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닮은 도시 - 류블랴나 걸어본다 4
강병융 지음 / 난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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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곳곳에 빨간 장미가 보인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니 초록의 여신이 아파트를 보호하는 듯한 풍경이다. 저절로 기분도 맑아지고 좋아진다. 바라만 봐도 좋은데 그 향기를 맡으며 산책하는 건 더욱 신나는 일이다. 곁에 좋은 사람과 함께 걷는다면 정말 즐거울 것이다. 강병융의 『아내를 닮은 도시』가 그렇다. 말 그대로 걷는 즐거움, 산책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처음 접하는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발음도 어려워서 몇 번을 읽는다)로의 초대는 매혹적이다. 『아내를 닮은 도시』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류블랴나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남자, 아내를 지독히 사랑하는 남자가 들려주는 도시 안내는 달콤하다. 아, 갈 수 없는 도시의 유혹이라니. 류블랴나의 지리적 위치나 관광하기 좋은 곳은 어디며 어떤 나라인지도 중요하지만 그곳의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곳을 궁금하게 만든다. 

 

‘길을 걷고 싶게 만드는 건 멋진 포장이 아니다. 화려한 조명도 아니다. 때론 그저 소소한 이름만으로도 그 길이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 단순하더라도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면 말이다.’(42쪽)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을 위한 다정하고 세심한 그곳 사람들의 배려나 자신을 믿고 타국 생활을 결정한 아내와 딸에 대한 애정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리고 하나 더, 강병융의 유머와 재치가 가득한 글이다. 친한 친구에게 우리 동네에 놀러 오라는 편지를 받은 기분이랄까. 이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삭막해지는 시대, 류블랴나의 작은 아파트 리프트가 궁금하다. 나도 그 안에 ‘안녕’이란 메모를 남기고 싶다.

 

 리프트 안에 그들이 두고 간 ‘안녕’들이 남아 있다. 리프트 안에 그들이 뿌려둔 ‘예의’들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인지 리트프를 탈 때마다 진짜 몸과 마음이 안녕한 느낌이 든다. 그(들의) 작은 예의가 저녁 산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때로는 나의 출근길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어준다. 어쩌면 사람의 인연이 그 ‘예의상’에서 싹트는 것은 아닐까?’ (54~55쪽)

 

 ​검색창에 류블랴나를 써넣는다. 처음에는 생경했던 이름이 이제는 익숙하다. 올여름에는 류블랴나 강과 류블랴나 성을 상상하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다. 길고 크지 않은 강에 놓인 다리와 여름밤 영화를 상영하는 성이라니. 혼자서 다리는 건너도 좋겠고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며 투명한 밤을 보내도 황홀하겠지. 류블랴나는 작고 아담하다. 크고 화려한 건물 대신 삶이 있는 묘지도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란히 누워 있는 먼 훗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이야기하는 작가의 마음이라니.

 

 

 

 

 

 매일 걷는 길을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위해 바닥만 보고 걷는 길이 아닌 길을 걸었던 적이 언제였나 떠올려본다. 목적을 위한 걷기가 아닌 누군가와 헤어지기 싫어 반복해서 같은 길을 걸었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걷기 좋은 계절이 사라지기 전에 산책의 즐거움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류블랴나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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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생물학 수업 - 생물학자 장수철 교수가 국어학자 이재성 교수에게 1:1 생물학 과외를 하다
장수철.이재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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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미있게 생물을 배울 수 있는 책. 과학은 어렵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책이다. 학생들이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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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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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에 대해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좋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자신 있게 권하려면 책에 대해 객관적 시선을 가지고 평가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두루뭉술하게 좋다 말하는 건 애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장이 아름답다거나 작가의 사고가 신선하다거나 쉽고 재미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작가가 잘 생겼다거나(?) 구체적인 언급이 필요하다. 손홍규의 『다정한 편견』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는 이미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이다. 2008년 11월부터 2012년 5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손홍규의 로그인>이라는 칼럼을 통해 만난 사람이라면 말이다. 매 꼭지마다 원고지 4.5를 지켜야 하는 글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는 가감 없이 줄여야 하고 반대의 경우는 머리에 쥐가 나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 적절한 분량에 전해야 할 메시지를 담아냈는 것, 역시 대단하다.

