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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해마다 겨울에 내리는 눈을 다르게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겨울이니까 내리는 눈이라 여겼다. 그것이 하나의 감정으로 스며들고 새겨질 수 있다는 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통해 알았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눈이 지닌 고유한 감정을 생각한다. 눈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을 하얗게 덮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사라지고 나서야 고혹적인 눈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니 눈 스스로에게는 참 서글픈 일인지도 모르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7쪽)
눈에 대한 관용구처럼 되어버린 첫 문장은 어떤 이미지를 선물한다. 눈으로 둘러싸인 하얀 밤을 말이다. 마치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눈을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둘러말하지 않겠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매혹적인 문장에 반하고 만다. 어쩌면 주인공 시마무라가 잊지 않고 찾는 이유도 게이샤 고마코가 아닌 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다.
유산 덕분에 일에 매이지 않고 유유자적 삶을 즐기는 남자 시마무라. 그가 관심을 두는 건 서양무용이다. 그의 앞에 두 여자가 있다. 게이샤 고마코와 신비롭고 순수한 요코. 두 여자 사이도 한 남자가 있다. 고마코는 남자의 약혼자이고 요코는 애인이다. 남자의 존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와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들의 관계는 복잡하기보다 미묘하다.
시마무라는 온천을 찾을 때마다 고마코를 부른다. 고마코에게는 아픈 약혼자가 있지만 그에 대한 사랑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마무라를 향해 적극적이다. 누구도 관능적인 매력으로 채워진 그녀를 거부할 수 없다. 게이샤로 살아가는 단조로운 삶에 시마무라는 신선한 자극인지도 모른다. 모든 걸 오픈할 수밖에 없는 작은 온천 마을에서 고마코는 시마무라와 비밀의 만남을 즐긴다. 그건 고마코만의 사랑 방식이었다.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쪽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75쪽)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에게 빠져들면서도 열차에서 연인을 지극히 간호하던 요코를 지울 수 없다. 터널을 경계로 서로 다른 세상이 되는 것처럼 고마코와 요코는 그렇게 달랐다. 고마코와 요코의 관계를 알고 나서는 더욱 궁금하다. 고마코를 언니라 부르며 소소한 심부름을 하는 요코를 향해 마음이 기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시마무라의 직접적인 감정 표현은 찾을 수 없다.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내리고 쌓이는 눈처럼 말이다.
다시 온천에 온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찾는다. 약혼자는 죽었고 고마코와 요코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눈에 갇힌 마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자발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고마코와 요코는 눈이 되려는 것 같았다. 다른 세상, 넓은 세상을 향한 갈망은 없었고 둘은 눈처럼 살려는 듯 보였다. 예년과 다르지 않게 시마무라는 혼자 마을을 산책한다. 자신과 동행하기를 바랐던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향해 애교 담긴 원망을 쏟던 찰나, 영화 상영을 하던 고치 창고에서 불이 난다. 그곳에 요코가 있었다. 한순간 녹아버리는 눈처럼 사라져버렸다.
‘여자의 몸은 공중에서 수평이었다. 시마무라는 움찔했으나 순간, 위험도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세계의 환영 같았다. 경직된 몸이 공중에 떠올라 유연해지고 동시에 인형 같은 무저항, 생명이 사라진 자유로움으로 삶도 죽음도 정지한 듯한 모습이었다.’ (149~150쪽)
시마무라에게 고마코와 요코는 눈(雪)이었다. 손에 닿는 순간 차가운 감촉과 함께 사라지는 눈이 아니라 뜨겁게 스며드는 눈이었다. 눈(雪)이라는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 위에 그린 사랑과 욕망의 풍경화는 이제 마지막 붓질을 남겨 두었다. 새로운 눈이 내려 다른 그림을 그릴지 혹은 강렬한 태양의 빛으로 눈을 녹여버릴지 알 수 없다. 설국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