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까지는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 문맹이었다면, 21세기의 문맹은 그림을 못 읽는 사람을 뜻할 것입니다." 어느 지면을 통해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진중권의 이 도발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 솔직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글자는 웬만큼 읽는데 그림 좀 모른다고 문맹이라는 딱지까지 붙이고 살아야 되는 건가. 돌이켜 보면 그림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는 길고도 깊은 것이긴 하다. 학창시절 미술성적만큼은 항상 최하위권을 유지했고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도 않지만 그린다고 해봤자 중학생 수준에도 못 미칠 것이다. 내 주변에 포진해있는 일군의 미학도들은 나의 컴플렉스에 불을 지폈으며,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림과 미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정도는 갖춰야겠다고 마음을 먹곤 했다. 그리고 그 미학도들의 추천에 따라 시작은 "미학 오디세이"로 하겠노라고 말이다.

  입문서로 "미학 오디세이"는 장단점이 있다. 우선 적당한 두께에 깔끔한 편집은 초심자로 하여금 최소한 지레 겁먹어서 도망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좋다. 고대 이집트부터 근대 미학에 이르기까지 자칫 지리해질 수도 있을 법한 미학사 여정은 다양한 컬러 삽화와 판화 예술가 에셔의 도움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진중권이 공을 들인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이다.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기존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광대의 글쓰기"로 가능함을 설파했던 그답게 이번 책에서도 그의 미학강의가 독자들의 뇌로 사르르 녹아들 수 있게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에서의 핵심은 심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능수능란한 구어체의 구사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답법을 들 수 있겠다.  "원래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첨부되는 게 아니라 형식 속에 침전되는 법이다."라는 패기만만한 발언을 하더라도 잰 채 한다는 비판에서 그는 얼마간 자유로울 수 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유구한 미학사를 책 한권에 포개다 보니 아무래도 곳곳에서 힘이 달린다. 특히 고전주의 이후의 미학사 부분은 내용이 조금 어렵기도 하거니와 설명도 조금 부족해 미학 입문으로 애 책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버겁지 않을까 싶다. 다행인 것은 장이 끝날 때마다 참고문헌 목록을 충실히 달아놓았기 때문에 더 공부하고픈 사람은 알아서 찾아가며 할 수 있게끔 배려를 해놓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막의 막연한 공간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피라미드까지 세웠다는데 방대한 미학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참고문헌을 찾아서 읽는 노력 정도는 독자들이 해주는게 인류의 조상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이 책을 읽은 솔직한 평은 꽤 재미있게 미학사 전반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정도가 될 것이다. 태초의 주술이 고대에 예술로, 중세에는 종교로, 근대에는 철학으로 모습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날카롭고, 루벤스와 푸생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엇갈린 평을 통해 예술의 다양함을 이끌어내는 부분은 깔끔했다. 태초에 존재했다는 아름다움이 인류사를 관통하며 어떤 양상을 띠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진중권의 미학사 여정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  여자친구가 미술관 가자고 할 때마다 핑계대며 안 가서 미안했는데 진중권의 도움도 얻고 했으니 다음엔 내가 먼저 제안해봐야겠다. "시립 미술관에 꽤 흥미로운 작품전 하던데"하고 말이다. 여전히 자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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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3-0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어려운 미학이지만 처음으로 공부 좀 해보고싶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프레이야 2007-03-03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오래전 이 책 사두고 다 못 읽고 꽂아둔 게 생각나요.
조만간 읽어야겠습니다.^^

얼음장수 2007-03-03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영합니다. 하지만 저도 2권을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고 있으니 쉽게 "강추" 하지는 못 하겠네요. ㅠㅠ

로드무비 2007-03-0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마이 도러의 그림에 메모 남겨주신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진중권 씨 글은 무엇보다 재밌게 술술 읽혀서 좋아요.^^

얼음장수 2007-03-0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가 맘에 없는 말은 할 줄도 모르고 하지도 않습니다만, 군생활하다보니 가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저는 그림 못 그리는 게 한입니다. 가끔 뭔가 떠오를 때 글보다는 이미지로 남기고 싶을 욕구가 생기는데 그림으론 절대 표현이 안 된단 말이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