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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언제나 가장 무서운 건 귀신이나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옮긴이의 말 중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아는 얼굴을 만난다면 무조건 그를 믿고 따라갈 것이다. 의심 따윈 필요 없다. 우선은 그곳에서 벗어난 뒤 생각해도 늦지 않다. 불안이 사라진 후에야 그는 왜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생각한다. 설령 그가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도 말이다. 톰 롭 스미스 장편소설 『얼음 속의 소녀들』의 시작이 그랬다. 혼돈의 연속이었다.
엄마의 고향인 스웨덴으로 은퇴 이민을 간 부모님이 차례로 전화를 해서 상반된 이야기를 꺼낸다. 아버지는 엄마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한다. 스웨덴으로 출발하기 위해 공항에 도착한 다니엘에게 엄마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버지의 말을 믿지 말라며 곧 영국에 도착할 거라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엄마는 다니엘에게 스웨덴에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자신은 절대 미치지 않았으며 아버지도 범죄자들과 한패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람은 고립됐다는 사실이 의식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변하게 된다. 처음엔 안 그렇지만 서서히, 단계적으로, 그러다 어느새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돼. 그러고는 하루하루 국가도 없고, 바깥세상에 치이는 일도 없고, 서로에게 각자의 의무를 일깨워주는 존재 없이,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이나 근처에 이웃도 없이, 아무도 우리를 들여다보지 않은 채, 영원히 우리는 보는 눈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거지.’ (69쪽)
다니엘이 알고 있던 엄마와는 달랐다. 많이 말랐고 초췌한 모습으로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 말대로 정신병원에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엄마는 자신이 몰랐던 부모님의 경제 상황을 시작으로 스웨덴에서 시작한 농장 생활에 대해 상세히 들려준다. 엄마의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모아 분신처럼 지니고 있었다. 사진 몇 장, 잘라진 종이와 서류,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자수 조각을 소중하게 다뤘다. 엄마는 뒤이어 도착한 아버지를 피해 호텔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주변을 살핀다.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서 입양아에 대한 폭행과 폭력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를 모두 묵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라진 흑인 소녀 미아를 찾아야 한다고 애원한다. 결국 다니엘이 스웨덴의 농장에서 직접 방문하여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서야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
만약 내가 다니엘이라면 엄마의 말을 무조건 믿을 수 있을까. 낯선 환경과 심리적 스트레스 때문에 엄마의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아버지의 말이 진실은 아닐까. 언제부턴가 서로에게 모든 걸 말하지 않고 살아온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믿음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다니엘이 단 한 번도 농장을 방문하지 않은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여유로운 노년이 아니라 빈털터리가 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농장을 선택한 부모님과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해 연락을 미룬 다니엘.
그랬다. 이 소설은 엄마가 말하는 범죄의 사실 여부에 대한 호기심으로 위장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신이 가져오는 위험한 결과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빽빽한 숲과 호수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스웨덴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불안한 심리 묘사가 압권이다. 신화 속 트롤 괴물에 대한 이야기까지 흥미롭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추리와 심리라는 두 마리 토기를 잡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소설의 첫 상황은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이라니 더욱 놀랍지 않은가. 폭설이 계속되는 이 겨울 차가운 호수를 둘러싼 장엄한 숲으로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만큼 겨울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