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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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살아갈수록 잘 모르겠다.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데 참 어렵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잘 사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기도 하고 사는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서다. 그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바람을 버릴 수는 없다. 조남주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힘겨운 삶을 버티며 나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시간을 생각한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수록된 8편의 소설이 그랬으니까. 소설 속 여성 화자는 모두 우리였으니까. 과거의 우리, 지금의 우리, 미래의 우리 말이다. 어쩌면 모두 여성 화자라서 우리의 이야기로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한 번쯤 느꼈을 차별의 시선과 참아온 분노. 그녀들의 상실과 슬픔을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내 것 같아서 함께 공감하고 기도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과거, 혹은 누군가의 미래와 겹쳐지는 「매화나무 아래」에서 느껴지는 차분한 슬픔도 그러했다. 치매에 걸린 큰언니를 만나러 요양원에 가는 화자 ‘동주’가 들려주는 큰언니 ‘금주‘, 작은언니 ‘은주’의 이야기. 세 자매로 지냈던 시절, 그리고 남은 큰언니와 동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삶의 고단함, 이별을 준비하는 가느다란 시간을 생각한다. 그 시간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 연약하고 위태롭게 삶과 이어진 시간들. 사는 건 무엇일까. 소멸하는 생의 마지막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조금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히 이런 문장을 읽는다. 소설 속 세 자매도 눈이 되었다가 꽃이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일 것이다.


봄이 오면 눈들은 꽃이 되겠지. 새하얀 꽃들이 늙은 나무를 뒤덮으면 마르고 갈라진 나무껍질은 보드라운 꽃잎에 가려 보이지도 않겠지. 벅차게 흐드러진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며 코끝에 매화 향이 날라오는 듯했다. 바람이 불면 새하얀 꽃잎들이 나비처럼 팔랑일 것이다. 그러다 못 이기고 한꺼번에 떨어져 함박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매화나무 아래」 중에서)


꽃이 되는 인생을 생각하면 혼란스러운 지금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와 똑같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지지하는 마음,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해낼 수 있다. 화자인 소설가가 악플러를 고소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오기」는 그런 마음을 말한다. 이해와 공감, 단단한 연대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 이 단편을 읽으면서 여성 서사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당혹스럽고 불편하고 아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부장제와 수없이 나를 훑고 간 불쾌한 시선과 모욕적인 언어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 같은 상처들. 그래서 ‘오기’란 제목이 ‘다짐’, ‘결속’처럼 다가온다. 화자를 응원하는 마음이 자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사랑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나’가 아닌 상대에게 모든 걸 맞추는 「현남 오빠에게」나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는 수많은 폭력과 폭행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는 「여자아이는 자라서」 속 딸을 둔 화자에게도 이어진다. 나를 변호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목소리. 인식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그건 단순하게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유쾌하게 풀어낸 「미스 김은 알고 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 단편을 너무 재밌게 읽었지만 가장 씁쓸하고 속상했다. 직장에서 뭐든 다 해내는 ‘미스 김’의 존재가 과거 우리의 자매였고 지금 20~30대 여성 같아서.


얼마나 힘들었냐고 다독이면서도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걸 알려주는 소설들이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모녀의 이야기「오로라의 꿈」에서도 마찬가지다. 육아로 힘들지만 복직한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딸의 속상함을 알지만 워킹맘인 친정 엄마도 손주를 봐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지금껏 지켜온 자리, 여유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과 육아를 저울질하게 하는 만드는 건 누구일까. 가족과 사회 그 안에서 여성의 자리는 너무도 작고 위태롭다.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며 삶을 이어가는 여성들이다. 엄마와 딸이 아닌 동등한 여성으로 서로를 지켜봐 주는 「오로라의 꿈」 속 모녀는 애처로운 우리의 모습이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오로라의 꿈」 중에서)


