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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리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 259쪽

 풀 마라톤 완주 25회, 울트라 마라톤(100km 달리기. 오타 아니다. 100km가 맞다.)을 걷지 않고 완주한 러너가 남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는 문장이 어찌나 폼나던지, 풀 마라톤은 고사하고 하프 마라톤 경험도 없는 일천한 러너인 나도 항상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겠다'라는 생각으로 달려 왔다. 물론,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10km를 달리려던 계획이 7km나 5km로 줄어든 적도 제법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멈출지언정 다짐을 어길 수는 없다는 심정이었다. 풀 마라톤 경험이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러닝을 시작할 때 두 가지 결심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풀마라톤 완주 같은 목표는 애시당초 세우지 않는다. 나 자신과의 싸움은 이미 충분할뿐더러, 왜 굳이 풀코스를 뛰어야 하는지 동의가 안 되기도 했다. 건강을 위해 뛰는 건데, 무리하다 건강을 해칠 것 같기도 했고. 마라톤 풀코스가 100km였으면 거기에 맞춰 뛰어야 되는 거야라는 못난 심보였던 것 같다. 뭐, 요는 러닝만큼은 어떤 목표나 구속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달리고 싶을 때 뛰고 싶은 거리만큼 낼 수 있는 속도로 해 보자, 나는 나의 러닝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사람은 참 안 변하지만 사람 마음은 쉽게 바뀌는 것인지, 올해 11월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그것도 1시간 50분이라는 시간 내에 들어오는 걸로. 지금의 나는 이런 목표를 가진 러너가 된 것이다. 계기는 없다. 그냥 달리다 보면 그런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 건가 보다. 


둘째, 장비에 돈을 쓰지 않는다. 안전과 관련된 신발을 제외하고는 장비에 투자할 마음이 없었다. 절약하고자 하는 마음이기도 했지만, 그게 러닝만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진정한 러너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고성능의 시계 차고 이런저런 액세서리 달고, 겉멋이라 치부했다. 그런 내가 가민을 샀다. 가장 기본 모델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아무래도 하프 마라톤을 준비하기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위해 필요하겠더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이해할 수 없는 러너가 된 것이다. 시계 하나 차는 게 뭐라고 의욕이 더 생기기는 한다. 구비했으면 허투로 쓰지는 않는 게 또 나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가민에 적응할 겸 슬슬 달려보았다. 실시간으로 페이스와 심박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도움이 된다. 기존의 런데이 어플을 쓸 때의 불편함이 싹 해소되었다. 목표한 하프 1시간 50분을 이 녀석과 함께 잘 준비해 봐야겠다.



 처음 결심했던 풀코스 마라톤 도전하지 않기는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지금 마음으로는 그렇다, 이지만 자신은 없다.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나는 알 수 없다는 걸 이미 배웠으니까. 어쩌면 42.195km를 뛰겠다고 보스턴이나 베를린이나 시즈오카로 떠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거다. 아니면 당장 하프 마라톤 완주도 목표한 기록을 못 낼 수도 있는 거다. 다만, 끝까지 걷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 생각은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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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드걸의 시집>은 몇 년 전에 읽고 두 번째 읽는 것 같다. 문학 전공자들의 비평집보다 훨씬 더 독자를 끌어당기는 다양한 매력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솔직함 내지 정직함이다. 꾸며서는 한 권 분량의 에세이를 쓸 수는 없을 터이기에, 에세이의 매력은 결국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데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드러낸 솔직한 모습이 매력적이어야 할 텐데, 그런 점에서 좋은 삶을 살지 않고서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울림이 있는 에세이는 나올 수 없는 거겠지.


"우리 엄마는 한때는 소녀인 적이 있었답니다."를 "우리 엄마는 지금도 소녀일 때가 있답니다."로 고쳐주고 싶었다는 일화(그래서 '올드걸의 시집'이라는 제목이 나온 것)에서 시직하는 이 에세이집은 주어진 인생의 국면들에서 물러서거나 도망가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마주해 온 사람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읽기에도 좋지만, 아무래도 위스키나 와인 한 잔 따라놓고 읽기에 더 좋다고나 할까.


