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이의 체온 - 뷰티플 라이프 스토리 1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어제 저녁 아이 둘을 데리고 동네 병원에 갔다가 차례를 기다려 진료를 하고 빵집과 슈퍼에 들러 집에 돌아오는데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세 살짜리 녀석이 유모차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자기가 유모차에 달랑 올라탄다. 빵봉지랑 시장바구니, 싸고 맛있게 보여 오는 길에 산 귤과 사과 보따리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유모차를 밀며 어둑어둑한 언덕길을 낑낑거리며 올라왔다. 조카녀석은 30미터쯤 떨어져 유모차 뒤를 쭐레쭐레 따라오고 있다. "달이야, 달!"하고 하늘을 가리키며 감탄도 해가면서 아주 신이 났다. 어느새 보름달이 되어버렸지?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은 언덕 꼭대기 6단지 앞에 어물전이 펼쳐졌다.
"아니 저 아저씨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데다 좌판을 펼치면 어떡해! 누가 알고 오겠냐고......"
딸아이에게 녀석과 유모차를 부탁하고 나는 길을 건너가 고등어 세 마리와 굴을 한 근 샀다. 굴은 떨이여서 저울에 달아 보니 두 근 가까이 되었다. 아저씨가 고등어를 손질할 동안 아이들이 있는 길 맞은편을 보니 유모차가 바닥에 자빠져 있고 딸아이는 그걸 일으켜 세우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시장바구니며 등 주렁주렁 매달린 짐의 무게 때문이었다. 나는 급히 계산을 치르고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집에 돌아와 봉지를 끌렀더니 고등어는 울퉁불퉁 모양 없이 잘리고 잘게 토막쳐져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초보자의 솜씨였다. 세 마리를 골랐는데 네 마리를 주고 아무리 떨이라지만 한 근 가까운 굴을 서비스로 넣어주고 그리고 어쩌자고 그 아저씨는 바람 씽씽 부는 언덕배기에 자리를 깔았는지......앞으로 생선은 그 아저씨에게 사서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고등어와 굴은 아주 싱싱해서 굴전으로 부쳐먹어도 맛있고 생으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었다.
리뷰 첫머리 치고 사설이 너무 길었다. 자기 전 <서양골동양과자점>의 작가 요시나가 후미의 <아이의 체온>을 읽었다. 아이의 체온, 홈 파티, 내가 본 풍경, 춤추는 왕자님, 흔히 있는 그런 날, 가끔은 이런 날이라는 제목의 여섯 개의 단편집이다.
아내와 사별한 38세의 남자가 모범생인 줄만 알았던 중1 아들 코이치의 부탁으로 산부인과에 간다. 아들의 여자친구를 데리고 임신 여부를 알기 위해. 다행히 임신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아들의 여자친구와 함께 오무라이스를 사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산부인과 대기실에서의 그의 독백이 인상적이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스럽긴 하지만 세상물정을 모르고 비밀이 많지만 무책임하다. ...뭐야, 우리 어렸을 때랑 똑같잖아?'(아이의 체온)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 맞는 봄, 어린 아들 코이치를 데리고 장인장모를 만나러 간 그. 장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홈파티에 사람들을 초대한 장인이 곤경에 처한 것을 모른척할 수 없다. 장인과 함께 냉장고를 뒤져 밤새 이런저런 요리를 만드는데......(홈 파티)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사는 발레 신동 소년 와다치는 코이치의 친구. 엄마가 붙잡는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던 자신의 행동이 상처로 남아 있는데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하는 동급생 코이치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어느 날 국제적인 규모의 콩쿠르 참여를 앞두고 어느 여성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그 기자 이렇게 묻는다. "와다치군에게 있어 발레란 무엇인가요?" 이 삐딱한 소년의 대답. "당신, 무능한 기자로군요. 그 질문을 했던 사람 중 쓸만한 인간은 한 명도 없었죠." (춤추는 왕자님)
<아이의 체온>에 실린 여섯 개의 단편들은 그럴 수 없이 담담하게 사람들의 심리와 일상을 스케치하고 있다. 바로 어제 저녁 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를 돌며 보았던 사람들과, 언덕배기에서 짐을 내팽개치고 자빠졌던 유모차와, 이제 막 생선을 팔기 시작하여 생선 다루는 솜씨가 형편없었던 선량한 얼굴의 그 아저씨를 웬지 떠올리게 하는 그저그런 이야기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이 후회했다. 처음부터 그냥 페이퍼로 쓸걸. 그런데 리뷰에서 페이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 나는 염치좋게 이 글을 리뷰로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