우리가 쓰는 삶, 우리가 살아내는 삶을 생각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삶.10대 어린 소녀부터 노년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고군분투는 나의 일상이다. 웃고, 울고, 화내고, 속상한 마음을 다시 다잡고 나아가는 우리와 너무도 닮았서 그녀들을 지지하게 된다. 열심히 잘 해왔다고, 잘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미 충분하다고. 그리하여 소설 속 그들처럼 우리의 시간이 먼 훗날 어떻게 채워질까 기대하며 오늘을 더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서로를 응원하며 좌절도 절망도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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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10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2관王 추카 합니다
9월 두번째 주말 멋지게~*

자목련 2021-09-13 12: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스콧 님도 축하드려요.
즐거운 한 주 시작하세요^^

mini74 2021-09-10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1-09-13 12:05   좋아요 0 | URL
미니 님도 축하들비니다.
항상 좋은 글 잘 보고 있어요^^

독서괭 2021-09-10 16: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으로 당선되었네요. 자목련님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9-13 12:06   좋아요 0 | URL
독서괭 님 축하드려요!
조남주의 단편집 더 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 ㅎ
맛난 점심 드세요^^

새파랑 2021-09-10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신기하게 같은 책이네요~!! 축하드려요 😆 2관왕~!!

자목련 2021-09-13 12:07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 감사해요. <벨아미>저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어요.
아, 고전은 어렵고 멀기만 행, ㅎㅎ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1-09-10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1-09-13 12:07   좋아요 0 | URL
저도 축하드려요, 그레이스님 ^^
평온한 날들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9-10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9-13 12:0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즐겁고 건강한 9월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1-09-13 12:08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초딩 2021-09-11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관왕 축하드립니다~ ^^
좋은 날 되세요~

그레이스 2021-09-13 12: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1-09-13 12:09   좋아요 0 | URL
초딩 님, 저도 축하드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1-09-1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님! 2관왕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피너츠 북엔드 - 스누피,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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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서, 기분이 좋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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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12 2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누피의 고요한 쉼을 흔들고 말 붙이고 싶어져요. 넘 귀여워서요. ^^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게 하는 그림 이네요

자목련 2021-08-13 15:32   좋아요 1 | URL
그쵸? 깨워서 나랑 놀자고 말하고 싶어요!

얄라알라 2021-08-12 2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그림이 아니라 북엔드였네요^^

자목련 2021-08-13 15:32   좋아요 0 | URL
북엔드 계속 사고 싶어요 ㅎ

scott 2021-08-13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누피는 💓입니다 ฅ́˘ฅ̀

자목련 2021-08-13 15:57   좋아요 1 | URL
사랑이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ㅎㅎ
 

아직까지는 열어둔 문들을 닫지 못한다. 밤에도 낮에도 새벽에도 문은 열려 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열려있다. 그 틈으로 모든 소리가 들어온다. 복도를 지나는 옆집 사람들, 물건을 배달하는 택배 기사님, 복도를 내달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덤이다. 그 모든 게 즐겁게 들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소음처럼 다가온다. 내가 그렇게 듣기 때문이다. 위층 어느 집은 같은 종종 피아노를 친다. 그 소리가 잘 들릴 때가 있고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잘 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꽤 성실하게 치는 것 같다.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어떤 날은 그냥 그렇게 들린다. 요란하게. 우렁차게 들리는 게 아니라 요란하게.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소리에 조금 예민하고 조금 불편하다. 그건 내 기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문자의 알림에도 그렇게 반응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안전 안내 문자를 받는다. 폭염, 코로나 백신 접종에 관해서다. 그 안에는 정보와 안전을 위한 정보가 담겨 있다. 아무렇지 않게 확인 후 삭제한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대한 안내를 받으면 쉽게 삭제할 수 없다. 더 자세히 보고 저 오래 본다. 정보와 안전을 안내하기 위한 목적인데 불안을 전달한다. 그런 이유로 주변에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지 않는 이들도 있다. 운전이나 주요 업무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모든 게 변화한다. 그런 기분을 변화시키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우연하게 듣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어떤 말들이나 노래, 친구가 보낸 풍경 사진(거의 자연이다. 나이가 든 증거라고), 소소하게 주문한 물건들. 어제 그런 물건이 도착했다. 책을 주문하면서 주문한 북엔드. 고백하자면 내게는 북엔드가 많다. 차고 넘친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걸 주문했는지.