사랑하는 일을 왜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영화에서 그런 설정이 많이 나온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놓고 배우자 혹은 애인에게 눈물 흘리며 속죄의 발언을 한다. 난 그것이 못마땅하다.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사랑했다는 것인가?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사랑의 자유의지를 전제하는 것이다. (중략)  이런 얘길 하면 묻는다. "니 남편이 그래도?"라고. 마음 같아선 그의 사랑을 존중해주고 싶다. 한때나마 뜨겁게 사랑했던 남자가 남편이다. 그에게, 다시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고 전제하는 게 나로서는 더 쓸쓸하다.(24쪽) 

  '한때나마' 뜨겁게 사랑했던 고백이야 심상한 것이라 해도, 남편에게 다시는 사랑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쓸쓸하다'는 선언은 처연하게 읽힌다. 물론, 백날 이렇게 말하고 적어봤자 자칭 도덕주의자들은 끄덕도 하지 않겠지. <헤어질 결심>이 불륜을 예찬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헤어질 결심>에서 두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이 영화를 불륜 예찬이라고 핏대 세우는 사람보다 불륜을 저지를 확률이 더 낮을 것이고, 남편이 다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내가 그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아내보다 적어도 자신의 (한때나마 뜨거웠던) 사랑에 더 충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나는 이런 말을 내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고 쓸 자신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비겁하게 좋은 글을 빌려서 한 마디 보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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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노래 - 노래와 함께 오래된 사람이 된다 아무튼 시리즈 49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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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형씨 유튜브에 작곡가 김형석 씨와 B2B 멤버 이창섭 씨(이날 초면이었음)가 나온 편을 봤다. 정재형은 여러 방송을 통해 웃기고 따뜻하고 실없어 보이기를 망설이지 않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지만, 김형석이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 힘을 쭉 빼고 툭툭 던지는데 50분 짜리 방송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박진영이 '너의 뒤에서'를 작사하고 신이 나서 김형석한테 흥분해서 자랑했더니, 김형석이 "그런데, 그거 심의 통과가 되겠어?"라고 했다는 일화 등등. 그리고 정재형과 김형석이 끊임없이 서로 놀리고 흑역사를 꺼내면서 깔깔거리는데, 얼마나 친해 보이던지, 좀 부럽더라. 그러니까 친함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겠지만, 나한테는 흑역사를 편안하게 던지면서 상처주지도 상처받지도 않는 관계가 친함인 것 같다. 그래서 에픽하이 멤버들을 보고 있으면 늘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고. 웃긴 이야기말고도 음악과 일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도 중간중간 잘 녹아 있어서 보면서 생각할 게 많은 영상이기도 했다. 


 특히, 정재형과 김형석이 한참 후배인 이창섭의 고민을 경청해 주고(방송 내내 그렇게 깔깔대던 두 사람이 음악인 후배가 직업적 고민과 직업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말할 때는 한번도 끼어 들지 않고 진지하게 듣고만 있는 모습이란), 그 고민에 대해 이미 경험을 한 선배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을 편안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해주는 걸 보면서, '저런 대화 방식을 잘 기억해 둬야지. 경청하고 경청을 바탕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따뜻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어.'라는 다짐. 


 그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재능을 시기하지 않는 건 매우 중요하면서 아름다운 덕목이라고. 왜 안 그렇겠는가. 특히 예체능 쪽에서는 뛰어난 제자를 보면 뿌듯하고 성장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에 대해 비록 못난 마음일지언정 시기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테니까. 


 나의 경우에는 어릴 때는 뛰어난 글쟁이들의 글을 동경했던 것 같고, 20대에는 그들의 재능을 질투하기도 하고 그들의 재능과 비교되는 나의 모습에 좌절했던 것 같다. 이제는 깨끗한 마음으로 그 재능을 아끼고 그 재능 덕분에 읽을 수 있는 글에 감사해 한다. 이슬아 씨의 글도 그런 마음으로 읽는다. 이슬아는 재능만이 아니라 악착같이 꾸준히 써낸 끈기로 이뤄낸 성취겠지만, 사실 매일 꾸준히 써내는 끈가야말로 재능이고, 그 이전에 자신이 매일 꾸준히 쓸 수 있다고 믿는 마음자체가 이미 범인들은 가지기 어려운 믿음이다. 


 '노래'를 테마로 한 이 책에는 여러 웃긴 에피소드와 잔잔한 에피소드와 묵직한 에피소드가 잘 섞여 있다. 


