노예 여성과 아이들이 설탕 정제와 쌀 도정 같은 ‘힘든 분야‘에서 일할 때도 있었다. (...) 수송과 벌목 같은 다른 중공업들도 노예 여성과 아이들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다. - P39
산업자본주의가 촉발한 가정과 공적 경제의 분열은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열등함을 확고하게 굳혔다. 지배적인 선전물에서 ‘여자‘는 ‘어머니‘와 ‘주부‘의 동의어가 되었고, ‘어머니‘와 ‘주부‘ 모두에는 치명적인 열등함의 표시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흑인 여성 노예들 사이에서 이 어휘는 어디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노예제의 경제적 배열은 새로운 이데올로기 안에 포함된 위계적인 성역할을 부정했다. 그러므로 노예 공동체 내에서의 남녀 관계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패턴에 부합하지 않았다. - P41
노예 거주 구역의 가정생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주제는 성평등이다. 노예들이 주인의 권력 강화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수행했던 노동은 평등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흑인들은 자신의 가정과 공동체생활의 울타리 안에서 찬란한 위업을 힘들게 달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노예로서 겪는 동등한 억압에서 파생된 소극적인 평등을 능동적인 특징으로 바꿔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의 사회관계를 특징짓는 평등주의이다. - P49
수많은 여성들이 노예제를 피해 북부로 도망쳤다. 가장 극적인 도주를 시도한 인물 중 하나는 앤 우드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었다. 앤 우드는 마차 한 대에 무장한 소년과 소녀 들을 태우고 자유를 향해 달렸다. 이들은 185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출발했고 그 후 노예 추격꾼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볼때 나머지는 북부에 도달했다. - P52
노예제 폐지론자 사라 그림케는 앤 우드처럼 저항에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한 여성의 사례를 설명한다. 이 여성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주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수차례 시도하다 워낙 많은 매질을 당해서 "두 상처 사이에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 여성은 기회만 있으면 플랜테이션에서 도망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거운 무쇠목걸이 족쇄가 채워졌다. 그리고 이 목걸이 족쇄를 부숴버릴 것을 대비해서 주인은 여성의 앞니를 식별용으로 뽑아버렸다. 그림케이 따르면 이 여성의 주인들은 자선을 베푸는 기독교 가족으로 알려져 있었음에도 - P53
노예제 시기에 진행된 제도화된 강간의 패턴을 백인 남성의 성적 충동의 표현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마치 순결한 백인의 여성성이라는 허상이 그것을 잠재울 수 있었으리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의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강간은 지배의 무기, 억압의 무기였고, 그 내밀한 목표는 노예 여성의 저항 의지를 억누르고, 그 과정에서 노예 남성들의 사기를 꺾는 것이었다. - P57
노예제 폐지 운동에 가담했던 백인 여성들은 흑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특히 분노했다. 여성 노예제 반대 협회의 운동가들은 백인 여성들에게 흑인 자매들을 지켜주자고 호소할 때 여자 노예들이 겪는 끔찍한 강간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이 여성들이 노예제 반대 운동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여를 하긴 했지만, 노예 여성의 복잡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흑인 여성들은 기실 여성이었지만, 노예제 시기의 경험들-남자들과 함께 하는 고된 노동, 가정 내에서의 평등, 저항, 매질과 강간-은 이들을 대부분의 백인 여성들과 구분 짓는 어떤 성격상의 특징을 발전시키도록 부채질했다. - P61
엘리자 같은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대다수 흑인 여성들 가운데 눈에 띄는 별종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인의 채찍질을 감내하고 자기 가족을 위해 일하며 이들을 지키고 노예제에 맞서 싸웠던, 구타와 강간을 당하면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던 모든 여성들의 축적된 경험을 대변하지 못한다. 명목상의 자유를 누리게 된 여자 후손들에게 고된 노동과 인내, 자립의 유산을, 끈기와 저항, 성평등에 대한 굳은 의지를, 요컨대 새로운 여성성의 표준을 제시하는 그런 유산을 남긴 것은 바로 이런 여성들이다. ******************************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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