하지만 어떠겠는가. 그 당시의 기분은 높낮이로 표현하자면 낮았고 나는 그때 스누피를 발견했다. 사용할 수 있는 쿠폰도 있었으니 구매할 수밖에. 결과적으로는 괜찮은 주문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실용성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은 정도. 북엔드 말고 이런 소설도 기분을 바꿔준다. 최은영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과 넬라 라슨의 『패싱』, 두 권의 소설이다. 


8월의 소설이 되겠지. 두 소설 모두 여성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밝은 밤』은 단편소설에서 느꼈던 최은영의 분위기를 크게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할머니, 할머니의 엄마, 그들이 등장하는 여성 서사가 아닐까 싶다. 아직 읽기 전이라서.


한동안 스누피를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고마워, 스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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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8-12 17: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스누피 귀여워요 ㅎㅎ 작가님 중에 명품가방 위에 스누피 누워 있는 걸 그리시는 분 있던데 ㅎㅎ 그래도 역시 스누피는 빨간 집 위에 누운게 제일 예쁜거 같아요 *^^*

자목련 2021-08-13 15:34   좋아요 1 | URL
넘 귀여운 스누피입니다. ㅎ
명품가방과 스누피, 어떤 조합일까 궁금하네요.
미니 님, 남은 더위 건강 잘 챙기세요^^

coolcat329 2021-08-12 1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패싱> 사셨군요~~문학동네에서도 나왔는데 저 표지가 더 예쁜거 같아요~

빨간 개집 스누피 넘넘 이뻐요~♡북엔드 많으시니 저건 그냥 장식품으로 하셔요~ㅋ

자목련 2021-08-13 15:34   좋아요 2 | URL
문동과 비교하면이 표지가 예쁘다고 하네요.
책보다는 스누피입니다. ㅎㅎ

책읽는나무 2021-08-13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누피 북엔드....저도 두 개 다 가지고 있어요.
스누피 넘 좋아해서...^^
처음엔 도라에몽 표정에 반해,파란색 색감이 예뻐 도라에몽 북엔드 모으다가...이젠 스누피로 이동한 상태랍니다.
예뻐 구입했더니 예쁘니까 자꾸 아이들이 지들 책상위에 올려 놓네요ㅜㅜ
왜 자꾸 없어지지?살폈더니 큰 애는 몇 년 전 학교에 도라에몽 북엔드 들고 가선 잊어먹고ㅜㅜ
남자애들인데도 북엔드가 예쁘단걸? 알았는지 지들끼리 돌려 쓰다가 학기 끝날때 가져오려고 보니 없더래요ㅜㅜ
엄마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이것들이!!!!! 부르르 떨었었죠.
갑자기 북엔드를 보니 흥분이~~^^
오랜만에 님의 서재문 두드리면서 이렇게 흥분할 일이~~ㅋㅋㅋ
더운 여름!!! 건강하게 잘 이겨내시고 계시군요.
다행한 일입니다^^

자목련 2021-08-13 15:36   좋아요 1 | URL
저는 책읽는소녀에 꽂혀서 핑크과 검정이 책장 곳곳에 있습니다. 역할보다는 장식이네요. ㅎㅎ
이제는 스누피에 빠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사고 싶던 스누피 시리즈가 품절이라 다행일까 싶고요.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니 저는 아주 좋은 걸요!
건강하고 시원한 오후 이어가세요^^*
 


어떤 경험과 기억은 인생의 반향점이 된다. 때로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나타나고 힘을 발휘해 적용되기도 한다. 그건 강렬했다기보다 불편하고 난해한 기억이거나 경험이다. 어쩌면 지우고 싶은, 잊고 싶은 것들일 수도 있다. 왜? 란 질문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삶을 바꾸고 흔든다. 모두에게 다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는 그 기억을 그냥 과거로 치부하고 기억하지 않음으로 인식한다. 그 기억은 내 것이 아니라고 기억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끊임없는 질문으로 이어간다. 기억의 실체를 찾아, 기억의 부여하는 의미를 찾는다. 『잊지 않음』이란 단호한 제목의 산문집을 쓴 작가 박민정은 후자다.


