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험과 기억은 인생의 반향점이 된다. 때로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나타나고 힘을 발휘해 적용되기도 한다. 그건 강렬했다기보다 불편하고 난해한 기억이거나 경험이다. 어쩌면 지우고 싶은, 잊고 싶은 것들일 수도 있다. 왜? 란 질문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삶을 바꾸고 흔든다. 모두에게 다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는 그 기억을 그냥 과거로 치부하고 기억하지 않음으로 인식한다. 그 기억은 내 것이 아니라고 기억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끊임없는 질문으로 이어간다. 기억의 실체를 찾아, 기억의 부여하는 의미를 찾는다. 『잊지 않음』이란 단호한 제목의 산문집을 쓴 작가 박민정은 후자다.


작가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이 문학 속에 거하는 삶이니 타인을 관찰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이 존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주문처럼 외고 소설을 쓸 때마다 기억하고 애쓰는 작가의 고충을 독자는 알 수 없다. 섣불리 자신의 서사가 아니냐고 짐작하고 판단할 뿐.


어떤 의미에서 작가의 산문집은 그래서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사고, 작가가 그리는 소설에 대한 미래,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가 다짐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런 산문집이라면 훨씬 소설을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평론가의 해설이나 서평이 아닌 작가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소설의 해석이라면 더욱 소설을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사실 박민정의 산문집은 쉽지 않았다. 그건 작가의 개인적인 고백을 읽는 일이었고 동시대의 아픔과 폭력을 향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박민정의 소설은 내게 어려웠다. 많은 소설을 읽지도 못했다. 겨우 단편집 한 권과 몇 편의 단편이 전부다. 그 역시 제대로 읽지 않았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들려주려는 목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고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들, 여성과 일상이 된 폭력의 삶이었다. 그 시작은 이혼한 작은 아버지가 두 딸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는 사실과 작가 스스로의 경험이다. 아들인 남동생은 키우고 딸이라는 이유로 입양을 보냈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시대 그런 이유로 선택당하지 않고 버려진 이들이 모두 여성이라는걸. 작가는 만약 그 상황이라면 자신도 버려질 수 있었다는 불안을 경험한다. 학교 안에서 자행되었던 추행과 폭언들, 수직적 관계에 대한 분노에 대항하지 모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작가가 다짐하듯 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매우 부끄럽다. 경험했으므로 더욱 그들을 이해하고 그 편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건너왔다는 이유로 이제 잊고 살아온 나의 시간을 반성한다.


학생 인권은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머리카락 기른다고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잊지 않기 위해 여학생들의 복숭아뼈를 끝없이 감각한다. 그것이 내 것이었다는 걸 잊고 ‘요즘 애들 편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46쪽)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항상 뒤늦게 슬퍼진다. (165쪽)


지금껏 내가 만난 소설가의 산문 가운데 가장 특별한 산문집이다.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용기가 놀랍고 고맙다고 할까.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고 작가로의 무엇을 써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고민하고 고뇌하는 모습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박민정의 산문집을 읽고 지나온 역사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고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말할 기회가 제한되고 제외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나는 그저 타인의 일이라 여기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던 순간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그러므로 작가는 계속 쓸 것이다.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여전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이제 나는 조금 더 가까이 그녀의 소설에 다가갈 수 있다. 그리하여 그녀의 소설 속 인물의 삶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제대로 만나지 못한 박민정 자각의 소설을 이 산문집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소설을 이해하기 보다 소설을 사랑하기 위해. 소설 속 그녀들을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1-09-10 18: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9-13 12:09   좋아요 1 | URL
^^*

초딩 2021-09-1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자목련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자목련 2021-09-13 12:09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