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서 보내준 <꿈 그리고 악몽>을 읽었다.
이주노동자들 중에서도 네팔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을
직접 발로 뛰어 기록한 소책자.

현재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는데
그 중 절반이 비자 없이 체류하는 미등록노동자(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이란다.
2007년, 악명높은 산업연수제도가 고용허가제로 바뀌어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호한다고는 하나 미등록노동자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법적인 보장도 받기가 어렵다.

국내에서 일하는 네팔 노동자 수가 500여 명이라는데
오래 전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옴니버스 인권영화에서 박찬욱 감독은
지갑이 없어 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 값을 내지 못한 죄로 고발당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끌려가 6년 넘게 갇혀 지낸 네팔 여성 노동자 찬드라 구룽의
실화를 다뤘다.
그 단편의 제목이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정말 기가 막힌 스토리고, 잘 뽑은 영화 제목이었다.
그 사람이 백인이었다면 식당 주인은 그를 경찰에 고발했을까?

<꿈 그리고 악몽>에 실린 열두 명의 네팔 노동자들은 20대, 30대의 젊은 나이에
많은 수가  혼자 자취방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인을 모르는 돌연사도  있다.
아이들 겨울 외투를 사서 보내겠다는 전화를 받은 지 며칠 안 된 네팔의 부인에게
"당신의 남편이 자살했다"는 일방적인 통보만 하고
그 목격자를 끝까지 만나지 못하게 하는 수상한 회사가 없나.

새벽에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더니 아무 말이 없어 장난전화인 줄 알고 끊었는데
알고보니  한국에서 일하던 시동생이  자취방에서 혼자 숨지기 직전의 시간이었던 것.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싶었을까.
마누라도 도망가고 없는 집에 전화를 걸어......

그런데 신기한 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남편이 그렇게 고생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으면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텐데, 알선업체의 선처(?)로 남편의 뒤를 이어 한국에 오는 것을
강력하게 희망한다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살기가 어렵다는 말이겠지.

'선처'라고 하니 또 하나 생각나는 일이 있다.
지난달 서울 신도림동 아파트 신축공사 화재현장에서, 발각될 경우 강제출국의
위험을 무릅쓰고 인부들의 탈출을 도운 몽골인 노동자 네 명이
당국의 선처(기가 막혀서!)로 불법체류자의 멍에를 벗었다.
'선행'이라는, 불법체류자의 멍에를 단번에 벗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생긴 셈이다.
뉴스에서 그 소식을 접하고 이놈의 나라 어디까지 뻔뻔해지는지 두고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 출입국관리소 외국인노동자 보호소 화재현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부상자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는지 문득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달랑 천만 원씩 지급된다는 소식이다. 

<꿈 그리고 악몽>을 읽고 오래 전 우리 사회를 잠시 떠들썩하게 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를 떠올렸다.
그때와 달라진 건 허울좋은 제도의 명칭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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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5-1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이었나 EBS였나, 하여간 찬드라를 봤더랬어요. 정말 끔찍하더군요. ㅠ.ㅠ

에로이카 2007-05-1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섯개의 시선" 마지막 편이었던 박찬욱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너무 기가 막혀 지금도 기억합니다. 신도림동 공사현장 얘기는 처음 듣네요. 오랜만에 로드무비님 글 읽으니, 너무 좋네요. 잠수로 몸값 높이기 작전이신가요?? ^^

Mephistopheles 2007-05-1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꼴에 비자받기 굉장히 까다로운 나라라고 하더군요...^^

로드무비 2007-05-11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꼴에'라는 말이 절로 나와요. 그죠? 메피스토 님.^^

에로이카 님, 더 올라갈 몸값이 있어야 말이지요.
어제 올린 리뷰와 페이퍼는 안 좋았어요?=3=3=3
찬드라는 책까지 나왔답니다.^^

FTA반대 조선인 님, 전 그 식당 주인을 고발하고 싶었어요. 부르르~


진달래 2007-05-1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가 막히고... 또 부끄럽습니다........................ 이런 현실이...

로드무비 2007-05-1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달래 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훌쩍.

2007-05-11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7-05-1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ever
Ending
Peace
And
Love에서 언제까지나 행복하길... 찬드라 꾸마리 구릉

저도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믿거나 말거나...'가 들어 있는 <여섯 개의 시선>이 모두 재미있었죠.

2007-05-12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은 ~님처럼 성실하게 잘 쓰고 싶은데
일종의 사회적인 발언엔 어색해서 말입니다.
보여줄만한 글은 아닌 것 같은데...아무튼.
(다짜고짜) 충성!!^^

하루 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박광수 감독 게 제일 빠졌죠.
'얼굴값'이었나?
정재은 감독 것도 기대에 못 미쳤고.
찬드라가 최고로 강렬했어요.
임순례 감독도 거기선 위밍업만 한 것 같더군요.
('시선'이 1, 2편 나왔죠? 에피소드들이 막 헷갈립니다.;;)
잘 지내시지요? 반가워서, 실실.^^

우리부터가 인간답게 님,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런 페이퍼 쓸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미국의 어느 사막 도시 가운데 닭공장이 있는데
불법체류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기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언제 한 시사 프로에서 봤는데.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엄청난 노동강도와 모멸감.
그걸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으니.;;

아키타이프 2007-05-1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핍박을 하기 보다 당하기를 더 했을 우리나라.
그렇기에 더 부끄럽습니다.
저역시 백인과 비백인으로 나누는 차별된 시선으로 그들은 평가하고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군요.

로드무비 2007-05-13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헐리우드 영화, 그 화면 속의 개성 넘치는
선남선녀 주인공들을 곧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모르는 새
선망 내지 호감을 품었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백인과 동남아 이주 노동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자각을 했으니 앞으로는 달라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