작가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이 문학 속에 거하는 삶이니 타인을 관찰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이 존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주문처럼 외고 소설을 쓸 때마다 기억하고 애쓰는 작가의 고충을 독자는 알 수 없다. 섣불리 자신의 서사가 아니냐고 짐작하고 판단할 뿐.


어떤 의미에서 작가의 산문집은 그래서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사고, 작가가 그리는 소설에 대한 미래,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가 다짐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런 산문집이라면 훨씬 소설을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평론가의 해설이나 서평이 아닌 작가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소설의 해석이라면 더욱 소설을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사실 박민정의 산문집은 쉽지 않았다. 그건 작가의 개인적인 고백을 읽는 일이었고 동시대의 아픔과 폭력을 향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박민정의 소설은 내게 어려웠다. 많은 소설을 읽지도 못했다. 겨우 단편집 한 권과 몇 편의 단편이 전부다. 그 역시 제대로 읽지 않았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들려주려는 목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고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들, 여성과 일상이 된 폭력의 삶이었다. 그 시작은 이혼한 작은 아버지가 두 딸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는 사실과 작가 스스로의 경험이다. 아들인 남동생은 키우고 딸이라는 이유로 입양을 보냈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시대 그런 이유로 선택당하지 않고 버려진 이들이 모두 여성이라는걸. 작가는 만약 그 상황이라면 자신도 버려질 수 있었다는 불안을 경험한다. 학교 안에서 자행되었던 추행과 폭언들, 수직적 관계에 대한 분노에 대항하지 모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작가가 다짐하듯 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매우 부끄럽다. 경험했으므로 더욱 그들을 이해하고 그 편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건너왔다는 이유로 이제 잊고 살아온 나의 시간을 반성한다.


학생 인권은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머리카락 기른다고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잊지 않기 위해 여학생들의 복숭아뼈를 끝없이 감각한다. 그것이 내 것이었다는 걸 잊고 ‘요즘 애들 편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46쪽)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항상 뒤늦게 슬퍼진다. (165쪽)


지금껏 내가 만난 소설가의 산문 가운데 가장 특별한 산문집이다.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용기가 놀랍고 고맙다고 할까.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고 작가로의 무엇을 써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고민하고 고뇌하는 모습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박민정의 산문집을 읽고 지나온 역사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고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말할 기회가 제한되고 제외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나는 그저 타인의 일이라 여기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던 순간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그러므로 작가는 계속 쓸 것이다.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여전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이제 나는 조금 더 가까이 그녀의 소설에 다가갈 수 있다. 그리하여 그녀의 소설 속 인물의 삶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제대로 만나지 못한 박민정 자각의 소설을 이 산문집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소설을 이해하기 보다 소설을 사랑하기 위해. 소설 속 그녀들을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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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9-10 18: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9-13 12:09   좋아요 1 | URL
^^*

초딩 2021-09-1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자목련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자목련 2021-09-13 12:09   좋아요 0 | URL
^^*
 
걸 인 더 다크 - 어느 날 갑자기 빛을 못 보게 된 여자의 회고록
애나 린지 지음, 허진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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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짙은 빨간색 외투를 입고 챙이 넓은 모직 모자와 직접 만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짙은 빨간색 새틴 스카프를 잘라서 빛을 조금 더 차단할 수 있도록 두 겹을 겹쳐 깔끔하게 단 처리를 한 다음 귀를 걸 수 있도록 고무줄을 달았다. (54쪽)

얼핏 코로나19로 인한 마스크를 쓴 모습처럼 보인다. 극도로 예민한 사람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제목만 보고는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다. 어둠에 익숙한, 어둠 속에서만 생활하는 애나, 그녀가 간직한 사연에 대해 다양한 상상을 했지만 빛을 보면 안 되는 ‘광선과민성 지루성 피부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삶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매일 마주하는 빛을 완전히 차단해야 하는 삶이 있다니. 나이가 들면서 면역력이 약해져서 햇볕 알레르기가 생긴 작은언니가 떠올랐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삶이었다.

