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살 때도 인터넷으로 사기보단 역시 서점에 가서 사야 제맛이다.
서점에는 시시한 책이나 사고 싶지 않은 책도 진열되어 있다.
그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것이 중요하다.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 서점에 갔다가 전혀 다른 책을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런 책이 의외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루는 책을 뒤지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어깨를 두드렸다.
"다케시 씨, 한 달 만이네요, 여기 오신 거."
그분은 작은 목소리로 "당신하고 나만의 비밀입니다"하는 느낌으로,
"전 책도둑 감시 담당이에요"하고 가르쳐주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우산까지 들고 평범한 손님 같은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1년 조금 지나 더운 계절에 갔을 때였다.
또 같은 아주머니가 스윽 옆으로 다가오더니,"오랜만이네요"하고 말을 걸어온다.
이번에도 장바구니 같은 걸 들고 가볍게 서점에 들른 아주머니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아주머니는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케시 씨, 이번 달로 그만두게 되었어요.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3년 동안 세 번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책도둑 감시 담당"이라고 인사를 건네온 도입과,
"오랜만이네요"하는 전개와, "이번에 그만두게 됐어요"하는 결말이 갖추어져서
한 편의드라마가 되었다.
이것이 영화 소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길게 찍을 것도 없다.
15초짜리 신 3회로, 그 아주머니의 인생을 단편영화로 그릴 수 있으리라.
인터넷서점에서는 그런 경험도 할 수 없다.
별것 아닌 사건이지만, 의외로 이런 일이 인생의 맛이 아닐까.
컴퓨터 앞에 앉아서는 절대 그런 경험을 할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 노트>  160쪽 중에서)




<그들 각자의 영화관>처럼 <그들 각자의 책방>이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단편영화가
만들어졌다면 기타노 다케시는 '책도둑 감시 담당 아주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것이다.
우리는 책방에서 어슬렁어슬렁거리며 직접 책을 고르는 즐거움을,
인터넷서점이 주는 편리성과 몇 푼의 적립금과 맞바꿔 버렸다.
소중한 것을 너무 헐값에 처분한 것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런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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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9-11-13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다케시인줄 알았어요;;; ㅋㅋ

로드무비 2009-11-13 15:30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 님, 저 좀 다케시 풍이잖아요.
건들건들.=3=3=3

Arch 2009-11-1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 전에 동네 서점에서 빛깔있는 책들에서 나온 '전통주'에 입맛을 다시다가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단 생각에 안 샀거든요. 검색해봤더니 도서관에 없어서 꼭 그 서점에서 사려구요. 적립금은 물론 저처럼 전통주 취향인 지역민을 알아봐줄리 없는(안 웃기다.^^) 서점이지만 저도 그렇게 어슬렁거리는게 좋아요.

소중한걸 잃은 후에 안타까워하면 정말 안 되니까, 베스트셀러 1위가 해커스 토익인 우리 동네 서점이지만, 부지런히 다니려구요. (서점 비꼬는게 아니라 안타까워선데 댓글이 뭐 이렇담!)

로드무비 2009-11-13 15:32   좋아요 0 | URL
서점에서 사야 꼭 완성되는(기분에!!) 책이 있습니다.
전통주도 왠지 그럴 것 같네요.^^

걸음걸이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고
어슬렁어슬렁거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책도 너무 엄선할 것 없고
닥치는 대로 읽는 여유가 좋은데
나이 때문인지 신종 플루 때문인지
언제 세상을 하직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영화 하나 책 한 권도 야박한 시선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2009-11-13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3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3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보 2009-11-1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님이 글을 읽네요,
저도 서점에서어슬렁 거리는것 좋아하는데 책만 열심히 구경한다지요,,ㅎㅎ

로드무비 2009-11-13 16:25   좋아요 0 | URL
저는 오랜만에 서점에 갔을 때도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마일리지며 적립금 생각에 아예 내려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울보 님, 류 정말 많이 컸네요.^^

무해한모리군 2009-11-13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집근처엔 체인화된 대형서점 밖에 없는데, 이 대형서점은 인터넷 서점이랑 똑같아서 최신간만 배치되어 있는데다, 심지어 알라딘 1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이 대형서점 프런트에도 똑같은 책들이 깔려 있어요. 그래도 자주 놀러 가서 책냄새를 맡곤해요.

풀무질 같은 사회과학서점에 이메일이나 전화로 주문하고, 택배로 받는는 건 어떨까 생각중입니다.

슬슬 걸어다니며 나를 유혹하는 낯선 녀석들과 눈이 맞고 싶은데 말이죠.

로드무비 2009-11-13 16:35   좋아요 0 | URL
휘모리 님, 유혹하는 낯선 녀석들을 처음에는 진짜 사내들로
읽었습니다.
눈이 맞았다고 쓰셔서 말이죠.ㅎㅎ

알라딘도 그렇고 전 무조건 한번 마음 준 곳을 고수하는 편인데
책도 어떻게 사는 게 현명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편하다고 눌러붙는 것보다는.

동네 조그만 책방 주인을 꿈꾸는 사람 이제는 없겠죠?

2009-11-13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개인주의 2009-11-14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 구경하며 고르는 맛은 인터넷질로 고르는거랑 또 틀리지요.
ㅎㅎ.
그런데 작은 책방 꿈꾸는 사람도 잘 없고
학교앞에서 참고서를 중점적으로 취급하는 곳 같은데는
왠지 불편하더군요.

얼마전에 퇴근한 짝지님하가 얼굴을 찡그리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장비기사라서 먼지랑 좀 친함.)
작업하는데 근처에 서점이 있어서
들어가서 책을 물었더니 제대로 듣지도 않고
손사래를 치면서 나가라고 다른데가보라고 하더라고..
(무척 서운한 얼굴이었습니다)
이런 서점은 사람 끌어들이는 서점이 되기 힘들겠지요?

로드무비 2009-11-15 01:14   좋아요 0 | URL
전 아주 어릴 때 꿈이 책방 점원이었어요.
나중엔 간이 커져서 작은 책방 주인을 꿈꾸기도 했지만...

스누피 님, '짝지님하'라는 호칭이 참 다정하네요.
장비기사라니, 정말 유능한 기능인이십니다.
중장비 기사의 준말 맞지요?(혹 아닐지도...)

책을 정말 좋아해서 손실을 각오하고 동네에 조그만 서점을 열었다고 한들
교과서와 잡지만 사러 온다면 김이 빠질 것이고
설령 좋은 책만 귀신같이 골라내는 단골이 몇 있다고 한들
뭐가 또 크게 다르겠습니까.

나 자신 믿음직한 고객이 될 자신은 없으면서 주인에게 바라는 건
또 많을지도 모릅니다.
스누피 님 댓글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