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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문득 생각날 때마다, 눈에 띌 때마다 펼쳐서 계속 읽는 책이 네다섯 권쯤 된다.
오늘은 그 중 두 권(<도쿄기담집>과 <예술가의 거리>)을 해치웠다.
종아리와 장딴지가 너무 뻐근하여 오늘 하루는 쉴까 하다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서
땀냄새가 풍기길래 좀더 물씬한 땀냄새를 맡고 싶어 '계단 여행'(플레져님의 표현)에 나섰다.
자전거와 유모차와 재털이로 쓰는 분유깡통과 버려진 미니 콤포넌트가 어제 오후 그대로였다.
한 가지 새로운 건 8층 계단 밑에 일직産 방울토마토 택배 상자가 모습을 보인 것.
일직이라면 권정생 선생이 사시는 곳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는 <도쿄 기담집>에 실린 작품 중 한 편의 제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미국 작가(레이몬드 카버)의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풍 제목이랄까.
오늘 낮, 읽던 단편을 마저 읽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이야기의 배경이
아파트 24층과 25, 26층 사이의 계단이다.
주인공은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싫어해 평소 26층 집까지 걸어다니던 마흔 살 증권거래인.
남편이 죽은 후 신경과민이 된 어머니가 사는 24층에 슬리퍼를 끌고 내려갔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올라갈 테니 팬케이크를 바로 먹게 해달라고 전화를 건 후
20일 동안 감쪽같이 사라진 남자.
너무나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층층이 소파까지 놓여 있다는 호화 계단인 것은 소설과 달랐지만,
에헴, 나로 말하면 어제부터 우리 아파트 계단 꼭대기(21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걸어서 내려온 사람이 아닌가.
이 소설과 비슷한 에피소드가 또 있다.
아내의 진술에 의하면 그의 남편은 결혼 후 10킬로그램이 쪘다.
아침에 즐겨 먹었다는 팬케이크와 바삭 구운 베이컨 탓?
너무 소소한 걸 붙잡고 늘어지는 것 같지만 내 남편도 결혼 후 10여 킬로그램 쪘다.
혼자 오래도록 자취하느라 아침을 안 먹는다는 사람에게 결혼 후 아침마다
가정의 행복을 맛보게 해준답시고 출근 전 참치마요네즈 샌드위치와 달걀야채범벅 샌드위치를
강제로 먹여댔던 것.
고문이 따로 없었다.
가정의 행복은커녕 얼마나 결혼을 후회했을까.
표지에 적힌 "불가사의한, 기묘한,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을 모았다는
이 단편집 속의 이야기들은,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먼 나라의 기담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부터 시작하여, 현실은 더욱 불가사의하고 기묘하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들로 넘쳐난다.
며칠 전 서래마을 어느 집 냉동실 속에서 영아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지런한 민족으로 어릴 때부터 막연히 알았던 국가는
걸핏하면 이웃의 힘없는 나라를 명분 없이 무차별 공격
어제 아침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16세의 정신지체아 소녀를
아파트 경비원과 교회 봉고 운전수와 그 외 몇몇의 남자들이 성추행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제 그런 소식을 접하면 잠시 눈살을 찌푸릴 뿐, 사람들은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상어에게 잡아먹힌 아이를 찾아나선 중년의 여인 이야기('하나레이 만')도 놀랍지 않다.
지난주 영화 <괴물>을 안 봤으면 또 모를까.
'우연한 여행자'의 주인공이 겪는 책이나 책을 읽는 장소와 관련된 '우연'도
알라딘에서 서재활동을 1년 정도만 해보면 알게 된다.
우리는 어느 날 이상한 인연으로 간절히 기다렸던 책들을 만나고, 잊지 못할 사람과 마주친다.
<도쿄기담집>에 관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으로는 의외"라는 식의 평을 많이 보았는데,
나는 그냥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서 깨달았지.
이류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보다는 일류 조율사가 되는 게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우연한 여행자' 42쪽)
무라카미 하루키는 오랜만에 발표하는 작품들을 통하여 이루지 못한 꿈이라든가,
직업이든 사랑이든 최상이 아닌(때로는 말도 안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을 슬쩍슬쩍 비유를 통해 언급하지만 별로 씁쓸해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담담한 어조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