 

 손홍규의 길지 않은 글을 읽으면서 지난 2008년~2012년의 시간을 현재처럼 실감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회구조와 인식, 그리고 정치인과 권력의 높은 벽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벽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우리의 모습도 여전하다. 그렇다고 손홍규가 다룬 주제가 사회문제나 문학이 전부는 아니다. 유년 시절의 소소한 기억들과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 서울살이의 버거움은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 친근하다. 이런 글을 통해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뜬눈으로 겨울을 지내는 이유는 봄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다. 그러므로 봄은 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봄이 오는 소리는 사람의 발소리를 닮았다.’ (107쪽)

 

 우리가 사람을 기다리는 게 봄이라는 계절뿐일까. 각다분한 삶 속에서 항상 그립고 힘이 되는 이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보여주고 진심을 나눌 사람이 줄어드는 세상을 사는 게 가슴 아프다. 그이 글을 읽노라면 생각이 많아진다. 잘 사는 게 정말 정말 어려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개혁을 위한 작은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로 인해 불안과 공포를 먹고사는 요즘 손홍규의 문장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타인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지키고 살아야 한다. 시련이 없을 때 우아해지기란 퍽 쉽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우아해지기란 쉽지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만의 원칙을 허물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뇌하는 그대가, 원칙을 지키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희생을 감내한 그대가 누구보다 우아하다.’ (153쪽)

 

 부족한 게 아주 많겠지만 이 정도면 손홍규의 『다정한 편견』에 대한 객관적인 애정이 드러났을 거라 믿고 싶다. 주관적인 애정이 아닌 객관적인 애정으로 받아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대도 이 책을 매만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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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힘
원재훈 지음 / 홍익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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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이해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따로 두어야 할 테니 적당한 분량의 고독을 감당해야 한다. 함부로 타인의 영역에 나를 들여놓지 않고 나의 영역에도 섣불리 타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삶을 풍부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54쪽)

 

 고독이란 말을 떠올리면 쓸쓸해진다. 세상에서 혼자 분리된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건 고독에 대한 편견이다. 고독을 혼자 있는 시간으로 바꾸면 다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혼자 심심하지 않느냐고 혹은 혼자서 뭘 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주변 신경 쓰지 않고 음악을 크게 들어도 좋고 책을 읽는 일도 나쁘지 않다. 좋은 말로 사색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의 고수는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일도 기쁨을 주지만 때로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힘겨운 하루를 마치고 혼자 일기를 쓰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원재훈의 <고독의 힘>이 반가웠다. 사막에 홀로 핀 선인장을 떠올리는 고독의 이미지와 함께 들려주는 고독에 대한 원재훈의 이야기는 평온하고 편안하다.

 

 하루 종일 SNS를 통해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는 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혼자라는 두려움에 피하고 싶은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그렇듯 우리는 함께 있어도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원재훈은 고독에 대해 일방적으로 정의를 내리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문학, 그림, 영화, 철학을 소재로 그 안에서 고독을 발견하고 즐기는 방법을 말해준다. 이 책의 다른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고독과 친구로 지내며 시로 노래한 릴케, 청년 시절의 고독을 무기로 삼은 네루다, 운명과 투쟁하듯 산 프리다 칼로, 27년 동안 감옥에서 고통의 시간을 견딘 넬슨 만델라의 생을 통해 고독이 맺은 열매가 얼마나 빛나는지 마주한다. 스스로 고독을 택해 자신만의 방을 만들고 평생을 문학과 예술로만 채운 카프카, 빈센트 반 고흐, 소로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고독의 힘을 배우고 키우라 말한다.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실 고독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대자연은 원래 고독하기 때문이다. 묵직하게 홀로 서 있는 산, 묵묵히 흐르는 강물, 장엄한 일출과 일몰 등 대자연이라는 대형 퍼즐의 조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고독한 모습으로 홀로 존재하고 있다.’ (90쪽)

 

 원래 고독한 대자연이라니, 어쩌면 인간도 원래 그런 존재는 아니었을까. 고독한 존재인 인간 하나하나가 서로 만나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질서를 찾아가듯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혼자라는 말에 담긴 절망과 좌절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혼자만의 시간이 쌓여 삶의 자양분이 된다. 이제 고독을 껴안은 당신은 혼자라서 외롭다는 말 대신 혼자란 시간에 충만해진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고독과 대면할 용기와 마음이 있다면 거기가 감옥의 독방이건 깊은 산속의 암자이건, 혹은 태평양 한복판에 있는 섬이건 영혼은 드넓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런 여유가 생기면 마침내 타인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함께 어울리는 이웃이 된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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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0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다. 저는 이 말을 하며 모순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충분하지가 않아서 라고....

자목련 2015-06-09 10: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 역시 설명하기 어렵지만요...

yureka01 2015-06-0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이런 생각이 납니다.

