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꿈 속에서 8번 버스를 탔다.
낡은 버스의 운전사 옆 제일 앞자리가 비어서 그곳에 궁둥이를 걸쳤다.
나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다.
어느 정류소에서 내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이 없어졌다.
그 가방 안엔 핸드폰과 지갑과 친구들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힌 수첩이 들어 있었다.
카드 분실 신고를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니 전화번호도 핸드폰도 공중전화를 걸 동전도
내게는 없었다.  친구들과 연락할 길도 끊어졌구나!
아이고 우짜꼬,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대 위의 내 손가방이 있나 없나 그것부터 확인했다.

왜 하필이면 8번 버스일까?
꿈에 버스를 탔다 하면 예외없이 8번 버스이다.
8번 버스는 오래 전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 홍은동의 한 비디오가게에 비디오를 빌리러 갈 때
탔던 버스이다.
점심시간을 이용, 김밥 한 줄을 사서 먹으며 가기도 했고, 퇴근 후 갈 때도 있었다.
처음엔 이름이 '으뜸과 버금'이었는데, 나중에 '영화마을'로 바뀌었다.
한 번 가면 일고여덟에서 열 편 정도의 비디오를 빌렸다.
대여 기간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그 가게의 사장님이 요즘도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비디오 소식지인 <영화마을>의 발행인이었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프로듀서인 이진숙 씨도 안국동 '영화마을'의 주인인가 그랬는데.

내가 본 명작들이나 희귀영화는 대부분 그곳에서 빌려본 것들이다.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 테이프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정말 그곳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고도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녹색극장 앞에서 내려 8번 버스를 기다렸다.
여름엔 여름대로, 겨울엔 겨울대로, 대낮에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질어질했다.
삶의 어질머리.
사는 게 도무지 자신없었고, 내 방에 숨어서 영화나 닥치는 대로 보자 했다.
그런데 그 시절이 나는 그토록이나 그리운 것일까?  에이, 설마!


홍은동 그 비디오 가게에서 몇 번 마주쳤던 한 남자는 얼마 전 이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과거가 없는 남자>)를 보러  씨네포럼에 갔더니 무슨 영화제의 기획위원이 되어
심각한 얼굴로 서류를 들고 사무실과 극장 로비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극장 로비에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뚱땡이 아줌마가 홍은동 영화마을에서 목례를 나누던
그 '호감 가던(!)'  아가씨인지 그는 꿈에도 몰랐으리라.=3=3=3




  마지막  문장이 너무 감상적이라  마음에 안 들어서  바꿔주었습니다. 
요건 마음에 드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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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6-04-1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답변 :

오늘의 교훈
1. 항상 비상금을 나눠가지고 다닌다.
2. 중요한 주소는 여기저기 백업을 받아두자.
3. 지갑을 복대로 대체하자(-.-;).

이리스 2006-04-1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국동 영화마을.. 한때 저도 거기서 비됴를 무지하게 빌려댔죠.ㅋㅋ
가회동에 있는 모 출판사 다닐적에~

mong 2006-04-12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어질머리...이 단어가 콕 하고 와닿아요

urblue 2006-04-1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벽에 꾼 꿈 속에서 친구들한테 왕따당하고 있었어요. 흑흑.

2006-04-12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4-1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제가 써놓고도 콕 하고 와닿습니다.=3=3=3

낡은구두님, 비디오 가게 점원이 꿈인 시절도 있었는데요.
안국동 지점은 저도 두 번 가봤어요.
그곳 주인이었다가 영화 현장에서 활발히 일하는
이진숙 씨가 또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런데 가회동의 출판사라면 거, 거, 거기인가요?^^;

호리건곤님, 지상에서 가장 슬픈 댓글 :
1. 나누고 자시고 할 비상금이 없습니다.
2. 중요한 주소도 이제 제겐 별로 없습니다.
3. 안 그래도 불룩한 배, 복대까지 차면 어쩌라고요!=3=3=3

Mephistopheles 2006-04-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시간을 이용, 김밥 한 줄을 사서 먹으며 가기도 했고, 퇴근 후 갈 때도 있었다.'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가..~~~=3=3=3=3

얼룩말 2006-04-1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재밌어요

로드무비 2006-04-1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룩말님, 다행이에요.^^

메피스토님, 아이참, 김밥 두 줄!
이젠 됐죠?=3=3=3

싱가폴체험학습 님,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이 바쁘신가 보다 짐작은 했어요.
거기다 대학원 개강까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공부하시는 것 알찬 열매로 맺길 기도하겠습니다.
서재에서도 곧 뵙게 되기를......^^

블루님, 낮에 술취해 버스 탔다가 지갑 잃어버린 제 꿈이 더 낫네요.=3=3

플레져 2006-04-1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번 버스는 우리 마을도 지나갔는데.
8번 버스 타고 홍은동 사는 이모댁에 자주 놀러다녔는데.
정릉에서 8번 버스 타고 홍은동 도착전까지는 오밀조밀한 오솔길을 지나고
멀리에는 자그마한 암자들도 많이 보였는데...
아~ 로드무비님은 합정동에 이어 홍은동, 북아현동! 서울에 흔적 많이 남겨두셨네요! 저는 고작... 흑.

로드무비 2006-04-12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님이야말로 예쁜 추억을 서울 곳곳에 묻어두셨으면서.
정릉 저도 좋아요.
김지원 채원 자매 혹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지 않으셨나요?^^

플레져 2006-04-12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조신한 소녀였던지라 (실은 동화만 읽던 철딱서니였던 지라 소설가 이름을 몰랐던...흑) 고개를 들고 다니질 못하여서........ 캬캬~ =3=3

로드무비 2006-04-12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자기 입으로 조신하대.=3=3
뭐 내 입으로 '호감 가는 아가씨'라고 뻥을 쳤으니
저도 할 말도 없군요.^^

2006-04-12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6-04-1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철 안에서 술취한 여성들을 보고 잠시 가졌던 뜨악한 생각에 대한 찜찜함 때문에, 로드무비 님이 꿈속에서 만취한 거 아닐까요(대낮부터!).
참. 고백하자면, 저도 합정동과 북아현동에 추억이 있어요.
저는 만난 일도 없는 그 시절의 로드무비 님이 그리워요.

이리스 2006-04-1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거, 거,. 거기가 맞을거에요! *^^*
저는 한때 비디오 가게 점원이기도 했어요. ㅋㅋㅋ

로드무비 2006-04-13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멋져요!^^

namu님, 제가 너무 자신을 미화한 것 같기도 하고.ㅎㅎ
'뜨악한 생각', 바로 그겁니다요.
님도 알고보면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세례를 좀 받으신 듯.^^
(전 퍼펙트하죠. 초기의 작품들!)

중앙역 님, 메모 보고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모저모 축하드려요.^^*

플라시보 2006-04-13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꼭 담백한 단편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흐흐^^

로드무비 2006-04-14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 담백한 단편영화라니 제가 꼭 임순례 감독이 된 것 같은 기분이.ㅎㅎ
생각해 보니 '雨中산책' 2편으로 괜찮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