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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장난 - 소료 후유미 걸작선 3
소료 후유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일생을 남편에게 맨얼굴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고 죽은 여성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할머니가 되어 죽을 때까지 남편에게 자신의 화장 안한 맨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맨얼굴하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연애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 끝나고 나면 제일 부끄러웠던 것이 그 사람에게 털어놓았던 나의 진심들이었다. 김현식의 노래 가사대로 '내 마음 보여줘본 그때 그 사람'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제일 가관이었던 건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애정만세>를 같이 보았던 남자를 단지 그 영화를 같이 보았고 그가 나보다 더 많이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날 밤 술을 마시며 자신을 완전히 발가벗겨버렸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그것도 어쩌다 우연히 접선이 되어 영화 한 편을 같이 봤을 뿐인 남자에게 자신의 맨얼굴(단순히 화장의 문제가 아니라)을 보였다는 건 치명적인 실수에 속한다. 그런데 때로는 그 치명적인 실수가 후련하게 생각되어질 때가 있다. 뭔가 꼭 밟아야 할 인생의 단계를 제대로 밟고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뭔가를 내주지 않고 날로 먹을 수 있는 건 인생에서 그다지 많지 않다.
오늘 아침 후유미 소료의 <태양의 장난>을 읽었다. 네 개의 단편이 실렸는데 단편 한 개를 읽을 때마다 '어, 이 사람의 책을 왜 이제야 읽는 거지?' 하며 책장을 일단 덮고 표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책장을 여는 짓을 되풀이했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는데 눈앞에서 구르며 콘크리트 계단에 머리를 부딪히고 넘어져 꼼짝않는 아가씨, 약속장소에 애인이 나타나지 않아 전화를 걸었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다른 여자의 목소리, 길을 걷는데 바로 눈앞 고층빌딩에서 퍽 하고 떨어져 죽는 남자. 매일 자신의 손목을 죽지 않을 정도로 긋는 주인공 소녀의 클라스메이트.('태양의 장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딛는 이 세상은 지뢰밭 같아서 무엇이 매복해 있다가 짠~하고 나타나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예쁘고 머리 좋고 용감하고 정의감까지 두루두루 갖춘 친구를 바라보는 시선은 선망에 가까울까 질투에 가까운 걸까?('사람의 유통기한')
사람들 눈에는 유능하고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완벽에 가까운 한 여성의 맨얼굴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도 알고봤더니.......('기묘한 유전자')
'무지개빛 넙치'를 마지막으로 읽으며 할 말을 잊었다. 나나난 키리코의 <호박과 마요네즈>도 생각나고.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고 붙잡고 있는 것도 사실 실상을 파고들면 대부분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버리지 않을까? 그렇다고 무서워서 아무것도 안하는 건 더 바보같고... 그러니 되도록이면 자신이 좋아하는 색 물감으로 인생이라는 넙치를 그려갈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