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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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기차를 타고 우주를 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만화 은하철도999가 국내에 들어와 히트를 치고 주제가가 번안되어 불리던 시절이었다.
기차의 외양은 증기기차 모습인데 엔진은 '나 엔진이요~'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 신기했다.
엔진이 가동되면 형형색색의 부속품들에 불이 들어온다. 헌데 그 기관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석탄 에너지다.
메가로폴리스에 가면 우주로 갈 수 있는 것인가. 만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본 그림일 것 같다.

이욘 티히의 우주일지는 이욘 티히가 우주를 여행하게 되면서 겪은 기록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것은 1950년대 말인데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핵을 사용한 후 위기 의식을 느낀 소련이 우주 산업에 천착하게 된 즈음이다.
미국과 소련의 본격적인 우주 전쟁이 벌어지고 지구인들은 당장 가닿을 수는 없어도 우주 여행이 더 이상 막연한 꿈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욘 티히가 본 우주는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있을 법한 세계의 모습이어서 놀라움을 자아낸다.
원래 있음직한 것을 그려내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인데 그걸 창조한 작가가 천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처음에 간 곳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있는 나를 만난다. 몇 시간 전의 나, 어제의 나, 미래의 나를 말이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방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들은 모두 나였는데, 각자 다른 날짜의, 다른 주의, 다른 달의, 아니 한 명은 무려 작년의 나인 것 같았다. - P40

어떤 곳에 가서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어느 기계에 들어가서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나오는 것이다. 단,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가 없다.

브주트 사회에서는 뛰어난 학자들이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에 봉착하면, 기계 속에 몇십 년이고 들어갔다 나온다는 것이다. 종종 재생되어서는 그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냐고 불쑥 물어본 뒤, 만약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으면 또다시 원소 분해 상태로 돌아가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이를 되풀이한다고 했다. - P324

개인적으로 가장 놀랍고 재밌었던 부분은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우주에서 개발한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고 역사적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실제인듯 실제가 아닌 듯 과거를 여행하는 즐거움을 주지만 동시에 괴로움을 느끼게도 한다.

이욘 티히는 이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으나 잘못 개발된 기계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동쪽에서 뜨던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멀쩡하던 무덤이 다시 들어올려져 시체가 돌아다닌다. 과거로 돌아가니 크던 키가 작아지고 나이도 젊어졌다.
이렇게 되면 내가 태어난 직후 아기 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도 갖게 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실패했다. 시간 여행의 원자가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품고 우주 시작 밖으로 나가면서 그 안에 힘을 응축시켜 에너지를 얻게 되었지만 3명의 악당으로 인해 엉망이 된다.

나는 프로젝트 이후의 역사에서 발전과 선은 오로지 내 덕이라고 선언했다. 그 말은 바로, 내가 조치한 수많은 귀양의 선한 영향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인류는 나에게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보스코비치,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스, 스피노자,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창조적 활동을 수행해 온 무수한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해 감사해야 하리라. 귀양자들의 운명은 혹독했지만, 그들은 마땅히 벌받을 만했고, 또한 내 덕분에 역사 앞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보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결국 역사의 발전을 도왔다. - P284

우주에서도 의회가 있고 선택의 순간들이 있다.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무질서와 혼란, 전쟁을 보면서 이를 악용하여 질서 유지를 핑계 삼아 독재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 끔찍하다.

'이 나라에서는 현재 혼돈이 가능합니다. 무질서가 판을 치고, 더 이상 법을 존경하지 않죠. 기계가 우리 행성에 우주 최고의 질서를 가져오기를,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해 주기를 바랍니다.' - P336

타임머신은 이제는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작가가 묘사하는 타임머신은 다른 느낌이었다.
역사를 다시 만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쓸데 없는 싸움과 인간이 행하는 잘못을 교묘히 드러내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 방식을 통해 인간의 욕심과 오만함이 얼마나 우주를 망쳤는지 이야기한다.

