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 불타의 게송
등하 지음 / 법공양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대학 1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과 몇 개월 후 우연히 남포동 지하도에서
마주친 날, 그 날 난생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는 얘길  어느 페이퍼에 쓴 적 있다.
그날 헤어질 때 내 손에 쥐어준 조그만 책자가 <반야심경 강의>.
영산법화사 출판부에서 나온 것인데 올 여름 휴가 때 부산 친정에 갔더니 눈에 띄어
가져왔다.

조금 전 책의 맨 뒷장을 펴보니 그의 이름과 내 이름이 적혀 있고, 처음 보는 전화번호가 있다.
49국이면 오오래 전의 영도 쪽 국번.
영도에서 쌀집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전화번호를 적어준 줄은 몰랐다.
아니면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그 사실을 감쪽같이 머릿속에서 지웠던 것일까?
먼훗날의 추억을 위해?

살면서 더욱 절실히 깨닫는 건 사람 마음의 간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제 열광하던 것이 오늘 시들해지고, 또 어떤 좋았던 관계는  머쓱해진다.
어떤 때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자신에게서 멋들어지게 속아넘어 가기도 한다.
추억을 자신의 편의대로 위조하고, 불편한 기억은 삭제한다.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자신도 모르게 전 인생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사람은 타인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자기자신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믿을 수 있겠는가.

등하 스님이 다시 옮기고 펴낸 <법구경>을 읽었다.
오래 전 현암사 판, 김달진 시인의 편역으로 읽을 땐 불타의 게송이라기보다
허무시의 연장으로 읽었었다.
아무리 좋은 뜻의 글이라도 문장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삿된 소견이라니!

최근에 나온 등하 스님의 <법구경>은 '여래의 뜻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진리의 말씀을 무조건 쉽게 풀어쓰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또 잠자리에 들기 전 성경처럼
몇 장씩 읽었다.
내키는 대로......

그런데 이 책에서는  '무명'과 '피안'이 새삼스럽게도 생전 처음 보는 단어처럼 내게 다가왔다.

無明 : 중생이 겪는 생사의 괴로움의 최종적인 원인이 바로 이 무명,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이다.(334쪽 해설)

彼岸 : 삼계를 고해에 비유했을 때, 이 생사의 고통바다를 건너 도달한 저쪽 기슭
곧, 열반을 일컫는 말이다.(338쪽 해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는 해도  어떤 책을 읽을 때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분별심이라는 것을  버리려 해도 호오(好惡)의 감정은 여전히 남는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해진다.
차라리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나중에 반성할 건 반성하지 뭐.

나의 시시한 깨달음은 여기까지.
그래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는 남는다. 소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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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0-10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군요. 읽고 나니 주변이 조금 어둑해진 것 같습니다.
간사함. 그런 걸 느낄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떠들고 다닌 소리들. 다 물리고 싶습니다.

하루(春) 2006-10-1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는 말, 아주 진한 슬픔(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이 몰려오는 것 같네요.

2006-10-1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ng 2006-10-1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사할때 간사해 지더라도 오늘은 또 내 마음 가는대로 사는거죠...흐

waits 2006-10-11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 와닿네요.

건우와 연우 2006-10-1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의 부담이 전화번호는 잊으라 시켰었나요...
시간이 지나니 그마저 추억이 되어 로드무비님의 법구경리뷰를 읽을 기회를 주는군요.^^
법구경구절속에서 소금같은 무엇을 담아내시는 로드님처럼, 어느순간 저도 그렇게 고요히 글속에서 무언가를 받아낼수 있는 그릇이 되고 싶어요.
저는 아무래도 책보다 로드무비님의 리뷰가 더 좋으니 참.....

2006-10-11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자림 2006-10-1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파 껍질을 벗겨 내었을 때 전혀 새로운 색깔의 양파를 보듯이 마음 속 상념들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어 자세히 들여다 보는 님의 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2006-10-12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1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하는 돌>님, 이게 낫겠어요.ㅎㅎ

비자림님, 언제나 진지한 댓글.
님의 말씀이 되려 가슴에 와닿는데요?^^

죄송죄송님, 별 말씀을요!^^*
제가 번거롭게 해드렸는데.

건우와 연우님, 제가 기억을 조작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내 유리한 쪽으로다가.
제가 그나마 낙관적인 건 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으' 리뷰가 좋다고 해주셔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평택, 나어릴때 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지 표상인지 어쩌고 하는
성경구절도 떠오르네요.
찾아봐야겠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mong님, 바로 그겁니다. 히히~~

'만물보다 거짓되고'님, 반갑습니다.
모든 것이 쓸데없는 짓으로 느껴질 때가 저라고 왜 없겠습니까만
또 뭐라고 긁적이는 순간이 주는 즐거움을 무시하지 못하겠어서.
님과 가끔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고 싶어요.

하루님, 전 좀 뻔뻔해졌습니다.

namu님, 어제 이 리뷰 올리고 댓글이 하나도 안 달려 좀 무안했는데요.
님이 짠~하고 나타나서 만세를 불렀답니다.^^

플레져 2006-10-12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낮추는 일, 생각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 싶어서
저도 제 마음가는 대로 저지른 다음에 반성하는 방법을.......^^;;
제목이라고 해야 하나... 언제 들어도 참 좋은 말이에요. 법구경...

2006-10-12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6-10-12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같은 추억, 소금같은 말들이어요. 주변을 포함한 자신을 돌아봅니다.

2006-10-14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15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16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이 이사 수준인 님, 그곳의 가을 만끽하고 계시죠?
부럽사옵니다.^^

역지사지님, 한 며칠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했어요.
어제부터 좀 가벼워지더군요.
일간 또 님께 소식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