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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박영희 외 지음, 김윤섭 사진 / 우리교육 / 2006년 3월
평점 :
어제 아침, 영화 시간을 맞추려 빠른 걸음으로 전철 역 계단을 올라가는데
노인들만 보면 다짜고짜 달려들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인근 교회에서 나온 일군의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있지 않은 노인들이 표적인 듯했다.
한 할아버지가 손사래를 치며 거부의 뜻을 표했지만, 그 할아버지를 맡은 중년의 여성은
넉살좋게 웃으며 끝까지 카네이션을 다는 기염을 토했다.
난 저런 광경을 보면 화가 치솟는다.
사람이 싫다고 하면 그 의사를 받아들여야 할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는 전철이 도착하기 직전 가슴의 카네이션을 떼내어
사나운 손짓으로 주머니에 쑤셔넣으셨다.
저들은 어버이날 좋은 일을 한답시고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런 강제적인 행동이 지독한 자기도취로만 보인다.
자리를 잡고 앉자 10년도 더 된 어떤 일이 생각났다.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직업을 구하던 가난한 친구 A가 있었다.
비슷한 나이에 한 괜찮은 출판사의 편집장이며 두 아이의 엄마인 친구 B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봄날 홍대앞에서 A와 마주친 B.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마디로 완전히 지치고 절망한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B는 A를 다짜고짜 잡아끌고 근처 단골 미용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미용실 거울 앞에 그녀를 강제로 앉혔다.
꽤 비싼 미용실의 커트비를 내주고 머리를 잘라준 걸 그녀는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날 강제로 머리를 깎였던 A는 살다살다 그런 기막힌 일은 처음이라고 내게 하소연했다.
나는 B에게 못을 박았다.
"미래의 어느 날 혹시 나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내 몰골이 그렇게 절망적으로 느껴지면
모른체해 주거나, 미용실로 끌고 가지 말고 밥이나 사줘. 내 머리에 손만 대었다 봐!"
적령기를 넘긴, 애인 없고 직장 없는 여성에 대한 B의 무시무시한 편견은
나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영화를 보고, 동대문시장 단골 옷가게에서 남편의 여름 셔츠를 하나 고르고
건널목을 건너는데 나이키 매장 옆 모퉁이에 두툼한 겨울 코트를 입고 머리를 산발한
할아버지 노숙자가 그 땡볕에 미동도 없이 앉아 계셨다.
주머니에서 집히는 대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내밀었더니 고개를 흔드신다.
아침에 그녀들을 욕해놓고, 나도 똑같은 결례를 저지른 건가?
그나저나 그 할아버지는 이렇게 화창한 봄날,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고
백발을 어깨까지 풀어헤치고 앉아 무엇을 견디고 계시는 것일까?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탐방 보고서 <길에서 만난 세상>을
가고오는 차 안에서 읽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폐광 이후의 광부들, 외국인 이주 노동자, 공원을 배회하는 노인들,
보안관찰처분대상자, 탈학교 청소년, 한국 남성과 결혼한 아시아 이주 여성 등
세상 구석구석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에 꼼짝없이 갇힌 사람들을 사진과 함께 생생한 글로 접하니
가슴이 답답해 왔다.
어쩌면 편견은 자신이 세상에서 점한 조금의 우위를 누리고 지키는 데 꼭 필요한
당의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늦은 나이에 이르도록 결혼하지 못했던 농촌 총각과 그의 가족들중 일부는
세상에 대한 분풀이를 '비싼 돈을 들여 사온' 외국인 아내에게 몇 곱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다음은 탑골공원에 10년째 출근해 이태백 정약용 신익희 선생의 글 등을
붓글씨로 옮겨 적으며 시간을 보내고 계신 공재규 할아버지의 말이다.
"(......)워쪄? 이것이 인생 아니겠어?"(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