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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판 기간 내내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위압적인 재판정의 분위기 속에서 16시간을 안희정과 안희정의 변호인들, 검사와 판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검사와 판사, 안희정의 다섯 변호인에게 고소인인 나는 숱한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피고인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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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저도 언론을 통해 사건을 들으면서 안희정씨보다 김지은씨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왜 4번이나 반복되었는데 저항하지도 알리지도 못했을까 하고요. 제 '상식'에서 나온 직관적인 반응이었는데, 책을 통해 안희정씨와 김지은씨의 관계는 '상식'을 파괴하는 무자비한 권력이 작동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페이지에서 분노했지만, 수행비서 매뉴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대목에서는 한동안 멍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말 늦은 밤에 지방에서 불러서는 대리 운전을 시켰다는 대목에서는 처참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김지은씨 편에 서지 않았(못했)습니다. JTBC 뉴스룸에서 인터뷰(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유투브로 봤습니다. 김지은씨가 겪은 일을 조금은 알고 들으니 처음 볼 때마다 더 아프게 들렸습니다.)를 봤을 때는 김지은씨의 말을 온전히 믿었는데, 그 이후 재판 과정에서 조금씩 갸웃했던 것 같습니다. 이게 다 안희정 측의 끈질긴 2차 가해때문이란 사실을 책을 통해 알고 나니, (저에게) 화가 나고 (김지은씨에게) 미안해졌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건너 아는 지인 한 명이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어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걸 봤거든요. 지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의 삶 전체가 무기력해지는 걸 보기도 했던지라 미투라는 것만으로 온전한 지지를 보내기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의도적인 거짓 미투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호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김지은씨의 미투가 거짓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쪽의 2차 가해와 저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맞물리면서 이 사건을 범죄라고 단정하긴 힘든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났을 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에게 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말도 했습니다. 형사법의 기본 취지를 고려했을 때, 문제가 있는 판결이 아니냐고, 이 판례로 인해 앞으로 형사 재판에 대한 신뢰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겠냐고, 아무리 그래도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이 판결문의 언어는 아니지 않냐고. 나름 열변을 토했던 것 같습니다. 김지은씨 개인에 대한 악의는 없었지만, 이제서 생각해 보니 그것도 미안합니다. 그 당시 사건에 대해 조금 더 찾아봤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범죄 후에 미안하다며 러시아의 아름다운 풍경만 마음에 담으라던 그 메시지에서 사건의 본질은 이미 드러났던 것인데 말이죠. 그걸 알면서도 형사법의 원칙이니 판결에 대한 신뢰니 떠들었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조금이나마 미안함을 덜기 위해 친한 사람들에게 이 책에 대해 많이 말하려고 합니다. '나도 이러저러하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어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한쪽의 입장에서 쓴 책이니 그런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책에 나온 객관적인 증거나 동료들의 진술, 다른 기관장 밑에서 비서직을 수행하는 수행 비서의 탄원서 등을 보면 나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마음이 아니라 거짓된 정보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김지은씨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공적인 공간에서 '젠더' 이슈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쪽에도 깊이 발을 담그고 있지 않은 저같은 사람에게는 젠더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입니다. 다른 주제의 글보다 읽는 사람의 반응을 더 생각하게 되고 조금은 쪼그라든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 이 글만 해도 꽤나 많은 자기 검열이 있었네요. 안희정씨가 행한 범죄를 뉴스를 통해 밝히겠다고 결심한 김지은씨의 그 마음은 어땠을지는 짐작도 하기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상황이었기에, 문자 그대로 '인생을 걸고' 뉴스룸에 나오신 것이었겠죠. 살기 위해서요. 김지은씨가 더 잘 살아가시기를 응원합니다. 그래서 김지은씨에 대한 글은 여기까지로 줄이겠습니다. 앞으로는 안희정씨에게 묻고 안희정씨에 대해 쓰겠습니다. 4번의 범죄를 저지른 그 악마같은 마음과, 재판 과정에서 말을 바꾸고 연애 프레임을 덧씌운 그 비겁한 마음에 대해 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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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례 2020-09-17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까딱 잘못했으면 성법죄자를 대통령으로 뽑을 뻔한 일인으로써 김지은씨는 나라를 구한 의인입니다. 정치적 이익집단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얼음장수 2020-09-17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많은 안희정이 더 있을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조국 사태가 한창일 때였다. 선배들과 점심을 먹는 중이었는데, 티비 뉴스에서 조국 관련 뉴스가 나왔다. 그때는 티비만 틀면 그랬다. 그런데 선배들이 하나같이 조국 일가를 옹호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최순실 사태 때 같이 광화문 광장에 가서 오들오들 떨면서 "이게 나라냐?"고 외쳤었는데, 윤석열 검창총장을 욕하면서 조국 일가의 행태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단다. 나경원 아들을 거론하면서(나경원이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것도 아닌데) 그것보다는 낫단다. 배가 아프다고 말하고 식사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나경원보다는 조국이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조국은 위법이 없을 수도 있고, 법적 처벌을 모두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라고 쓰고 싶지만) '촛불 정신'(만약, 그런 게 아직 남아 있다면)이 어떤 장관 후보자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위법이 없으니 적합 판정 수준에 머무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법으로 법의 틈새를 이용해 사적 이익을 누리는 사람들이 적어도 공직에는 부적합하다는 공감대가 촛불 정신의 최소한이 아닌가. 최악의 경우에 범법자, 최선의 경우에 위선자인 사람이 촛불 정권의 '법무부 장관'이라는 걸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이는 걸 넘어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많은 장면들을 보고 나는 상처를 받았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법 없이 사는 사람은 아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명박, 박근혜 때의 여러 작태들은 나를 분노하게 했는데, 조국 사태 때의 주변 풍경은 나를 쓸쓸하게 했다.

