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심윤경은 보통 심지를 가진 작가가 아닌 것 같다. 전작(前作)의 작가의 말이나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드러난 그녀의 확고한 소설관을 통해, 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현의 연애"를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사실 뜻밖이었다. 요즘 한국 문단에 유행하는 문학과는 다른 문학을 써보겠다고 힘줘 발언하던 심윤경이, "달의 제단" 출간 후 인터뷰에서 "달의 제단에서는 전통이 소멸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전통이 살아남는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라고 말한 심윤경이, 연애라는 단어가 제목에 포함된 소설을 출간했다는 소식은 내게 이런저런 생각의 꼬리를 물게 헀다. '아무래도 연애 이야기로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풀지 못한 의구심과 함께 "이현의 연애"를 집어들었다. 그래도, 심윤경이라면, 뭔가, 다를 거라고 믿으며. 혹은 자위하며.
결국 연애라는 타이틀을 걸고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했지만(이현의 입장에서 보면) 콕 끄집어내기는 힘들지만 뭔가 다르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 한 편을 알게 된 느낌이랄까. 그리하여 예술의 가장 고전적인 주제인 사랑은 이 책에서 새로운 색채를 덧입는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비극적인 이야기.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을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한 남자가 어떠해야했는지를, 이세 공과 이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진실되고 순수하게 아름다웠지만, 결코 아름답게 끝날 수는 없는 비극을 심윤경은 치밀한 이야기 배치와 정교한 심리 묘사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낸다. 적어도, 무얼 써도 다르게 쓰겠다는 심윤경의 의지만큼은 이번에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이현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 이야기이지만, 이진의 입장에서 읽으면 기록에 대한 이야기다. (이진이 한 번도 이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작품 후반부에 드러나며, 이는 앞부분부터 지속적으로 암시된다) 태어나면서 기록하는 사람의 운명을 타고 난 여자, 이진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시킨 건 어떤 의도일까. 소설가란 직업도 기록한다는 행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심윤경의 글쓰기와 관련한 어떤 면모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되짚어보면, 심윤경의 세 편의 작품을 기록이라는 테마로 연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의 동구가 글을 배워나가는 건 기록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을 획득하는 것이고, "달의 제단" 의 상룡이 소산 할매의 언간 해독작업을 하는 것은 옛 기록에 대한 복원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현의 연애" 의 이진이 영혼을 기록하는 것은 기록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깐이지만 기록 행위에 대한 심윤경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나온다.
이진은 표정 없이 사각사각 기록했다. 부총리는 어이없어서 웃었고 나는 통쾌해서 웃었다. 내가 처해 있는 이 어이없는 상황, 이 여자기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무엇으로도 피해갈 수 없는 이 처절한 수모의 경험이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말도 안 되고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 p. 268
기록하는 자가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나는 이 대목을 통해 심윤경이 기록하는 행위(글쓰기)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하는 작가라고 느꼈다. 그리고 이는 소설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큰 미덕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기록에서는 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가질 수 있는 여러 효용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맥락에서 약속을 어기고 이진의 기록을 훔쳐본 이현이 맞게 되는 파국은 기록을 모멸한 자에게 작가가 내리는 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이현의 연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이진의 기록이라는 이름 아래 중간중간 삽입된 4편의 이야기들이다. 억압받고, 욕망하고, 고뇌하는 영혼들을 기록한 이 4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경계에 선 듯 아슬아슬한 인생들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표현해내기 힘든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현과 이진처럼. 언어화시키기는 힘들지만, 4편의 이야기는 이현과 이진의 기본 서사와 묘하게 맞물리면서 기본 서사에 어떤 암시를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더 상세한 분석은 내 능력 밖의 일로 느껴지니 안타깝다. 4편의 이야기는 짤막한 단편을 읽는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는데, 심윤경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1인칭 화자의 등장이나 심윤경 소설에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야기(특히, '라 캄파넬라')를 만날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혹시 다음번엔 단편소설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매혹적이고 독특한 분위기의 흥미로운 소설이었는데 의문점도 몇 가지 남는다. 특히, 천상계에나 존재할 법한 이진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조금 거슬렸다. 결국 이진이라는 인물은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작가의 의도는 짐작하기 힘들지만, 이진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복적인 묘사는 내게 이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현실감을 거세시키는 작용을 했다. 동시에 약간의 지루함을 안겨다주기도 했다.
결말은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주기도, 예정된 길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그런 결말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작가가 강렬하고 임팩트있는 결말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달의 제단"에 이어 "이현의 연애"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이진에 대해서 이현이 기록한 부분은 그 강렬함을 천천히 녹여주면서 적적한 여운을 남김과 동시에 가슴 먹먹해짐을 니낄 수 있게 해주는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나는 이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입니다"로 시작해 " 나의 이름은 이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로 끝나는 독특한 사랑이야기, 이현의 기막힌 연애담을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