 한편 가왕이 아닌 이들의 노래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뭔가를 못하는 방식 또한 제각각 다르다는 사실에 나는 자주 놀라곤 한다. 어떤 사람의 못함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잊을 수가 없다. 잘 못 불렀는데도 좋아죽겠는 노래를 맞딱드릴 때마다 음악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기분이다. (9쪽)


 다들 그런 경험들이 있지 않나? 노래방에서 누군가가 정확하게 잘 부르는 노래보다 누군가가 개성있게 못 부르는 노래를 더 경청하고 거기에 더 매력을 느낀 경험. 못 불러도 주눅들지 않고 관객의 시선따위 안중에 두지 않고, 온 세상에 나와 노래만 있다는 느낌으로 노래에 빠져서 제멋대로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게 노래방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그노벨상 측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가라오케(노래방 자동 반주 기계)를 발명한 이노우에에게 이그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한 인내심을 갖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제시함으로써 평화 공존을 이룩함." (15쪽)    


 대한민국의 노래방이 과연 평화 공존에 이바지하는 바가 더 큰지 향락적 유흥에 대한 탐닉으로 공공선에 해악을 끼치는 바가 더 큰지는 모르겠지만, 가수와 관객의 역할을 바꾸어 가면서 서로의 노래를 공유한다는 노래방의 본질은 이그노벨상 측의 수상 이유를 수긍하게 있는 면이 있기는 하다.


 낄낄대면서 놀리고, 울먹이면서 열창하고, 뜨겁게 술잔을 부딪칠 수 있는 누군가가 그리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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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2-26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생은
정말로, 간절히
노래 잘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정재형, 김형석, 둘 다 재능 엄청 많아 보여요^^

얼음장수 2023-12-27 10:59   좋아요 1 | URL
개성있게 못 부르는 인생도 나름 만족하며 살지만, 저도 정말 다음 생에는 락스타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200명 앞에서 무대를 망친 기억이 한이라서요 ㅋㅋ
연말 따뜻하게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집 서가의 한 켠에는 '스시의 기술'이라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의 담백한 책이 꽂혀 있다. 스시를 쥘 것도 아닌데, 좀 더 잘 먹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산 책이었다. 예상하는 대로 조금 읽다가 포기했다. 그래도 가끔 생선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 꺼내서 보기는 한다. 모르겠다, 언제부터 고기보다 생선과 스시가 좋아진 건지는. 처음에는 생선 안주로 술을 마실 때가 고기 안주로 술을 마실 때보다 다음날 숙취가 적어서, 그리고 더 오래 마실 수 있어서였던 것 같긴 하다. 적고 나서 보니, 저 두 가지 이유라면 술 마시는 사람에게 정말 결정적인 것들이긴 하네. 평소에도 생선과 스시를 즐겨 먹지만 해산물과 초밥의 천국인 일본이 바로 옆에 있으니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나한테 일본 여행의 다른 이유는 맛있는 해산물을 좋은 술과 함께 즐기는 데 있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는 긴자의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한 스시호리노우치를 예약하고 방문했다. 29살의 동갑내기 부부인 카이토 상(남편)과 루미 상(아내)이 영업하는 가게다. 왜 스시의 격전지인 긴자에 가게를 차렸나고 물으니까, 긴자는 최고의 스시야가 몰려 있고, 여기서 최고가 되면 일본 최고의 스시야가 되는 거다. 나는 최고가 되고 싶다.”라는 웅장한 포부를 밝히셨다. 미소가 아름다운 카이토 상은 스시를 쥐고 좀 더 호탕한 웃음의 루미 상이 술과 서비스를 담당하는 구조. 나중에 들어 보니 실제로 카이토 상은 술은 거의 못하고 루미 상이 술을 아주 즐기고 잘한다고, 카이토 상이 루미 상이 카운터를 잠깐 비운 틈을 타서 엄마한테 형의 비밀을 고자질하는 동생처럼 알려줬다.



