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받자마자 단숨에 읽으셨다는 분이 이 책을 주문해 주셨다.
나 또한 기대에 부응하고자  읽던 책을 덮어두고 바로  책을 읽어치웠다.
그리고, 그분의 방에 가서 이런 댓글을 남겼다.

--이런 종류의 공포도 있군요.

지난주 친구가 초등 2학년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놀러왔다.
녀석은 지난해 책을 1,100권이나 읽고 그 기록을 공책에 남겨 나의 감탄을 자아냈는데,
사실 나는 그 아이를 보면  갓 태어나 배냇옷을 입고 면이불에 둘둘 싸여 누워 있던 아랫목이 생각난다.
내 아이가 꿈 속에 등장한 것도 몇 년 안 되었으니, 지금도 가끔 아이가 "엄마!"하고 부르면
나는 깜짝깜짝 놀란다.

'너가 누군데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세상에 없던 것이 생겨나고, 버젓이 존재하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감쪽같이 없어지는 것,
사람의 탄생과 죽음은 영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신비이면서 또 공포이고......
모처럼 집에 놀러온 친구와 점심을 먹으며, 어느 새 다 큰 아이들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탄식했다.
아이들은 쑥쑥 자라고, 우리는 늙는구나!

'임신 캘린더'는 한 여동생이 기록한 언니의 임신에서 출산까지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자매 좀 이상하다.
새로운 생명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기쁨이나 설렘은 눈곱만큼도 없고, 초음파사진으로 처음 보는
아기에 대해서도 입덧의 근원으로만 생각한다. 임신한 아내를 무지 챙겨주는 듯한 남편도
사실은 아이에 대한 기대 따위는 없어 보인다.
극심한 입덧도 임신에 대한 공포와  연결된 것으로 보일 정도.

무서운 장면이 나와서 무서운 게 아니다.
그 이상한 무관심과 방기, 체념처럼 무서운 게 세상에 또 있을까!

개인적으로 제일 오싹했던 작품은 두 번째에 실린 '기숙사'.
외국에 미리 나가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은 아랑곳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촌동생을
자신이 오래 전 생활했던 기숙사에 소개한 뒤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무표정한 여인의 이야기다.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작품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
그 제목만 듣고도 뭔가 쿵, 마음속에 공명되는 부분이 없는지?
나는 이 쓸쓸한 소설에서 특히 다음 대목이 인상깊었다.

--나는 수영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최대한 노력했어요. 아무도 내게 신경쓰지 않기를 바랐죠.
그런 한결같은 노력도 내가 수영장에서 배운 것 중에 하나죠.(167쪽)

나에게는 이런 말을 무심하게 하는 사람의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익숙하고 무섭다.

오가와 요코는 책날개에 실린 차분하고 냉담한 표정의 사진으로 내 가슴을 철렁하게 하더니
작가 후기에서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로 아주 쐐기를 박았다.

--양파가 싱크대 수납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고양이 시체로 변화하는 과정에
소설의 진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181쪽)

나도 모르는 새 어느 서랍이나 바구니 밑에서 양파가 썩어 뭉개져 있는 걸 본 사람이라면
작가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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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2-19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오싹해요~덜덜

Mephistopheles 2006-02-1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건 무관심이라고 하더군요...^^
왠지 책보다 로드무비님의 리뷰가 더 오싹할꺼라는 생각은 왜일까요...

플레져 2006-02-1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가와 요코의 저 말은, 다음날 지인들에게 퍼트렸어요.
암기력이 없는 제가 저 두줄은 너무나 잘 외운답니다. ㅎㅎ
기숙사, 저도 제일 오싹했어요.
참, 박사를 사랑한 수식, 읽고 있는 중이랍니다~ ^^
오가와 요코 소설 섭렵...? ㅎㅎㅎ

sudan 2006-02-19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소설이나 추리소설 장르에 있겠지 했는데, 뜻밖에도 도서 > 문학 > 문학상 수상작 > 해외 문학상 > 아쿠타가와상 카테고리에 있네요?

숨은아이 2006-02-19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잘 모르겠는걸, 하고 생각하며 리뷰를 읽다가, 마지막에 "나도 모르는 새 어느 서랍이나 바구니 밑에서 양파가 썩어 뭉개져 있는 걸 본 사람이라면" 하신 부분에서 아차 싶었어요. 저의 집 냉장고나 베란다에서 양파는 아니고 고추나 파가 말라 비틀어져 있곤 하죠. 아아.

서연사랑 2006-02-1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저께 서연이가 겨울성경학교에 간 틈을 타서 이 책을 신나게 읽었더랬죠.
책은 금방 읽혔는 데 계속 소설 속의 장면들이 머리 속에 그려져요. 음침하고 건조하게,......

urblue 2006-02-2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날 냉장고에서 야채가 썩어 나가고 있지만...

로드무비 2006-02-20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특히 양파가 썩은 건 처참해요. 모양도 냄새도......

서연사랑님, 겨울성경학교도 있나요?
정말 이 책 단숨에 읽히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스산함이 밀려오는 작품.^^;

숨은아이님, 양파는 한편 상징적인 거고 우리가 모르는 새 놓치고 있는 것들,
뭐 그런 걸 말하는 듯해요.

수단님, 본격적인 공포소설은 아니에요.
그런데 워낙 작품이 으스스하고 스산하다보니
감상이 그쪽으로 치중되는 듯.^^


로드무비 2006-02-2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도 박사가 사랑한 수식 한달 전쯤 샀어요.
어느 님의 리뷰 보고 미친듯이 주문했는데 아직 손도 안 대고 있네요.^^;;

메피스토님, 그렇죠.
미움받는 여자보다 슬픈 게 잊혀진 여자라 했던가?
로랑생?
뭐 그런 말도 있었지요.^^

mong님, 오싹하기보다는 쓸쓸하고 말할 수 없이
스산한 작품들입니다.^^

검둥개 2006-02-2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로드무비님은 쿨한 인간이 되시기는 어렵겠어요. ㅎㅎ
하긴 다시 보니 쿨하기보다는 좀 무시무시한 인간군상인 것 같기도 한데, 왜 이 두가지가 헷갈리는 걸까요. 무서운 세상여요...

2006-02-22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2-22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6-02-23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방치된 양파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요.

로드무비 2006-02-2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으으 방치된 양파, 저도요.^^


검둥개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쿠울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