『걸 인 더 다크』는 내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삶을 들려준다. 저자 애나는 영국 런던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무런 예고 없이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는 게 힘들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시적이고 단순한 현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거다. 어쩌다 하루 정도 그냥 피곤한 일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애나에게는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도 정확한 진단, 치료법을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는 이가 없었다. 뜨거움의 정도, 고통의 정도에 대해 얼굴에 용접기를 대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라니.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가 그러했다. 애나의 삶은 전면 수정되었다. 모든 게 이전과 달라졌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듯했다. 절망과 고통, 좌절, 낙담의 시간이 몰려왔다. 런던을 떠나 현재의 남편인 피트와 함께 낯선 도시에서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빛을 차단하고 이전의 익숙한 공간이 아니 새로운 공간에서 살아가는 애나. 피트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은 삶은 살면서 다른 사람들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는 연대의 의무가 있었다. 그건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순전히 오기에서 나온 의무였다. (147쪽)


친구, 가족, 지인, 동료 모두와 단절된 상태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안에서도 자신과 비슷한 희귀질병을 앓는 이들과 연대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모습은 먹먹함을 불러온다.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 라디오 듣기, 소설 읽기, 음악 듣기, 뜨개질 하기,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활동 반경을 넓히며 체력관리를 하는 애나와 그를 곁에서 지키며 동행하는 남편 피트의 사랑은 세상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고결하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가는 일조차 빛이라는 위험요소 때문에 포기하면서 느꼈을 절망. 온간 자료를 검색하고 논문을 찾아 자신의 병에 대해 알아간다. 하루하루 빛과 싸워가는 과정, 어떤 게 좋을지 몰라 모든 걸 다 시도하며 스스로 실험체가 되어야만 했던 시간, 생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교육을 시작하며 내면의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애나의 기록은 참담하면서도 대단하다. 희망을 놓지 않는 힘, 그건 사랑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애나의 투병기를 읽으면서 희귀병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리고 적절한 배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우리가 모르는 삶은 얼마나 많을까. 이 책을 통해 ‘광선과민성 지루성 피부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 ‘광선과민성 지루성 피부염’에 대한 치료나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구나 싶다. 삶을 살아가는 감사와 긍정의 태도를 생각한다.

나는 배웠다. 가장 숭고한 진실은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진귀하고 다채로운 고통으로 채워져 있으므로 ‘왜 하필 나지?’라는 말은 바보나 하는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양식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아닐 이유가 어디 있어?” (중략) 기쁨은 모든 일상의 뒤에 가만히 숨어서 우리가 찾아 주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사랑은 이유가 없다. (254~255쪽)


소수와 약자로 살아가는 건 보통의 삶보다 몇 십, 몇 백배로 더 힘들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통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 채워야 할 것들이 바로 감사, 기쁨, 사랑이라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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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8-07 0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에 스릴러 소설인줄 알았어요. 지금 읽어보니 자신의 희귀병과 싸우는 사람의 이야기네요. 인간의 역사 자체가 고통으로 채워져 있고 나 역시 그 일부, 내가 아닐 이유가 어디 있나...라고 생각하다니 작가의 정신력이 참 강하네요.

자목련 2021-08-09 10:14   좋아요 1 | URL
있는 그대로의 고통을 읽으면서도 말씀처럼 작가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주변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결국 고통을 감당하는 건 본인의 몫이니까요. 그래도 그 모든 걸 포용하고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이 없었다면 작가도 좌절하고 포기했을 것 같기도 해요. 여전히 더운 월요일 시원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