 참치 중뱃살로 코스를 시작하는 강렬함, 꽤나 많은 전어를 먹어 봤지만 단맛과 감칠맛이 이렇게까지 폭발하나 싶을 정도로 주시한 전어, 압도적인 퀄리티의 우니가 특히 인상적이었고, 전체적으로 별다른 기교 없이 깔끔하고 단정하게 내어주는 게 특징적이었다. 여행자의 너그러운 마음이 작용도 했겠지만, 여러 번 감탄사가 나올 만큼 맛있었다. 옆에서 같이 먹던 S야동 배우 같아요. AV KIM 어때요?”라고... ,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로 보일 만큼 강렬한 리액션이었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맛있게 먹고, 맛있게 먹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손님한테 뭐라도 하나 챙겨 주고 싶은 게 요리사의 마음 아니겠는가. 잠깐, 아무리 그래도 야동 배우는 쫌....ㅋㅋㅋㅋ. 보조 관념의 선택이 화자의 무의식과 일상적 습관을 드러낸다는 점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점심이지만 이렇게 좋은 음식이 있는데 술이 빠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 여기는 도쿄이고, 종목은 스시니까, 사케를 한 잔 마셔야지. 주류 메뉴판을 봐봤자 아무 의미없다는 걸 알기에 처음부터 루미 상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첫 사케는 지콘이었는데, 지콘이 이렇게 프루티했던가. 프루티하고 청량해서 시작으로 너무 좋은 선택이었다. 역시 술은 가게에 추천받아 마시는 게 정답이다. 두 번째 사케는 아라마사. 이게 말로만 들었던 그 아라마사구나, 하면서 마시는데 하아 진짜 맛있네. 나보다 사케를 더 모르는 S는 이미 아라마사에 빠져 있다. 앞에 것도 맛있었는데 이게 진짜 맛있다고. 그렇겠지. 그게 더 구하기 힘든 술인데 ㅋㅋ. 아라마사를 맛있게 홀짝이면서 짧은 지식으로 아라마사 중에서는 NO.6(넘버식스)가 아주 유명하다는 말을 하는데, 그걸 루미 상이 들었나 보다. 마침 가게에 NO.6가 있는데, 드릴까요 한다. 네네, 주세요, 두 번 세 번 주세요. 가게에서도 쉽게 구하기 힘들다는 말과 함께 NO.6를 따라 줘서 마시는데, 하아 여기가 극락이다. S도 이미 뭐 ㅋㅋ 음식 먹고 리액션은 크고 좋을지언정 이렇다 저렇다 설명은 많이 하지 않는 SNO.6를 마시고는 말이 많아진다. 비싼 술에 저렇게 열렬히 반응하는 혀라니, 너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게 틀림없구나. 열심히 더 열심히 일해서 비싼 술 많이 마시고, 다 마시기 힘들 때는 나한테도 좀 주고 그래 볼까?

 

 편안하고 유쾌한 접객 속에서 완벽한 사케 페어링으로 즐긴 최고의 점심 식사였다. 계산을 하고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가 자리에 와서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S의 표정이 지나치게 밝은 게 아닌가. 약간 들뜬 표정이었는데, 이 녀석이 좋은 술과 함께하는 맛있는 음식의 가치에 눈을 떴구나, 뿌듯했는데, 개뿔 그게 아니었다. “쉐프님이 핸드폰으로 수지 사진 보여 주면서, 저보고 닮았다고 했어요!” “.....” 쉐프님, 이런 전략으로 긴자 최고의 스시야가 되시겠단 말입니까?! ㅋㅋㅋㅋ 뭐, 덕분에 S는 말 그대로 수지맞은하루가 되었으니까 그거면 된 거다. 나는 내 마음 속의 '수지(를 도둑) 맞은' 하루지만. 중요한 건 덕분에 곱씹을 술안주가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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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12-2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시는 좋아하지만 술 못하는 저도 마셔보고 싶을 정도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내년 딸과 북해도 여행 계획중인데, 도쿄 가서도 튀김만 잔뜩 먹은 저이지만
사케에 도전 한 번 해 볼까요~~~~^^

뜬금없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이어~~~
행복한 연말 되새요.

얼음장수 2023-12-23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류 주문은 필수가 아닙니다.
그래도 여행자의 마음으로 한 잔 정도 추천받아서
음식과 드셔보시는 것도 여행의 기쁨 중 하나니까요.
삿포로에 가신다면, 프렌치 레스토랑을 꼭 가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데, 더 맛있어요. 스시도 물론 좋고요.

은하수 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 읽고 나면, <여행의 이유>라는 제목은 참 정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영하는 이 책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핸드폰 하나로 하루에 세계일주를 할 수 있는 시대 아닌가?) 인간은 왜 여행을 떠나는가에 대해 쓰고 있으니 말이다. 통상적인 여행 에세이를 기대한 독자들은 당황하거나 실망했을 수도 있을 정도로 진지하고 묵직한 내용이었다. 나도 읽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억은 못 하지만, 김영하의 산문 중에서 가장 유머가 없다는 인상은 남아 있다. 아무튼 김영하가 저렇게 제목을 단 이유는 "작가님, 이 책은 제가 생각했던 그런 내용이 아니라고요!"라는 예상가능한 항의에 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한다. "독자님, 죄송한데 제목을 다시 한 번 봐보시겠어요?" 

