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아이들 - 할인행사
짐 셰리단 감독, 사만다 모튼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얼얼한 얼굴의 부부가 뒷좌석에 아이 둘을 싣고 캐나다 국경을 넘고 있다. 그 중 언니로 보이는 열 살 언저리의 소녀는 프랭키라는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세 가지 소원 중 하나를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무사히 미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이 영화는 어린 아들(프랭키)그리고 동생의 사고사 이후 도망치듯 아일랜드를 떠나 맨해튼이라는 도시의 빈민아파트에 새로이 둥지를 튼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아빠 조니는 연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디션장을 전전하고 엄마 새라는 집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 취직한다. 오디션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자 조니는 택시운전사로 일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놈의 도시에는 자칭 예술가 아닌 놈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조니 자신도 재능은 없는데 자신은 예술을 해야 한다고 턱없이 믿고 있는 그런 인물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은 도시의 폭염을 견디지 못하여 얼마 안되는 저금을 은행에서 찾아 냉방 잘 되는 극장으로 피신한 가족에게 그날 오후 일어난 일이다. 그들이 관람한 영화는 E.T였고 영화를 보고 나온 이 깜찍한 자매의 시선을 붙잡은 건 1달러를 내고 구멍에 공을 던져 맞추면 준다는 E.T 인형. 조니는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했다가 1달러가 2달러로, 2달러가 4달러로, 4달러가 8달러로 자꾸 판돈이 올라가는 바람에 은행에서 찾은 100달러를 다 탕진하고, 마침 새라가 가지고 있는 아파트 월세 봉투까지  손을 대는데 아이들의 눈과 심정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큰 북이 둥둥 울리는 것 같았다. 소녀는 바로 그때 마음속으로 두 번째 소원을 말한다.

이 가족이 사는 아파트의 을씨년스런 풍경도 골때린다. 약물중독자 청년,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도 견딜 수 없는지 낡은 아파트가 떠나가라 시도 때도 없이 비명을 질러대는 아래층 무명의 흑인 화가 마테오는 그 누구도 자신의 방에 들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할로윈 데이, 미국에 왔으니 사탕을 꼭 얻어 먹어야겠다고 야무지게 결심한 조니의 어린 두 딸이 지치지도 않고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문을 여는데 새라가 직접 만들어준 천사 복장의 아리엘과 가을의 요정 복장의 언니, 이 깜찍한 자매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서있었던 것.  이상하게 이 흑인남자를 보고 있자니 영화 <파니 핑크>의 아파트와 복도와 그 이웃집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마법사같고, 그의 방은 이상하게 마법의 공간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날  극장에서 돌아온 이 부부, 아이들을 아이스크림 가게로 내려보내고   짐작하건대 아이의 사고 이후 처음으로 동침을 하는데 어쩌자고 그 밤 덜컥 아이가 들어선다. 간신히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이 가족 도대체 앞으로 어쩌려고.

영화의 도입부, 맨해튼에서의 생활이 아직 익숙하기 전 더위를 견디다 견디다 못해 조니는 아이들을 위해 중고 에어컨을 하나 사는데 그 무거운 걸 이고 지고 끌고 온다. 작열하는 도로 위를 비틀거리며 걷는 땀이 번지는 조니의 등짝 티셔츠의 무늬를 보고 있으면 얼마나 가슴이 답답해지는지. '아아, 맞아. 사는 건 지금 조니의  등짝에 점점 검게 크게 물들어가는 땀의 무늬, 시금털털한 땀냄새 같은 거야!' 하는 자각.

그런데 이 가족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건 가난이 아니었던 것. 우리는 아무것도 미리 짐작하고 재단해서는 안된다. 아파트 주민들에게서 변태라고 손가락질 받던 마태오, 할로윈데이에 사탕이 없어서 동전을 모아놓은 저금통을 아이들 손에 쥐어 보냈던 마태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따뜻한 남자였다. 그는 자신의 상처로 문을 닫아 걸었고 아무도 그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E.T 인형 하나를 사주기 위해 전재산을 걸던 조니와 새라 부부에게서 무모함이 아니라 희망을 본다. 사랑은 전부를 거는 것이다. '접근금지'라고 문짝에 써갈기고 가끔 미친듯이 고함을 지르며 자신을 유폐하던 마태오가 어느 할로윈데이에  자신을 활짝 열어제꼈던 것은 바로 자신이 마음속으로 기다리던 천사를 본 때문이 아닌지. 우리는 누군가의 문을 열심히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천사가 될 수 있다.

<나의 왼발>과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연출했던 짐 셰리단은 '이 영화를 프랭키 셰리단에게 바칩니다' 라고 영화의 마지막에 밝혔다. 그에게는 또 무슨 기막힌 가족사가 있는 것일까? 색깔과 분위기가 많이 다른데도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도리스 되리 감독의 <파니 핑크>를 언뜻언뜻 떠올렸다. 비오는 날 오랜만에 엄마아빠가 정사를 치르는 동안 아이스크림 가게로 쫓겨나 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천사같은 두 소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즐겁고 흡족한 영화였다.

소녀의  마지막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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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03-1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울컥했어요. 아, 뭐예요, 미워!

로드무비 2005-03-1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왜 울컥하셨나요?^^

날개 2005-03-1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소원이 뭐였어요? +.+ 글구, ET인형은 결국 딴거예요?

urblue 2005-03-18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쭉 읽으면서 이 영화 무지 보고싶어졌는데, 감독이름 보고 좀 멈칫하네요.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제가 딱 싫어하는 스타일의 영화라... 어쨌거나 추천!

로드무비 2005-03-1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스포일러를 피하느라 중요한 줄거리들을 비껴갔어요.
이 영화 꼭 보세요.^^

로드무비 2005-03-1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저도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별로였어요.
그런데 <나의 왼발>은 괜찮지 않았나요?^^

michelle 2005-03-1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 영화 정말 보고 싶어졌어요.

하루(春) 2005-03-1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아버지의 이름으로 감독.. 역시 기억력이 죽지 않았군요. ^^;;; 이 DVD 사셨나요?

하루(春) 2005-03-1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그 남자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는 다 보기로 맘 먹은 적이 있었죠. 하지만 아직도 '라스트 모히컨'은 못 보고 있네요. 줄거리를 다 쓰신 게 아니라면, 다시 읽어봐야지.

로드무비 2005-03-18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다니엘 데이 루이스 말씀하시는 거죠?
사실 '나의 왼발'도 그의 연기 덕분에 살아난 영화였어요.
그리고 이 작품 비디오로 가지고 있습니다.^^
새벽별님, 예. 뭔지 아주 흡족하지는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설명은 못하겠지만......그래도 좋은 영화였어요.^^
michelle님, 그게 제가 줄거리 요약을 좀 잘해요.ㅎㅎ
이런 거 저런 거 떠나서 저는 무척 마음에 들었답니다.
두 소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으니......^^

플레져 2005-03-1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거리 요약 잘 하셔서 부러워요. 저두 보고 싶어졌어요. 추천때려요.

2005-03-19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3-19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줄거리 요약 같은 것 대신 님은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글쓰기를 하시잖습네까.
아무튼 추천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속삭이신 님, 고마워요. 제가 잠시 착각했네요.^^

2005-03-21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31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6-07-3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거리 보는게 아니라 단편소설 읽는 것 같아요. 무비님표 소설은 언제 나와요?

로드무비 2006-07-3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지금 보니 스포일러가 심하군요.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있는데 보고 싶으시다면 빌려드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