 

 

세상에 알려진 조국 일가의 행적은 조국 정도의 엘리트를 기준으로는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고들 변호한다. 동의한다. 아마 대한민국 엘리트의 평균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자식을 의사나 변호사 만들고, 기민하게 움직여서 사모펀드에 투자하고, 자식에게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을 최대한 많이 제공, 상속하려는 욕망을 많은 엘리트들의 욕망일 것이다. 그럴 만한 자원을 가지기 힘들 뿐, 평범한 국민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간 해왔던 무수한 '정의'로운 발언과의 모순은 차치하고) 그 과정에서 위법과 편법을 쓰는 건 다른 문제다. 표창장을 위조했네 마네 하고 있는데, 엄마가 재직 중인 대학교에 딸이 봉사활동을 하러 가고 그것을 의전원 입시를 위한 스펙으로 활용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다. 그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을 표방한 현 정권의 법무부 장관 후보 일가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부터 먼저 분노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남편이자 아버지인 당사자는 몰랐을 수도 있지 않냐고 한다. 조국은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살기라도 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아버지가 딸이 자신의 아내가 재직하는 학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걸 모를 수가 있을까. 그리고 아들의 인턴 관련 사안이나 언론을 통해 드러난 자식들의 학업 상황에 대한 조국의 지대한 관심을 보면 몰랐을 리가 없어 보인다. 몰랐다면 자기 집에서 벌어지는 위법 혹은 편법적인 일도 모르는 사람이 한 국가의 법무부를 주관하는 자리에 오른다는 말밖에 안 된다.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진중권이 왜 이렇게 신랄하게 정권과 옛 동료인 조국을 비판하는지 너무 잘 알겠다. 한때 '사회주의'를 같이 꿈꿨던 친구의 삶이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알게 된 거다. 그리고 그 욕망을 돈, 권력 등의 사회적 자본을 활용해 실현해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느꼈을 배신감이 이해가 간다. 나 역시 같이 촛불을 들었지만 조국을 옹호하던 사람들에게 배신감과 서글픔을 느낀다. 이런 식으로 말했더니 '일베', '토착왜구' 따위의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열이 받다가도 진짜 서글퍼진다. 나는 당신들보다 더 많은 걸 원해서 분노하는 것인데, 겨우 이 정도에 만족하는 당신들이 왜 나를 폄하하는 것인가. 당신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토착 왜구'가 아니라, 당신들이 가진 빈곤한 '정치적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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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의 디테일>을 흥미롭게 읽었다. 도쿄에서 배우는 마케팅에 대한 통찰로 읽어낼 수도 있고, 색다른 도쿄 여행기로 읽어낼 수도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중에도 세심하게 관찰하게 꼼꼼하게 기록하는 저자(생각 노트)의 태도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 '아,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야 책 제목에 '디테일'을 넣을 수 있겠구나.' 실제 책을 쓰기 위해 간 여행이 아니라 그냥 휴가 차 간 여행이었는데 우연히 퍼블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게 되어 나오게 된 책이라는 걸 알고 나니, 준비된 사람이 빛을 보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도쿄의 디테일>에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놓치기 쉽지만 그래서 돋보이는 도쿄의 빛나는 디테일들이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다. 