자목련 2015-06-09 10:42   좋아요 0 | URL
고독과 외로움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 같아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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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발견하니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62쪽)

 

 ‘당신이 보낸 편지’란 글 속에 담긴 어떤 애정을 눈치챈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편지를 기다렸다는 말은 없지만 말이다. 편지란 그런 것이다.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그 시각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긴장으로 팽팽한 시간. 메리 앤 섀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를 읽는 내내 그 생생한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1월 런던에 살고 있는 작가 줄리엣은 채널제도 건지 섬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도시라는 남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는 줄리엣이 소장했던 책을 갖고 있다며 작가의 다른 작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정중한 부탁이 담겼다. 한 권의 책으로 우연하게 시작된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줄리엣은 새로운 소설의 소재를 찾는 중이었고 도시가 가입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줄리엣은 도시에게 독일군이 점령한 건지 섬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그 내용을 글로 써도 좋은지 묻는다.

 

 도시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북클럽 회원 들은 하나 둘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내고 저마다의 사연을 들려준다. 그 중심엔 간호사였던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섬 주민의 생활과 식량을 통제하던 독일군을 피해 돼지구이 파티를 열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던 중 통금에 걸리자 엘리자베스가 독일군에게 문학회라고 둘러댔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모임이 진짜가 된 것이다. 작은 섬 주민의 평범한 일상은 전쟁으로 붕괴되었지만 독서모임을 통해 서로를 위로한다. 책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외부와 단절된 5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소설은 도시와 줄리엣이 주고받은 편지처럼 섬사람들과 줄리엣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전쟁 당시의 상황과 그들이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제가 왜 브론테 자매를 높이 평가하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전 열정적인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저 자신은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 없지만 이제 상상할 수는 있어요.《폭풍의 언덕》도 처음에는 별로였는데, 캐시의 유령이 뼈만 앙상한 손가락으로 창문 유리를 긁어대는 장면에서 멱살이 잡힌 것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히스클리프가 황무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서 맴돌더라고요.’ (84쪽)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렇게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책에는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책을 만났으니 이토록 즐거운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이를테면 이런 부분.

 

 제가 고른 책은 《셰익스피어 선집》이었습니다. (중략) 제가 보기에는 그는 말을 아낄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찬탄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 바로 이겁니다. 독일군이 상륙하던 날에도 이 문장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을 실은 비행기가 연달아 오고 부두에도 배가 쏟아져 들어오는 걸 바라보던 그때 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빌어먹을 놈들, 빌어먹을 놈들 하고 속으로 되뇌는 것뿐이었습니다.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라는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가 상황에 맞설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심장이 신발 아래로 가라앉듯 축 처져 있을 게 아니라요.’ (99~100쪽)

 

 직접 만날 수 없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줄리엣과 사람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줄리엣은 건지 섬을 방문한다. 소설을 위한 자료 조사가 표면적 목적이었지만 줄리엣은 그들의 삶을 만나러 온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딸 킷, 어떤 주제라도 웃음을 안겨주는《폭풍의 언덕》의 열혈 독자 이솔라, 타인의 슬픔을 진심으로 안아주는 과묵한 남자 도시와 160통이 넘는 편지글이 아닌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알 수 없는 거대한 환희를 느낀다. 

 

 누군가는 소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잔혹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느끼는 전쟁의 공포는 짐작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가 줄리엣과 도시의 연애소설로 읽혔다. 둘을 이어준 한 권의 책과 함께 말이다. 주인공 줄리엣이 작가가 아니었더라도 편지로 시작된 우정은 사랑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내밀한 고백으로 편지만큼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나만을 위한 편지를 받은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소설이다.

 

 ‘런던에서 살기 싫어. 나는 건지 섬을 사랑해. 엘리자베스에 대한 책을 끝낸 후에도 여기 머무르고 싶어. 킷이 런던에서 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 항상 신발을 신어야 하고, 뛰고 달리는 대신 걸어 다녀야 하고, 구경할 돼지도 없잖아. 에번과 엘리를 따라 고기잡이를 하러 갈 수도 없고, 아멜리아를 따라 여기저기 놀러 다닐 수도, 이솔라와 함께 물약을 만들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도시와 함께 산책하고 놀고 나들이할 수 없잖아.’ (399~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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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6-05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따스한 책이었어요. 자목련님 어느덧 유월이에요. 싱그러운 날 되세요~

자목련 2015-06-05 21:21   좋아요 0 | URL
이런 사귐이 있다는 게 정말 아름답지요. 장미보다 붉은, 그런 6월 시작하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