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이 너무나 쉽게 빠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설적이게도, 털은 분해가 잘 되지 않으며, 무덤에서 수천 년 동안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다. - 45쪽
역설은 대체로 이렇게 비극적이다. 살아 있을 때 영원히 남아만 준다면, 무덤에 가서 부패가 되어도 요만큼의 아쉬움도 없을 텐데. 검색창이나 유트브에 '탈모'를 검색해 본 사람은 이 마음을 알 거다. '탈모'에 관해서라면 나는 사실 절망적이다. 탈모가 보통 대를 한번 건너뛰어 나타난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나의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탈모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본 적은 없지만 친척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다. 보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장한 정신승리)를 근거로 아버지가 탈모이니 나한테는 유전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식은 안 낳겠다고 결심도 했다. 나의 굵고 풍성하고 유난히 검은 머리카락은 그 믿음을 지지하는 든든한 증거였다.
그러나 머리카락에 한해. 지금 가지고 있는 양과 빠지는 추이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 말은 적어도 머리카락에는 진실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풍성하던 머리칼이 어느 날 보니 휑해져 있는 거다. 정말, 그 당혹감이랄지 실망감이랄지 배신감이랄지, 그 불쾌한 느낌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거울이 거짓말하는 것 같은 그 기분. 물론, 여전히 나는 내 나이 평균 정도의 모발량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나의 비교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늘 어제의 나가 아니던가. 별 수 있나. 병원을 가봐야지.
병원에 갔더니 요즘은 20대 대학생들도 탈모 고민으로 많이들 온다며 나를 안심시키더니, 약을 권한다. 탈모약 관련한 여러 소문들은 사실상 썰에 불과하며 임상 보고에 따르면 활력 저하(ㅋㅋ 내가 만난 의사는 성욕 감퇴라는 말 대신, 활력 저하라는 표현을 선택했다!)는 100명 중 1명 정도 보고될 뿐이라고 한다. 임신 계획만 없다면 걱정없이 복용하라는 거다. 뭐가 문제인가. 그 길로 3개월치 처방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숱이 느는 것도 같았으며, 의사 말대로 '활력 저하'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이 나를 찾아왔다. 간염 진단. 찾아봤더니 사람에 따라 탈모약이 간에 부담을 줘서 나올 수 있는 증상이란다. 위염, 역류성 식도염고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한 달 간 병가를 냈고, 하루에15시간씩 잤다. 감염에 거리면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냥 먹고 자게 된다.
휴식 덕에 간염은 이겨냈다. 하지만, 남은 탈모약은 바로 버리지 못했다. 부엌에서 탈모약을 볼 때마다, 건강한 몸과 풍성한 모발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러다 나도 모르게 또 먹어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서, 얼마 전에 남은 약을 다 버렸다. 읍참마속! 다행히, 나의 모발량은 여전히 내 나의 평균을 유지중이고 더 줄어들고 있지는 않다.
시덥지 않은 이 글과는 별개로 <바디>는 정말 재미있다. 내가 학생 때부터 이런 책을 접했다면, 지금 같은 과학 무식쟁이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