 초록불 신호 연장 버튼, 도시락 안에 함께 들어 있는 물티슈(식전)와 이쑤시개(식후), 호텔 로비에 있는 커스터마이징 가이드북, 남녀의 사용 습관 차이에 착안한 남성용/여성용 수건 등등. 이외에도 아기자기하게 재미있는 내용도 많고, 생각을 유도하는 제안도 많다. 성실한 독자인 나는 저자의 제안을 내 방식대로 소화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을 너무 열심히 해서인지 어젯밤에 배가 너무 고팠다. 배달의 민족 어플을 켜고 야식 메뉴에서 1인분을 주문할 수 있는 곱창집에서 곱창 볶음을 주문했다. 1인 가구를 위한 메뉴부터 얼마나 반가운가. 가게 입장에서야 최소주문금액을 높게 설정하고 기본 판매 단위를 크게 잡는 게 유리하고 편하겠지만, 나같은 1인 가구 입장에서는 그런 가게에 주문을 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튼, 이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는데, '배달 곱창의 디테일'을 경험했다.


 

 '아끼면 망하고 퍼주면 흥한다' 류의 문구야 어디서든 많아 보여서 별로 특별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이 가게만의 디테일이 3가지 있었다.

 첫째, 포장 용기. 대부분의 배달 곱창은 곱창 볶음을 큰 용기에 넣고, 그밖에 소스 등은 별도의 작은 용기에 넣어서 보내주었다. 하나씩 포장을 뜯는 것도 귀찮고, 무엇보다 먹은 후에 하나하나 디 씻고 치우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가게는 하나의 도시락 모양의 용기에 곱창 볶음과 소스, 피클을 다 넣었다. 덕분에 음식을 먹은 후의 뒤처리가 한결 수월했다. 음식을 먹는 순간만이 아니라 음식을 먹은 후의 시간까지도 배려한 사장님의 고민이 느껴져서 좋았다. 

 둘째, 소스. 보통 곱창 볶음을 시키면 볶을 때 들어가는는 빨간 소스만 주는 경우가 많다. 이 가게는 상큼한 마요네즈 소스도 같이 줬다. 보기에도 예쁘고 먹어 보니 입맛도 돋우는 게 괜찮았다. 기존의 정형화된 구성에서 변화를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심한 게 보여서 좋았다. 

 셋째, 마늘 후레이크. 마늘 후레이크를 곱창 볶음에 올려줬는데 이 역시 새로워서 신선했다. 새롭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기존의 것에 대해 고민했다는 뜻이니까. 남들이 하는 데서 한 끗의 새로움을 추가하는 것. 그런 게 디테일이 아니겠는가? 곱창 볶음에 필요한 건 획기적인 혁신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살짝 벗어난 조그마한 새로움이 아닐까? 배를 두두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돌이켜 보면 스케일에는 대체로 시큰둥헀지만, 디테일에는 언제나 끌렸다. 디테일은 관심과 관찰력, 성실함과 집요함의 종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테일을 살리고 그걸 설득력있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떤 분야에서건 먹고 살 길은 있다고 믿는다. 곱창 볶음 배터지게 먹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뭐라도 적어 봤다. 쓰고 보니, 이 글에는 한 끗의 디테일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다. 







