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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부처님 오신 날, 우리 집 마루에도 보라색의 예쁜 등이 하나 걸렸다.
지난 주말 지리산의 한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돌아오는 날 스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지지난 해 가을에 갔을 때 언덕의 사랑방에 종이 로봇을 열두 갠가 조립하여
통유리 창틀에 나란히 세워두고 왔는데 없어졌다.
누구의 짓일까.
부처님 오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서인지 우리 일행을 비롯하여 신도들이 떼로 몰려들었는데
공양주 보살 할머니는 느긋했다.
된장국을 한 솥 가득 끓여 놓았고, 쑤어논 묵에 간장을 끼얹어 내면 되고,
입에 넣으면 녹아버리는 깻잎 장아찌에 김치가 맛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사랑방의 그 묵직한 책꽂이도 여전했다.
이번에는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여섯 권과
<우키요에의 미>, 일본 강담사에서 출간된 Zen Painting이라는 책이 유독 눈에 띄었다.
눈가에 장난기가 자글자글한 스님께 버릇없이 여쭈었다.
"이 책들 스님이 읽으시는 겁니까?"
한 번 오면 며칠이고 틀어박혀 책만 읽고 가는 친구가 있다고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불교미술을 함께 읽는 스님이라니,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이번주 지허 스님의 <선방일기>를 꺼내어 곶감 빼먹듯 아껴가며 읽었다.
1970년대 초, 상원사에서 동안거를 결심하고 시월 초하루 그곳을 찾아 김장을 돕고
10월 15일 결제부터 1월 15일 해제일까지 함께 한 스님들의 생활을 기록했다.
1973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전에 당선된 글이라고 한다.
수행자로서의 진솔한 독백이 마음을 흔드는가 하면,
긴긴 겨울밤 곳간에서 몰래 빼돌려 구워먹는 감자구이 동호회를 결성하질 않나,
또 별식으로 만두를 만들어 먹는 날의 소동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어느 날 밤에는 또 정신이 우위냐 육체가 우위냐 하는 질문으로부터 촉발된
유물唯物 유심唯心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기도 하며, 용맹정진 중 수마에 함락당하는
치열한 현장이 생중계된다.
세모의 고독은 또 어떻고......
내일이면 동안거가 끝나는 날, 빨래터에서 나란히 내의를 빨아 널고
지객과 지허 두 스님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재미는 각별한 것이었다.
지허 스님의 <선방일기>는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재미있어서 단번에 읽히는데(일부러 며칠간에 걸쳐 나눠 읽었다) 여운이 길다.
--(뒷방 조실 스님을 보고 있으면) 때로는 파라독스하고 때로는 페이소스하다.
때로는 도인의 경계에서 노는 것 같고 때로는 마구니의 경계에서 노니는 것 같다.(47쪽)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들이랄까, 댓돌 위의 고무신 몇 켤레의 흑백 영상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35년 전 지허 스님과 함께 상원사에서 겨울을 나신 스님들,
견성의 문턱을 지나 모두 성불하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