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과거가 없는 남자>
워낙 불경기다 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임금 체불 소식이 유난히 귀에 자주 들어온다.
정규직, 비정규직, 일용노무직... 요즘은 이렇게 노동자의 계급도 3개로 나뉜다고
어제 아침 모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한 패널이 말했다.
일을 시켜먹었으면 약속한 돈을 줘야지, 자기는 고대광실에 호의호식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며 애간장만 태우다가 결국 그 알량한 임금을 떼먹는 악덕 사장들이 많다.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에는 여러 가지 기막힌 사정으로 경영하던 건설회사가 망하고
뿔뿔이 흩어진 직원들에게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주기 위해서 은행강도가 되는
늙은 사장이 나온다.
아리랑치기에게 호되게 당하여 자신의 과거를 몽땅 잃어버린 주인공이 통장이라도 어떻게
만들 수 없을까 하여 은행에 갔다가 강도로 돌변한 이 노인과 마주치는데......
그렇게 은행에서 강탈한 돈을 들고 주인공을 찾아와 일을 의뢰하는데 그 일이란 게
새로운 직장으로 뿔뿔이 흩어진 직원들을 한 명씩 만나 밀린 임금을 주고 오라는 것.
스틸컷 오른쪽의 돈봉투를 수북히 들고 있는 노인이 바로 그이다.
주인공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스런 모습으로 여기저기 새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만나 무사히 돈봉투를 전달한다.
사장님은 그 후 권총으로 목숨을 스스로 끊는데......진작에 죽고 싶었는데 직원들에게 주지 못한
밀린 임금 때문에 차마 죽지도 못했던 것이다.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에는 어딘가 한 군데씩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의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과 연기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가슴 한쪽에 묵직한 동통이 느껴진다.
방송에서 임금 체불 소식이 들릴라치면 어김없이 이 영화 속 사장님이 떠오른다.
그 가슴 철렁하던 총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