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 - 레제르 만화 컬렉션
장 마르크 레제르 그림 / 열린책들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세상의 아빠들은 왜 그렇게 술을 마실까?  '딱 한번만 만나고 싶다'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가족이 해체되고 부모와 헤어져 혼자 지내다 엄마를 찾는 이들의 경우 열 명 중 여덟은 그 원인이 아빠의 술버릇 때문인 걸 알 수 있다. 허구헌날 마셔대는 술, 그로 인한 찢어지는 가난과 불화, 병...

열린책들에서 나온 장 마르크 레제르의 이 만화 속의 아빠는 아직 어린 아들을 가게에 보내 포도주를 매일 다섯 병씩 사오게 한다. 술꾼이라면 적어도 하루에 다섯 병은 마셔줘야 한다나? 주인공 소년은 그래도 아빠가 침대 옆 탁자 위에 가족 사진을 늘어놓은 걸 보고 엄마와 자신과 어린 동생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구차하지만 애틋한 확신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별다른 신념이나 희망 없는 사람들답게 흐린 선으로 꾸불텅하게 그려져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는 가끔 술취한 아빠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맞는다. '두고보자, 내가 크면...(퍽!)...그래, 내가 크기만 하면...(퍽!)...정말이지... 내가 크면...(퍽!)...복수하고 말겠다!'가 아이의 결심이다.

<우리 아빠>에 나오는 엄마는 시큰둥하며(대사가 없다. 할 말이 없다는 뜻이겠지) 설겆이 등 최소한의 집안일이나 하는 무뚝뚝한 뒷모습이 그려질 뿐이다. 하루의 노동에서 풀려나 겨우 앞치마를 벗는 엄마를 술취한 아빠는 질질 끌고 가 침대 속에 자빠뜨린다. 자신의 욕정을 풀기 위해...

이 작가가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족 구성원은 제각각이다. 그러니 같은 피를 가졌다는 그 사실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 콜렉션에는 '그 외의 이야기들'이라고 하여 '마음의 편지', '오르가즘' 등 몇 편의 섬뜩한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마음의 편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렇게 읊조린다. "나는 백작님네 거름 구덩이를 청소한다. 나는 늙었고, 못생겼고 슬프다." 시편의 절창을 떠올리게 하는 독백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대한 마음의 편지는 이렇다. "절망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일입니다. 최대한 집중하세요. 일하세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세요."

'오르가즘' 편을 보고 철저하게 여성의 편에 서서 수컷들을 조롱하고 있는 작가에게 고개를 갸웃했다면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 작가 소개를 꼼꼼히 읽어볼 일이다.

'그는 증오도 경멸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레제르는 심판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그 악의 없는 괴물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떤 환상도 없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성을 사랑하고 숭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아, 우리 아부지가 술꾼이었다면, 그래서 어린 시절 내가 술심부름을 한번이라도 해봤더라면 더욱 절절한 리뷰를 써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을 텐데...아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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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8-2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억, 레제르닷! 흐흐....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랍니다. 추천추천....합니다.

로드무비 2004-08-2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감사합니다.^^

하얀마녀 2004-08-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아빠가 되진 못했지만 역시 알콜이 가정파괴에 대해서 공감을 많이 하게 되네요.
저도 추천하고 갑니다. ^^

플레져 2004-08-2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가 술을 많이 드시고 오는 날에는 아이스크림과 바나나도 함께 왔더랬습니다.
은근히 그런날을 기다리기도 했었는데...
추천합니다~ 읽고 싶은 충동, 그것이야말로 알라딘이 바라고 독자가 바라는 리뷰겠지요?
님의 리뷰가 그래요, 늘...^^

로드무비 2004-08-2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마녀님, 참 남자분이셨죠?
이 글은 남자들에게 조금 먹히는군요.
하루빨리 아이 아빠가 되고 싶으신 건가요?^^
플레져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리뷰나 짧은 글을 항상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는 분.
저 또한 님의 글에 관심 많아요.^^

밥헬퍼 2004-08-24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다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무진장많이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술한모금 먹지않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되었지요. 반발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경이로운 탈선인 셈이요. 리뷰의 끝을 읽다보니 괜히 지난 시절 생각이나서 그냥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