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등 일련의 베스트셀러를 내어 주목을 끈 바 있는 오리 선생 한호림의 세계 뒷골목 간판 기행문이다. 영어로는 사인(Sign). 간판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사인'이란 우리나라의 간판처럼 그 건물이나 집의 이마빡에 내건 옥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그 집을 이미지나 어떤 문자로 상징하는 것이다. 그곳이 학교인지 관공서인지, 또 식당인지 여관인지, 또 식당 중에서도 치킨집인지 국수집인지......아주 세부적으로, 혹은 뭉뚱거려서.
내가 이 리뷰의 제목을 '선술집, 실비집, 여인숙' 등의 철지난 단어들을 끄집어내어 꽤나 서정적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일단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는 것이다. 그처럼 '사인'은 그야말로 어떤 집(숍)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이러한 맞춤한 곳이 있으니 얼른 오시오!" 하는......
저자 한호림은 지난 20여 년 동안 전세계 뒷골목을 돌며 그의 눈길을 끄는 사인들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눌러 왔다. 시각 디자인 오브제를 찾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마침내 2년 전 그가 집대성하여 두 권으로 낸 이 책에는 미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거나 이름만 대면 사람들이 아아, 하고 넘어가는 유명한 곳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뒷골목에서 오늘도 손님을 기다리며 불을 밝히고 있는 희미한 사인들이 저마다의 독창성을 뽐내며 모여 있다.
들머리를 장식한 각종 모뉴먼트, 멋드러진 글씨의 채널 레터, 엠블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장(紋章), 올빼미나 고양이 등의 조그만 청동 주조물, 벽에 새겨진 부조, 벽화, 공룡 등 거대한 동물 모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아이 캐처(eye-catcher), 로고, 옥외의 메뉴 보드 등 사인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하버드 대학교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뒤쪽의 샛문에 '진리는 하버드 유니버스티의 상징'이라는 조그만 부조 하나밖에 학교를 알리고 자랑하는 그 무엇도 없다고 한다. 이런 점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몇 개 안되는 미덕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해적 캐릭터가 유머러스하게 그려진 해적학교가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
벽화가 정말 예쁜 세계의 유치원과 탁아소들, 도서관과 출판사와 서점들도 빠트릴 수 없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올드타운의 고색창연함. 이곳 광장 가게들의 특징은 가게 이름이나 업종을 쓰지 않고 건물의 장식을 겸한 조그만 아이 캐처만 설치했다는 것. 가령 정육점에는 쇠머리에 쌍도끼 심벌만 걸려 있을 뿐이다. 폴란드는 특히 놋쇠 빛깔의 '모루(anvil)' 하나만 문 위쪽에 달랑 걸어놓고 '영업중'이라는 의미로 약한 촉광의 등불을 켜놓는다니 그 골목과 거리의 서정이 눈에 선연히 잡히는 듯하다.(우리 나라 도심의 건물 외벽을 도배질하다시피 한 어지러운 간판들과 현수막과 정말 비교된다.)
미국의 벼락부자들과 세계적인 스타들이 모여 사는 동네 비벌리 힐스, 북유럽의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예쁜 우편함, 동물병원, 숙박업소....저자는 참으로 온 세계 구석구석을 발로 누빈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매사추세츠에 있다는 '옛 항구여관(The Old Harbor Inn)'은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에 나온 그런 허름한 여인숙이 아닐까. 언제 기회가 되면 그 집에서 며칠 묵었으면 좋겠다. '강이 보이는 여인숙(Riverview Inn)'도 "여섯 시에는 잠잘 곳을 정하세요' 라는 뜻이라는 'Motel 6'도 심플해서 너무 좋다.
페루 안데스 깊은 산속 조그만 호스텔의 외벽에 써놓은 호스텔의 이름(Y'LLARY HOSTAL)은 예술이고, 프랑스 마르세유의 한 튀니지 음식 전문점 벽 색깔과 레터링은 정말 환상적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노동자들을 겨냥해 생긴 실비집들. 토론토의 한 실비집 이름은 '간단하게 때울 분 오십시오(Hello Toast Restaurant)'라니 구미가 당긴다.
거리의 간이매점인 키오스크, 세계 곳곳의 작은 옷집들, 거기다 움직이는 빌보드라 할 수 있는 트럭, 트레일러, 미니밴의 화려하고 개성적인 외양들......
이 책을 읽고 나자 나는 갑자기 카메라를 하나 들고 우리 나라 소읍이나 산간, 혹은 바닷가 마을 가게들을 한번 샅샅이 훑어보고 싶어졌다. 감자볶음 사진 하나 못 올리는 형편에 정말 야무지고 얼토당토않은 꿈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은 이 책의 본문 중 한 페이지. 집집마다 있는 북유럽의 예쁜 우체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