도쿄의 디테일, 교토의 디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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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7-30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게 사장님의 디테일이 빛을 발하려면 그걸 알아주는 고객이 있어야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가게 사장님이 신경 썼어도 고객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 점에서 이 페이퍼는 매우 디테일이 살아있습니다. 그저 음식이 왔구나, 먹자 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앗 이건 여기에서 디테일을 살렸군, 하고 관찰하고 후기로 적어내는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디테일의 끝판왕인것입니다!!

얼음장수 2020-07-30 18:07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이야말로 디테일이 살아 있는 댓글인 것입니다!
 

 코로나가 내게 준 선물 중 하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고레에다 감독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선뜻 보게 되지는 않았다아마 다들 좋다고 하면 괜히 시큰둥해지는 청개구리 기질 탓일 거다시작하자마자 글이 옆으로 새지만 대학생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신간 소설집 한 권을 꼭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동기 한 놈이 나한테 내가 마음 먹고 있던 그 책을 거론하며 꼭 읽어야 된다, ‘안 읽으면 후회할 책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놀랍게도 나는 그 순간 10분 전까지 꼭 읽고 싶었던 그 책에 대한 열망이 완전히 사라졌다그리고 그 이후에도 안 읽었다고치고 싶은데 이것도 타고난 기질인 것인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방구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와 시트콤만 보다 보니까 좀 물리기도 하고 작품성있는 영상에 대한 욕망이 생기기도 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찾아보게 된 것. , 그래 봤자 겨우 <어느 가족>,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게 전부이긴 하다. (<걸어도 걸어도>, <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 <바닷마을 다이어라>, <태풍이 지나간 뒤>, <원더풀 라이프> 순서로 챙겨 볼 계획은 이미 세워뒀다. 신난다.) 겨우 세 작품이지만, 엄청난(진부하지만 정말 엄청났기 때문에 이 표현을 써야 겠다.) 영화들이었다. 사실, 처음 본 <어느 가족>을 보고 이미 감독님, 저는 이미 감독님의 포로가 되었어요. 엉엉.’하는 상태가 돼 버리긴 했다. 자극적으로 그릴 수 있는 장면을 담담하게 관찰해서 보여주고, 쉽사리 선악 판단을 내리는 대신 선악이 무엇인지를 보는 사람이 생각하게 하는 연출은 확실히 귀한 것이었다.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 30분은 압권이었는데, 나는 메모장에 새드 엔딩을 통해 희망을 말하는 이 능력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라고 적었다. (<어느 가족>을 안 본 사람이 있다면, ‘보세요. ‘보면 후회합니다! ㅋㅋ) <아무도 모른다><그렇게 아버지기 된다>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감동을 느꼈다. 이 사람은 정말 사려 깊은 사람이구나, 말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고민하게 만드는구나, 삶이란 언제나 다층적이고 입체적이라는 것을 그려내는구나, 좋은 영화 감독이기 이전에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누군가(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다음은? 그렇다. 관련된 책을 검색해 보는 거다.(유투브를 검색해서 인터뷰를 먼저 찾아봤음을 고백한다.) 혹시나 하고 검색해 봤더니 고레에다 감독이 책도 두 권을 낸 거다. 냉큼 사서 읽고 있다. <걷는 듯 천천히>부터 읽고 있는데, 책도 정말 좋다. 영화와 책이 똑같다. 다시 한번 느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서, 자기 자신으로 찍는구나.





 











 이 책의 머리말부터 아주 인상적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영화 작업을 하느라 오랜만에 집에 왔더니 어린 딸이 감독님을 좀 어색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게 좀 마음이 쓰이기도 하던 차에 다음날 영화 작업을 위해 집을 나서는데 현관까지 배웅 나온 딸이 또 와.”라고 한마디를 건넸다는 거다. 감독님은 이때 티는 못 냈지만 당황하고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거기에서 성찰을 이어나가고 피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가? 역시 시간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한 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서 야기가 뒤바뀐다는 선정적인 사건을 플롯에 넣으면 관객의 의식은 아마 부부가 어느 아이를 선택할까?’라는 질문 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너무 강하면, 그 이면에서 숨쉬게 마련인 그들의 일상이 소홀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게,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야기보단 인간이 중요하다. 이번에도 이런 관점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두 가족의 생활 속 디테일을 어떻게 쌓아가느냐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려 했다.

