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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알고 보니 나도 토포러?
오랜만에 만난 친구 녀석과 술 한 잔 하다 자연스레 군대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 왈, "이야~ 가마히 생각해보면 군대에서의 2년하고도 2주(본보기로 잘못 걸려서 영창 갔다왔단다)가 꼭 하룻밤 꿈만 같다." 부러움에 몸을 떨며 내가 대답했다. "난 내 군생활이 하룻밤 꿈으로 끝날 수 있는 거면 소원이 없다. 잠에 푹 빠져가 길다란 꿈 꾸고 일났는데 제대하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겠노."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아주 긴 잠을,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은 내가 제대하는 날인, 그런 긴 잠을 자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럴 때면 스트레스나 받지 말고 꾸역꾸역 살아가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이러다 내가 정말 이상해지는 건 아닐까 조금은 두려워하며.
정신병동에서 심토너를 구출하다.
그래서, "캐비닛"이, 반가웠다. 토포러들의 이야기를 읽는 순간 반가운 나머지 존재하지도 않는 그들이 왠지 가깝게 느껴졌다. 얼마나 현실이 팍팍하고 고통스러웠으면 자버렸을까. 아니 깨어나지 않아버렸을까. 걸쭉한 입담탓에 웃으면서 읽었지만, 그래서 내내 웃을 수 만은 없었던 토포러들의 이야기였다. 토포러 외에도 시간을 잃어버리는 타임 스키퍼들,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사랑하는 여자의 곁에 있기 위해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 기억을 조작하는 메모리 모자이커, 자신이 온 별과 통신을 하기 위해 생업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외계행성과의 통신에 투자하는 사람들 등 이 도시의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기이한 심토너들의 이야기가 13호 캐비닛에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이들은 정상성이라는 범주에 의해 낙인찍힌 현대의 낙오자들이다. 이들은 체제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변두리에 위치 지워진 군상들이며, 현실에서는 대개 '정신병동'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수용되는 존재들이다. 작가는 현실의 정신병동에 있는 심토너들을 13호 캐비닛을 통해 바깥으로 끌어온다.
심토너를 인정하는 한가지 방법, 나
백칠십팔 일 동안 사백오십 박스의 캔맥주를 마신 사람이 있다. 조사를 하나 바꾸는 게 좋겠다. 백칠십팔 일 동안 사백오십 박스의 캔맥주'만' 마신 사람이 있다. 할부로 찾아오지 않는 불행에 이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캔맥주를 마시고 깡통을 찌그러뜨리는 일 뿐이었다. 이 남자, 다시는 찾아오기 힘든 운 덕에 모 공기업의 연구소에 입사하게 된다. 입사의 기쁨도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 말곤 할 일이 없던 무료함 때문에 회사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권박사의 연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연히 13호 캐비닛을 발견하고 순전히 무료함 때문에 1에서 9999까지의 숫자를 돌리는 무모함으로 13호 캐비닛을 열고 심토너들의 기록을 보던 나는 권박사에게 발각돼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권박사의 조수로 일하며 수많은 심토너들을 겪으면서 심토너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묘한 애정을 보여주는 나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한다. 권박사가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란 심토너들을 따뜻하게 보관하고 기록할 수 있는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또 하나의 심토너라 볼 수 있는 손정은을 대하는 태도나, 중간에 잠깐 드러나는 나의 학창 시절 때의 모습은 심토너를 인정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각자의 시계를 차고 함께 지하철을 타기
이제, 심토너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기본적으로 심토너들이 현대문명의 부산물이며 따라서 우리모두가 함께 끌고 가야 할 존재임을 암시한다. 어쨌든, 우리는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으니 말이다. 동시에 작가는 섣불리 심토너들을 이해하겠다는 태도는 경계한다. 결국, 세계란 각자의 시계를 찬 사람들이 각자의 시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각자의 시계를 존중해주는 일, 각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밖엔 없다. 내가 요새와도 같은 섬에 가서 13호 캐비닛의 보관자이자 기록자로 남게 된다는 결말은 이러한 작가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언수가 생각하는 문학의 알파와 오메가는 기록일까. 기발한 상상력을 걸쭉한 입담으로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김언수라면 뭔가 더 있을 것 같다. 왠지 정이 가는 김언수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