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믿어주는 일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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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가만히 표지를 바라보았다. 앙리 마팅스의 포옹이었다.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 『그냥 믿어주는 일』이란 제목과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생명의 그릇>이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들었다. 제목을 바꾼 출판사의 의도가 있겠지만 <생명의 그릇>이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냥 믿어주는 일』는 미야모토 테루가 청년 시절이었던 30년 전 1983년에 펴낸 에세이다. 저자는 <생명의 그릇>이라는 제목을 거창하다 말하지만 생명을 담은 그릇은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생명을 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대단하고 거장 하지 않은가.


이 책에는 미야모토 테루가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어떤 성향을 지닌 작가인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분위기, 어떤 기저라고 할까. 쉰 살 가까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를 좋아하며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곳곳에서 전해진다. 그럼에도 자신을 사랑했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들려주는 글에서는 애틋한 그리움이 전해진다. 아버지란, 부모란 그런 존재니까.


수록된 55편의 에세이는 일상의 기록을 다룬 짧은 메모나 일기 형식부터 발표한 소설이나 구상 중인 소설을 소재로 사회와 삶에 대한 미야모토 테루의 생각이 담겼다. 1부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광고 회사에 다녔던 일을 다루고 2부는 일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칼럼 형태가 많고 3부는 작가 데뷔 후 이야기로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연인을 들려준다. 그가 바라본 일본 사회, 문학,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준 평론가와 편집자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감사를 제때 표현하지 못해 한탄하며 소설가는 대단한 직업이 아니라는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경마장에 다니던 아버지,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온 어머니와 함께 찾은 유명 사찰에서 느꼈던 우울감, 특정 인물을 마주하면 나쁜 일이 생겨 일부러 피하려 했던 시절, 소설가가 뒤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실패만 맛보던 시절, 기르던 개의 죽음을 통해 절대 개를 기르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계속 개를 기르고 사랑한 개들의 기억을 간직한 이야기. 두 아들에게 사랑할 대상을 주고 싶고 생로병사라는 엄연한 법칙을 자연스레 인식시키고 싶어 개를 데리고 왔다고 말하는 미야모토 테루. 결핵에 걸려 2년 정도 요양을 했을 때의 심경은 짐작조차 못하겠지만 그 시간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삶에 대한 의지를 결연하게 했다는 게 전해졌다.


55편의 에세이 가운데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책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큰돈을 지불해 사주신 문고판에 대한 것으로 열 권씩 끈으로 묶어 팔고 있었는데 어린 미야모토 테루는 주인이 묶어 놓은 열 권의 다발을 다 풀고 좋아하는 열 권을 고른 후 다시 묶었다고 한다. 그 열 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열 권의 문고본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몇백, 아니 몇천 명의 인간이 품은 괴로움과 기쁨을 알았다. 몇백, 몇천 개의 풍경으로부터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몇백, 몇천 개의 작은 대화로부터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52~53쪽)


나는 아무 장점도 없는 인간이고, 머리도 나쁘고 완력도 없으며, 제멋대로에 겁쟁이에 질투가 심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내가 조금은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살짝 낮춰 대답할 것이다. 대답한 순간 나의 마음에는 틀림없이 그 열 권의 손때 묻은 문고본 다발이 스쳐갈 것이다. (53쪽)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미야모토 테루의 글엔 다정함이 있다. 그 다정함이 조금은 부끄럽고 수줍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진다. 삶을 사랑하는 뜨거움 같은 게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려는 노력이 있다. 단풍나무를 보며 금수(錦繡)라는 말에서 자신의 생명 또한 금수인듯하다는 미야모토 테루의 아름다운 문장이 강렬하고 짙은 울림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올해도 또다시 단풍의 계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단품은 나에게는 이제 식물의 잎이 단순히 변색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이, 끊임없이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며 뿜어내는 금錦의 불꽃이다. 아름답다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 있는 자연 현상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나다. 그것은 생명이다. 오락, 야망, 허무, 사랑, 증오, 선의, 악의, 그리고 한없는 청청함까지 남몰래 지닌, 혼돈한 우리의 생명이다. 어느 시기, 어느 땅, 어느 경우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모두 금수의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205~206쪽)


30년이 지난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저마다 금수의 나날을 살다는 걸 확인한다. 때로 우리를 흔드는 모든 감정과 우리를 채우는 모든 감각의 숭고함을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것, 그 모든 시간이 금수의 나날이라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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