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 이상범의 '귀려'

에 빠져 있다가

고등어 조림을 태우고 말았다


손기정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옥살이를 했으나 훗날

일장기 아래서 나팔 부는 병사를 그려

부역자로 몰린 청전


학비가 없어

미술 강습소에 들어가 화가가 된 그가

 말년에 정성을 쏟아 그린 소재는

누룽지였다

가마솥 바닥에서 조심스레 뜯어내

쟁반에 엎어 놓은 듯

입맛이 당겨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는

누룽지 모양의 구릉이었다


평생 짓눌리고 타서 구수해진 탓일까

외진 산골 구릉과

가난에 찌든 오두막을 그리며

그 속을 드나들며


1960년대

수묵담채

 77 x 196cm

--<토종닭 연구소> 장경린 시집, 2006년, 문학과 지성사 刊




 


                                                                             청전 이상범, '귀려(歸旅)'

 

 

어떤 이의 경우 딱 인생의 어느 부분까지의 그만 알았으면 참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친일을 하기 전, 변절하기 전, 그리고 그의  치명적인 과오를 알기 전 등.
돌이킬 수 없는 일이어서 안타깝고 서글프다.

예전에 내가 다니던 사무실의 여주인은 예술에 대한 조예가 남달라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점심을 먹는 게 취미였다.

재벌 사모님이 부르면 거절하지 않고 무조건 달려와 문앞에서부터 굽신굽신하던 예술가들.
거기에는 정말 의외의 인물도 포함되었다.
둘아갈 때는 사모님이 벽장 속에서 꺼내어 주는 선물(남자는 넥타이, 여자는 스카프)을
병신같이 품에 안고.
(그들은 그 순간 자신이 누군가의 눈에 그렇게 초라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청전 이상범 화백의 귀퉁이가 헐은 산수화 한 점을 한 작고문인의 집에서 기증받아
사무실의 비밀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잘 복원하면 몇 억이라고 귓속말로 얘기해 주시던
어느 분이 생각난다.

그 기억이 먼저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오늘 아침 읽은 시가 마음에 당겨
소개하다 보니 저절로 따라 나온 이야기다.
아주아주 낡았지만, 정갈하고 담백하고, 이상한 기운이 서려 있는 듯하던 청전의 그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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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6-05-2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예술가의 天品이란 게 거기까지라고 봅니다.
그에게 지조까지 기대하고 또 거기에 부응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후원자가 따라야 활동이 가능하지요.
서구의 음악가들에게 왜 유부녀를 포함한 유한마담들과의 관계가 뒤따랐을까 생각해보아도 거기까지가 그들 몫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지조를 지키시고 절개를 잃지 않은 예술가에게는
마땅히 더욱 더 찬사를 보내야겠지요.^^

로드무비 2006-05-25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전 사실 어떤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술 속에서는 이해 못할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명명백백한 자신의 실수나 과오에 대한 태도는 문제가 됩니다.
니르바나님의 인간 이해가 너무 깊어서 다시 한 번
님의 서재 이미지를 쳐다보게 되는군요.^^

blowup 2006-05-2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룽지, 토종닭연구소(헤헤)
어제 오랜만에 막걸리 마시고 배달시킨 짬뽕 오기 기다려요.

로드무비 2006-05-2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그런데 진짜 이상범 화백이 말년에 누룽지를 그렸나요?
시인의 상상력이겠지요? 아무튼.ㅎㅎ
전 방금 무파마 라면 고춧가루와 파 듬뿍 넣어 얼큰하게 끓여 먹었어요.^^

waits 2006-05-25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고독하게 내버려지거나 세상을 떠난 후에나 몇 배의 찬사를 받는 것도 같아요. 문득, 예전 언제 삐까뻔쩍한 벤츠를 함께 얻어타고는 감탄과 흥분과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던 한 민중가수가 떠올랐어요. 비난할 마음은 없었지만 좀은 실망스러웠던...ㅎㅎ

로드무비 2006-05-2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내비치는 표정과 한마디 말에서 의외의 모습을 볼 때가 있지요.
그런데 또 어찌 보면 그게 천진한 마음 아닐까요?
예술가의 개인적인 사정까지 일일이 헤아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좋은 건 좋고, 아닌 건 관심을 끄고.^^

비로그인 2006-05-26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인생에서의 지조와 굽신거림과 초라함을 누룽지 씹듯 씹을까 했으나..



배가 고픕니다.

2006-05-26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우와 연우 2006-05-2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도덕하다해도 욕망은 어쩔수 없다고 봐요. 그것까지 비난할수는 없지만 부도덕한 욕망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범인이든 예술가든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또한 어쩔수 없는 일이죠. 다만 두고두고 사족이 붙겠죠, 그의 예술은 훌륭하였으나....
평범하디 평범한 저는 그저 안타까이 타산지석으로 삼는거죠뭐...

검둥개 2006-05-28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림으로라도 좋으니 당장 누룽지를 먹어보구 싶어욧. ^^

로드무비 2006-06-03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누룽지 좀 부쳐드릴까요?
연말에 카드 대신?^^

건우와 연우님, 그렇지요.
우리는 반면교사, 타산지석, 그런 걸로 위안을......^^

캐서린님, 가끔 님은 시인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