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만땅 페이펍니다. 이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않으시는 게......
민병국 감독의 첫 영화 <가능한 변화들>을 비디오로 보았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이 영화는 우선 제목으로 나의 시선을 끌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뭔가 변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만 할 뿐 나날이 인간성이며 뭐며 나빠지기만 아는 나로서는 이끌릴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더구나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 연출부 일을 했단다.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한편 경멸하면서도 한편 무지 좋아한다. 인간성 나쁜 거는 아는데 나도 모르게 끌리는 남자 내치지 못하는 심리랄까? 몇 년 전 홍상수 감독의 제자였다는 말만 듣고 무조건 보러 갔던 박경희 감독, 추상미 주연의 <미소>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영화가 된 것처럼 어젯밤 나는 기대를 잔뜩 하고 이 영화를 보았다.
책을 읽거나 책상 앞에 앉은 꼴을 한번도 볼 수 없는 전업작가 문호(정찬)는 몇 년 전 갑자기 쓰러져 다리를 심하게 절게 된 종규(김유석)와 아주 오래 된 둘도 없는 친구이다. 문호는 얌전한 아내와 일고여덟 살의 딸아이가 있지만 총각 행세를 예사로 하고 다니고, 종규도 무슨 연구소 말석 자리라도 제 몫의 책상이 있고 미스 김이라는 말 잘 듣는 애인도 확보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럭저럭 모양을 갖춰 사는 두 사내, 그런데 뭐가 문제지?
제주도의 넓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벼랑 위에 둘이 앉아 담배 피는 주인공들의 모습으로 기세좋게 시작한 이 영화는 누가 더 희망이 없고 누가 더 야비한 것인지 내기라도 하듯 두 남자의 엽색행각을 보여준다. 심지어 둘은 라면집에서 한 테이블에 동석한 여자랑 여관에 들어가 2 대 1의 섹스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해치운다. 친구의 요구를 거절하고 여자가 옷을 입고 나가려 하자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갈기는 문호.
문호가 집에서 아내나 딸을 얼마나 짜증스럽고 재미없는 표정으로 대하는지, 싼 이탈리아 식당에 모처럼 외식을 하러 나가기 전 마루에 벌렁 드러누워 이빨 좀 닦아달라는 어린 딸아이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은 가관이다. 아이는 아빠의 거절에도 일곱 번인가 여덟 번쯤 같은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식당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잠시 궁둥이를 붙인 대기석에서는 아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계속 심하게 떤다. 그는 그런 딸이 걱정도 안되는가, 모처럼 가족과 외식하러 나왔으면서도 잠시를 못 참고 밖으로 나와 채팅으로 알게 돼 작업중인 아가씨와 약속을 잡는다.
이제보니 식당 문을 빼곰히 열고 아빠가 뭐하나 내다보는 딸래미가 마이 도러를 좀 닮은 것 같기도.
밤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큰 우산을 들고나온 문호. 결국 채팅녀와 만나 동침하는 데 성공하는데 임신을 걱정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임신해버려, 임신해버리라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고 다니는 인간의 저 쓸쓸한 얼굴을 좀 보라지.
그 볼품없는 우산(도대체 무얼 상징하는 것일까?)을 들고 다음날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개기던 그, 비가 무진장 쏟아지는 동네 골목길에서 우산을 펼치지 않고 땅바닥에 패대기쳐 작살을 낸다. 나름대로는 절망의 표현이리라! 엉망으로 젖어 돌아오는 남편을 집 앞에서 기다리고 섰는 아내. 누군가 "이 영화 속의 남자들은 홍상수의 인물이라기엔 조금 더 거칠고 조금 덜 귀엽다"고 말했다는데 절묘한 표현이다. 그러고보니 <강원도의 힘>에서의 장면과 놀라울 정도로 겹친다. 집에서 그렇게 따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밖으로 나와 딴 여자랑 논다. 거기다 우산까지 손에 들었으니......(대단한 발견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의 존재감은 이상하게 희미하다. 버젓한 직장에 다니는 채팅녀 윤정(윤지혜)도, 종규의 첫사랑인 대학교수 수현(신소미)도, 종규와 함께 산부인과에 가서 아이를 떼고 나와 삼계탕을 먹으며 식당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 웃는 미스 김(옥지영-'고양이를 부탁해'의 지영이었던)도, 유령 같다.
첫사랑과의 동침을 위해서는 무리해서 최고급호텔 스위트룸을 빌리고, 자신의 아이를 떼고 나온 여자가 한강이 보이는 방에서 아침을 맞고 싶다고 말하자 허름한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 종규의 파렴치함. 거기다 그 새벽 곤히 잠든 애인을 기어코 깨우고 자신의 절망한 낯짝을 들이대는 무신경함이라니!
이 영화는 스토리라 할 게 별로 없다. 뭔가 변해야 하지만 변할 가능성이 1프로도 안 보이는 두 친구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한숨만 나온다. 그들의 후줄근하고 더티한 일상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두 남자의 열연 탓인가 내게는 꽤 괜찮은 영화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