목욕을 마치고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어떤 식으로 말려줄까? 세 식구는 침대 위에 어떤 순서로 나란히 누워, 어떤 식으로 손을 잡을까? 아버지는 눈앞에 나타난 친자식의 무엇을 바음에 걸려 할까? 누구와 누구를 비교할까? (7쪽)


 영화를 왜 보면서 왜 감동을 받았고, 왜 감독님을 신뢰하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 것 같다. 덧붙일 말이 없다. 많은 영화(예술)가 삶을 그려내지만, 어떤 영화(예술)는 삶 자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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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한눈에 꿰뚫는 대단한 지리
팀 마샬 지음, 그레이스 이스턴 외 그림, 서남희 옮김 / 비룡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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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내 책상 한 켠엔 늘 지구본이 있었다. 책을 읽다가 지칠 때면 늘 지구본을 만지작거리며 상상의 날개를 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세계 일주를 한다거나, 뉴욕에서 근사한 모습으로 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거나 하면서. (지금의 나는 세계 일주는 개뿔, 뉴욕도 못 가봤다. ‘새로운 욕망(뉴욕?!)’만 늘었달까.) 그러다 슬그머니 중학생 형의 지리 부도책을 가지고 와서 통독하는 게 취미였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주요 강의 길이 순위는 기본이고 주요 자원의 매장량 순위까지도 외우는 특이한 어린이였다. 지구본을 보다 보니 지구상의 모든 게 궁금해졌고, 궁금해서 계속 읽다 보니 자연스레 외워졌던 것 같다. 지금의 나보다 초등학생 나가 더 똑똑하고 지적으로 활달했던 것 같다. 궁금하면 따지고 재지 않고 돌진.

 

몇 해 전에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푸코의 진자 실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그 실험이 진행된 프랑스 파리가 당연히북반구라는 것을 전제하고 전달을 했는데, 몇몇 학생이 수업 후에 찾아온 것이었다. “선생님, 왜 파리가 북반구인가요?” 마음 속으로는 그럼 너는 왜 너인 거니? 왜 나는 한국인인 거니? 왜 개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거니?’ 따위의 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지만, 그럴 수 있나. 당황한 기색을 감춘 채 잘 설명해서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어떻게 파리가 북반구에 있다는 걸 모를 수 있지?’라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 요즘은 초등 학생들이 지구본을 보지 않는 것인가? 아니, 지구본을 안 본다고 해도 스마트폰에 깔린 구글맵을 더 열심히 보는 거 아닌가? 아니, 다 떠나서 프랑스가 대충 어디에 있는지는 모를 수가 없지 않나? 지구본 선물하기 캠페인이라도 해야 되나? 세계 지리를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으로 정하는 정책이 필요한가?

 

이 책이면 충분한 것 같다. 어린이를 위한 책인데, 성인인 나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앞서 쓴 것처럼 나는 나름 어린 시절 세계 지리 매니아였다. 그런 나도 이 어린이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배우게 된 내용들도 좀 있다. 무엇보다 대충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세계 주요 도시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니, 조금 더 그곳과 (물론, 철저히 일방적이겠지만) 가까워진 느낌도 들었다. 지도와 그림이 많아서 술술 읽을 수 있고, 지정학에 근거한 세계사와 현재의 갈등 구도도 간략하게 다뤄준다.(어린이용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다만,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내 책상에는 지구본이 없다. 대신 가끔씩 그냥 구글맵을 켜서 여기저기 구경해 본다. 다음에는 어디를 가볼까 하고. 보다 보면 가고 싶은 데가 생기는 법이니까. 견물생심? 견지생심? 연애와 여행이 평소의 나와는 다른 나로 살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그래서 여행지에서 많은 연애가 시작되기도 하고, 연애를 하면 같이 여행을 가는 것 아닐까?) 믿는 나는 더 많은 여행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지도를 봐야겠다. 아차, 글을 쓰다 보니까 생각이 났다. 작년에 펀딩 사이트에서 여행자를 위한 세계 지도를 사놓고 집 한구석에 처박아두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는 지도를 붙이고 코로나19가 종식을 기원하면서 여행지를 골라봐야겠다. 지구본을 만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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