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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음 / 이레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강화도에서 혼자 살고 있는 집엔 빨간 양철지붕으로 된 안채와 파란 양철지붕을 인 행랑채가 있고 흰 슬레이트를 얹은 화장실이 있다. 나는 이를 자금성, 청와대, 백악관이라고 부른다.(128쪽)
보일러 기름이 떨어지면 뒷산에 올라 직접 나무를 해다가 때고, 마니산에서 두릅을 따다 뒤꼍의 부추를 뜯어 넣어 비빔밥을 해먹고 혼자 사는 시인이 있다. 아니 참, 속이 허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면 날계란도 하나 톡 깨어 먹는다지. 동리 사람이랑 바닷가에 나가 그물을 던져 숭어를 잡기도 하고.
동네의 다른 집들엔 제비가 집을 지었는데 시인의 집엔 제비가 깃들지 않아 친하게 지내는 후배 여성 시인에게 하루 놀러오라고 전화를 거는 마흔 중반의 시인. 제비가 여성 호르몬 냄새를 맡고 혹시라도 찾아오지 않을까 하여......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을 할퀴고 지나가도 몸을 다 내어주면서 뒤통수를 긁는 사람'이라고 오래 전 김훈은 시인 함민복을 묘사한 적이 있다. 가난과 불우는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함민복은 홀로 사는 늙은 어머니를 고향 이모 집 근처 경로당에 딸린 방에 세들어 살게 하면서도 "어머니 이층집에도 살아보시네요."하고 짐짓 너스레를 떤다. 어머니가 잠시 신세지는 경로당에 딸린 방이 어떤가 구경하러 내려왔다가 고향 사람들 보기 부끄러워 어두워질 때까지 서점에 숨어 있었으면서도...
1990년인가 91년, 그의 원고를 받기 위해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을 때 함민복 시인은 버팀목이라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다. 우울 씨가 다니는 출판사 이름이 버팀목이어서 뭔지 안심이 되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함민복과 유하의 이름은 항상 붙어다녔다. 그런데 당시 내가 헷갈렸던 시인은 진이정과 함민복. 왜 그랬을까? 가난 때문에? 병 때문에?
유하 시인이 동숭동의 무슨 화랑에서 자신이 찍은 '구보 씨의 1일'이라는 단편영화를 처음으로 상영했을 때 나는 친구와 그곳을 찾았다. 영화는 하나도 좋은 줄 모르겠고 아무튼 영화가 끝나고 나오니 계단 옆에 유하 시인과 진이정 시인이 함께 서 있었다. 진이정 시인은 아주 시니컬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나는 그들을 지나치며 함민복 시인은 어디 있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함민복 시인은 금호동 친구의 집에 꽤 오래 얹혀살았다. 그는 나도 두 다리 세 다리 건너 아는 이였는데 어느 날인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데 골목 모퉁이에 계란판이 켜켜이 쌓인 자전거가 있어 취한 김에 계란 한 판을 훔쳐가지고 춤을 추듯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아마 그 계란은 함민복 시인의 입에도 들어갔으리라.
어느 날 시인은 돼지 새끼를 직접 받다가 지인의 전화를 받는다. "예, 저는 지금 돼지 새끼를 받고 있거든요. 돼지 자궁 속에 제 손이 들어가 있어요."
개도 키우고 돼지도 기르고 안해본 일이 없는 시인의 퉁퉁하고 넙적한 손이 나는 참 좋았다. 자신이 지하셋방에 사는 게 뭐 그리 큰 수치라고 걸핏하면 지하셋방으로 자신의 가난을 표현하지 못해 안달인 또래 시인들의 희고 긴 손보다 100배나......
그는 시 하나 써주면 국밥 한 그릇 값의 원고료를 받고 자신의 시가 과연 그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의 속을 덥혀줄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1996년, 소설을 써주기로 하고 어느 출판사에서 이백만 원을 당겨 받은 시인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그런 거금을 만져본다고 했다. 세상에! 그 돈은 어머니 방 얻는 데 홀랑 들어갔다.
가난과 불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 해맑고 다정하고 생각이 깊은 시인이다. 그것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는데?
--건축가 이일훈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강의 중 슬라이드를 보는 시간이 있었다. 고건축물에서 현대 최첨단 건축물까지 여러 건축물을 설명하는 도중 느닷없이 한적한 곳에 덩그렇게 서 있는 시골 방앗간 풍경이 떴다. 이 선생님은 잠깐 사이를 두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방앗간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났습니다. 완벽한 건축물을 만났기 때문이죠. 장식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양철지붕만 올려놓았지만, 여기 어디 버릴 게 있습니까, 부족한 게 있습니까?" 가슴이 찡했다. 나도 어느 골목길에선가 그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152쪽)
(나도 이 대목을 읽고 가슴이 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