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잘 안 되고, 약속한 날은 점점 다가오고... 그럴 땐 모든 걸 잊고 쇼핑이나 하는 게 딱이다.

5만 원 들어올 예정이면 미리 10만 원을 쓰는 인간형인 나는 다행히 남편 잘 만나(맞는 말일까?)

사고 싶은 것 눈치보지 않고 사면서 살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이렇게 헤펐던 것은 아니다.

어느 글엔가 간단하게 사정을 쓴 적이 있는데 전재산을 홀랑 잃는 경험을 한 후 인생관이

바뀌어 버렸다고 할까?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이야기인만큼 어디 가벼운 기분으로 써볼까?

97년, 전세 계약을 하러 갔더니 주인 부부가 나보다 그리 나이도 많지 않은데 으리으리한 목욕탕 건물 

꼭대기 80평 독채에 살고 있었다. 건물만 네 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엄청난 재산 규모보다 큰맘먹고 산 우리집 냉장고의 세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외제냉장고와

치렁치렁 끌고 나타난 안주인의 반짝이 홈드레스에 한눈을 팔았다. 입고 싶어서가 아니라 신기해서...

그런데 알고보니 그 모든 것이 은행빚과 우리 같은 세입자들의 전세금을 받아 마련한 것이라잖나.

 

IMF 가 절정일 때 주인 부부는 야반도주를 했고 눈치 빠른 세입자들은 그 집에 몰려가 냉장고며

세간살이며 닥치는 대로 들고 나왔는데 우리 부부는 먼 풍문인 듯 그 이야기를 듣고만 앉아 있었다.

몇 달 후 우리가 사는 건물을 경매로 낙찰받은 험상궂은 인상의 여자가 인부들을 데리고 와

집수리를 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리 사정을 좀 봐줄랑가 하여 하루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밥까지 해서 먹였다.

(병신!! ) 그것은 내 인생에서 몇 번째로 꼽히는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그 여자는 두어 달 새 오천 만원인가의 이익을 남기고 우리 몰래 건물을 팔아치웠다.

 

 <in 서울>과 <상처> <THIS>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문흥미의 만화이다.

어제 모처럼 한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절판된 것들을 포함 문흥미의 모든 만화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지금 서울에 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in 서울>이라는 문흥미의 만화를 떠올리면 남의 돈으로 흥청망청 사치를

하고 살다 도망간  집주인 내외의 얼굴과, 소송을 취하해 주면 100만 원을 주겠다고 하여

이사 비용이라도 건져보자고 취하했더니 안면을 바꾸던 모 교회의 장로와, 기타 등등 내게

모욕과 상처를 준 인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상한 결론이지만, 우리 부부는 그때 허리띠 졸라매며 살지는 말자고 약속했다.

아직 은행 대출금도 얼마간 남아 있고 하지만 우리 부부는 꼭 사고 싶은 것 사면서 먹고 싶은 것

먹으면서 복장 편하게 살고 있다.

<in 서울> 등 문흥미 만화 입수한 것 자랑하려고 쓰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얘기가 나와버렸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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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08-1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어렵고 힘든일을 겪으셨는데도.. 남다른 마음가짐이시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문흥미의 만화를 읽으면 마음이 무겁더군요.. 그 뒤까지 길게 남는 여운이라니~
좋아하는 만화를 다 구하셨다니.. 축하합니다..^^*

로드무비 2004-08-1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가끔 님의 코멘트가 힘이 됩니다.
사람은 강한 척하면서도 사실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요.
<원피스>는 어제 부쳤다네요.
책 받으면 어떤지 얘기해 드릴게요.^^

미완성 2004-08-10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This가 너무 좋았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우리집, 이었던 가요.
문흥미씨 그림은 된장국같아요. 구수했구.
로드무비님은 그걸 처절하게 몸으로 겪어내셨구, 또 문흥미님의 그림 속에 담긴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계시잖아요. 앞으로도 편안하게...사시길 바랄께요.
가끔 삶은 감옥같지만, 사실 감옥 안에서두 밥 잘 먹구 잘 싸구 하다보면 꽤나 재밌잖아요?
헉. 이건 아닌데 ㅠㅠ

반딧불,, 2004-08-1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거의 저하고 같군요..
그러고 나서...
가끔 무쟈게 후회하는 날들을 보내는 이랍니다ㅠㅠ

책장수 2004-08-1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장 편하게 사는 게 야무지게 사는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봅시다. 다함께~ 차차차~

로드무비 2004-08-10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 잃은 것보다 그 여자하고 인부들에게 땀 뻘뻘 흘리며 밥해준 게
왜 그리 수치스러운지... 반딧불님의 스토리도 궁금하네요.
내일 님 방에 갈게요.^^
따우님, 헌책을 샀는데 이건 새책이더란 말입네다.호호^^
책장수님, 그래요, 우리 잘살아보자고요.~~

플레져 2004-08-1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시절 저의 소원은, 내가 사고 싶은 책과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보자 였어요.
책 사고 영화 볼 때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어집니다. 너무 황홀해서...ㅎㅎ
그 이상은 너무 많이 생각하는 바람에 '나중에~'를 외쳐버리지만...
님께 요모조모 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