언제나 그랬다. 시간 기술의 개입은 늘 다른 현상들을 눈사태처럼 불러일으켰고, 이것들은 적절한 수단을 쓰지 않고서는 제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동요를 일으키고, 이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P268

우주는 오염되고 인간들이 버린 폐기물이나 쓰레기로 넘쳐나는 결과를 낳는다.
작가는 우주를 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으나 마치 현재의 지구를 들여다본 것 같은 혜안을 보여준다.
이쯤되면 SF작가가 아니라 미래학자가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우리는 가능한 한 전자두뇌들에게 인간의 이런 끔찍한 모습을 알려 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제 지구의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 범죄의 역사로 물든 기계들이 프로시온 행성 주변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계정신병리학이 지금으로서는 무력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P95

그래서 소설을 읽는 재미는 보장할 수 있지만 섬뜩함도 느끼게 하는 것도 있었다.
렘의 연작 소설인 <솔라리스>와 <우주 순양함 무적호>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소설을 소장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정말 드문데 이 책은 그럴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별점 5를 준 이유다.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을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할 때다. 단 한 순간도 지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나는 우주를 구하고자 경종을 울린다. - P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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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5 2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 책상 머리에서 째려 보고
있는 책이네요. 도대체 언제
읽을 건데라고 하듯이요.

소설에 나오는 우주를 지구별
로 등치하면 별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환경오염으로 지구별이 날로
뜨거워진다는데 정부에서는
대책이 1도 없어 보입니다.

하다 못해 우리가 사는 지구
별일 지키자는 캠페인이라도
할 것이지.

거리의화가 2022-07-26 09:29   좋아요 2 | URL
책상머리에 있는 책이라면 조만간 읽게 되지 않을까요?ㅎㅎㅎ

말씀하신대로 우주=지구로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오늘날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게 하더군요. 환경오염은 저 멀리에 간 듯 싶어요. 전쟁으로 인해 고물가에 에너지 문제가 심각해지니 다시 원전 재가동하고 이웃 나라에서도 원전수 내보낸다 그러고 있고요. 경찰이니 검찰이니 밥그릇 싸움만 하는 통에 한숨만 나옵니다ㅜㅜ

희선 2022-07-26 00: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주를 구해야 한다고 하는 말은 지구를 구하자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사람이 우주에 쓰레기를 버린다는 말이 있기도 하군요 그건 둥둥 떠다니고 아주 사라지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우주로 가지 못하니 지구를 지켜야 할 텐데... 다른 시간의 자신을 만나면 정신 없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26 09:31   좋아요 2 | URL
네. 들어보니 우주에도 오래된 인공위성 잔해 같은 것은 떠다닌다고 하더군요. 지구의 쓰레기 문제, 그리고 토양 오염 문제 등은 점점 심각해지니 참 안타깝습니다.
ㅋㅋ 생각해보니 다른 시간 속의 나가 수백명이 있다면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하네요^^;;;

새파랑 2022-07-26 06: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f작가가 아닌 미래학자가 맞는거 같아요 ㅋ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의 상상력은 엄청나다는 생각이듭니다~!! 스타니스와프 렘 리뷰를 보면 책이 상당히 흥미로운거 같아요. 화가님은 은하철도 999세대시군요 ^^

거리의화가 2022-07-26 09:32   좋아요 3 | URL
ㅋㅋ 맞습니다. 작가 소개 보니 미래학자라고도 적혀 있더라구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그럴듯하게 쓰는 걸 보면 작가의 능력이 뛰어난 듯 싶어요. 새파랑님도 읽으시면 좋아하실 책이 아닐까요~?ㅎㅎㅎ
네. 아무래도 그 세대가 맞겠습니다ㅋㅋㅋ 흐흐 오래 살았군요. 쩝.

mini74 2022-07-26 14: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솔라리스 넘 재미있어서 영화를 찾아봤는데 구소련 영화?가 유투브에 뜨더라고요 .음.....책이 더 좋았습니다. ㅎㅎ 저도 이 책 사서 지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화가님...저도 은하철도 999와 천년여왕, 하록선장 세대입니다. ㅋㅋ

거리의화가 2022-07-26 14:09   좋아요 0 | URL
앗 구소련 영화요? 솔라리스도 여러 분께서 올려주신 리뷰 보고 재미나서 아무래도 사야할 것 같아요^^; 2달 정도 있다가 사는 걸로...ㅋㅋㅋ 영화보다는 역시 책이 좋지요.
오~ 이 책 읽고 계시는군요. 미니님 감상도 기대됩니다~ㅎㅎ 메텔과 철이, 하록선장, 천년여왕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