 김영하의 책에 대해 쓰려는 건 아니고, 나에게 '여행의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건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의 만남이 아닐까, 라고 이번 도쿄 여행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일본을 꽤나 다니면서도 계속 미루었던 도쿄 여행이었다. 막상 비행기표를 끊고 나니, 그 어떤 여행보다 기대되는 마음이었다. 파면 팔수록 '먹고 마시기'에 이만한 도시는 없는 것 같았단 말이지. 도쿄 여행이니 도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기내에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챙겼다. 고등학교 때 읽고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게 되는 셈인데, 사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에게 <노르웨이의 숲>(그때는 <상실의 시대>였지만)은 사실상 야설이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고 남자 주인공이 2명의 여자와 섹스를 하거나 다른 여자와 또 섹스를 하거나, 고등학생 때의 나는 말 그대로 그 책을 탐독했다! '대학생의 생활은 저런 것이겠군.' 어떤 청소년은 저런 기대감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기도 하는 법이다. 물론 그 청소년이 그런 소설같은 생활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20여 년이 흘러 읽은 <노르웨이의 숲>은 좋다/나쁘다 이전에 남자 주인공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그 나이 특유의 치기나 반항심, 적개심이 귀엽게 느껴지다니, 이런 식으로 늙어감을 확인하게 될 줄이야. 


 책을 반쯤 읽었을 무렵 나리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뭔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왔는데, 그 이유는 내가 첫 번째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승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9년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비행기의 중간 정도에 앉았는데 공교롭게 그비행기는 출입구가 가운데 쪽에 있었던 거다. '오호, 온 도쿄가 나를 반겨주는군.' 


 도착해서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우에노-아키하바라-도쿄역-긴자' 코스 3만 보를 걸었다. 도쿄에 먼저 도착해 있던 일행과의 대화가 즐겁기도 하고 도쿄의 길거리 풍경도 눈에 담고 싶기도 해서. 그렇게 끝없이 걷다가 긴자의 한 이쟈카야로 향했다. 한국에서 미리 점찍어 둔 곳이었다. 여행 첫 날 저녁에 현지인이 많은 로컬 술집에 가는 건 내 습관인데, 연말이라 그런지 술집 안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한국과 같은 대기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급하게 주변의 다른 곳들 몇 군데를 찾아서 가봤지만, 가는 곳마다 만석이었다. 그 와중에도 '찾아서 가는 곳마다 만석인 걸 보니, 식당/술집을 찾는 감은 아주 훌륭하단 말이지.' 으이구, 그래서 행복하세요? 아무래도 번화가인 긴자 쪽은 안 될 것 같았다. 조금 이동해서 아키하바라 근방의 이자카야로 가 보기로 했다. 역시 미리 한국에서 찍어 두고 온 가게. 이걸 어쩌나, 여기도 만석이란다. 기다리겠다고 하니 자리가 언제 날지 알 수 없으니 돌아가란다. 어쩌겠는가. 나와서 다른 곳들을 찾아봐야지. 외진 곳이라 마땅한 곳이 안 보인다. 더 찾아다니기에는 3만 보를 걸었던 몸이 버티지를 못 하는 상황. 마침 동행인 S가 그냥 방금 그 이자카야가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어쩌겠는가. 돌아가서 일단 기다려 봐야지. 가게에 가서 우리 상황을 설명을 하고(전달되었을지는 지금도 알수 없다.) 그냥 가게 앞에서 기다릴 테니 자리가 나면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다. 주인장이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가 다시 온 정성이 갸륵하게 느껴졌는지 그러라고 한다. 머리를 민 주인장의 인상이 강하기도 하고 표정도 살짝 무서워서 다른 데 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미 갈 데가 없는 신세다. 가게 문을 바라보면서 하냥 기다리기로 한다.  




 한 10분 지났을까. 가게 안에서 누가 나오는 낌새가 나더니 문이 스윽 열린다. '역시, 나는 행운의 사나이! 비행기에서 제일 먼저 내릴 때부터 이 행운은 예정되어 있던 거였어!!'는 개뿔. 나오는 사람은 가게 주인장이었다. 오늘 일진은 영 아니군, 생각하던 찰나 주인장이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두 개의 컵을 들고서. 기다리는 우리를 배려해 물 한 잔 주는구나, 싶어 적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런데 잔을 건네면서 주인장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지 않겠는가. 거기에는 "춥지? / 따뜻한 술이야. / 서비스", 이렇게 3줄이 번역기에 적혀 있다. 그렇다. 물이 아니라 추위에 힘들지 모를 이방인 손님을 위해 데워서 내온 사케였던 거다. 파파고로 번역한 문장이 이렇게 온기가 넘칠 일인가. 사케의 도수는 15도였지만, 저 순간 주변 공기가 30도까지 오르는 듯한 따뜻함. 주인장의 다소 완고해 보이는 인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저 감동적인 접객은, 피곤해진 다리와 조금은 지쳐가는 마음을 포근하게 풀어주었다. 자리에 앉아 경험한 술과 안주도 너무 훌륭했다. 하지만 이 가게는 나에게 저 3줄의 문장으로, 그리고 가게를 나올 때 서로 과장되게 주고받은 손키스로 기억될 것 같다.


여행의 이유는 이런 예상치 못한 만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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