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장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 읽게 된다. 그게 좋은 문장이냐고 묻는다면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훔치고 싶고 빠져드는 문장이다.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 수록된 단편은 정말 최고의 문장이 아닐까 싶다. 인물의 심리 묘사뿐 아니라 상황을 비유한 문장들은 단연 최고다. 밥을 먹을 때마다 혹은 커피를 마시려고 컵을 고를 때에도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린다. 화분이라는 말에 숨겨진 어떤 의도를 생각하기도 한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찻잔이나 술잔, 밥공기 같은 것이 결코 화분이 될 수 없던 시절에도, 한쪽 모서리가 기운 사다리꼴의 그 방은 내게 충분히 훌륭한 화분이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과 에세이 『바다의 기별』도 빛나는 문장이 많다. 계절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한 『내 젊은 날의 숲』은 청랑한 기운이 가득하다. 정제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맛이라고 할까. 아무 곳이나 펼쳐도 숲의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조만간 두 번째 책으로 다시 만날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도 그렇다. 특별한 일상이 아닌 평범한 삶의 기록을 담은 책이지만 시인이라 그런지 선택된 단어가 황홀 그 자체다. 겨울이 지난 자리지만 이런 문장을 되새기게 된다. 새벽 5시에 하늘을 본 적이 있던가. 내가 마주하는 공기는 어떤 빛을 보여줄까.

 

 ‘겨울 아침, 나는 5시나 그 전에 계단을 내려온다. 하늘은 검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나는 커피를 끓이고 창문마다 다니며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분홍, 귤색, 라벤더색 빛이 동쪽 수평선을 따라 돌진하다가 안개처럼 하늘로 기어올라 어둠의 안쪽 모퉁이에서 바르르 몸을 떤다. 우주의 은밀한 곳! 색깔들이 물 속으로 흘러들고 모든 것이 푸르게 변한다.’

 

 좋은 문장, 아름다운 문장의 첫 시작은 어디서 왔을까.  수없이 많은 퇴고로 탄생된 문장일 것이다. 읽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니 하나의 문장이 끝났다는 걸 알리는 마침표를 찍을 때 느끼는 희열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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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3-0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권여선의 문장도 좋고, 메리 올리버의 문장도 말씀대로 황홀하네요. 우리 소설이 아닌 외국 서적의 번역본을 읽으며 문장에 감탄하는예는 흔치 않은데 아마 번역자의 능력도 크게 작용하리라 싶어요.
자목련님의 이 글도 좋습니다 새삼스럽지만 ^^ 제가 감상을 쓴다면 이렇게 못 쓸 것 같으니까요.

자목련 2015-03-15 19:18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
권여선의 문장은 개인적으로 특히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과한 칭찬 고맙습니다. hnine 님, 포근한 저녁 보내세요^^

2015-03-08 0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5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김연수를 읽는 황홀한 시간. 그러나 그 시간을 나의 글로 채울 수 없어 슬프다. 김연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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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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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할 수 없는 먹먹함... 한강이 써줘서 더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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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그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긴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지만 마음이 분주하다. 청소기도 돌리고 덜 채워진 세탁기도 비워야 한다.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뜨겁고 구수한 보리차를 아주 천천히 마신다. 설을 보내기 위한 이동이지만 다른 목적을 지녔다. 가방 속에 넣을 것들은 간단하다. 칫솔, 속옷, 여벌 옷, 양말, 책, 충전기가 전부다. 매번 그곳으로 갈 때마다 몇 권의 책을 챙겼다. 하지만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된 책은 단 두 권. 읽고 있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다. 그러니까 보스망스와 스토너, 두 남자와 동행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두 남자를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을까.

 

 

 

 

 

 

 

 책을 곁에 두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건 왜 일까. 그만큼 책이 좋다는 것일까. 아니다 그저 습관에 불과하다. 물론 최근에 읽은 메리 앤 섀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이런 구절처럼 순수한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다. 좋아하는 책에 대해 누군가와 편지로 교류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다. 그런 면에서 블로그도 편지와 다르지 않다. 책으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으로 시작된 우정의 공간이니까.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은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22쪽) 

 

 어제 내린 비는 겨울을 달래려 했던 걸까. 비가 그친 하늘은 어제보다 투명하고 젊다. 이곳이 아닌 그곳에선 봄이 오는 소리가 크고 선명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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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2-17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명절_ 무사히 견디고 만나요.

자목련 2015-02-17 23:28   좋아요 0 | URL
야나 님도 무탈한 날들 보내세요. 맛난 떡국과 덕담도 많이 드시구요^^

해피북 2015-02-17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짐싸며 어떤 책을 가지고 가야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책 없이 간다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라죠 ㅋ 터미널에 내리면 책 한 권 사들고올 서점들일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설래이기도 한답니다 ㅋ

자목련 2015-02-17 23:30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선택하셨을까 궁금하네요. 지금쯤은 길이 아닌 곳에 도착하셨을까요?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목을 감싸던 스카프가 목이 아닌 침대나 소파에 있는 시간이 많다. 봄이 오고 있다는 증거다. 마음에 앞서 몸이 봄을 향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뜨거운 밥과 국을 찾는다. 매년 맞는 시기, 겨울과 봄 사이에서 겨울을 밀어내고 있으니 미안할 뿐이다. 벌써 냉장고의 김치엔 손이 안 가기 시작한다. 아, 이 간사한 입맛이라니.

 

 감기를 앓고 있을 때 줄였던 커피는 다시 제 양을 찾았다. 다시 머그나 커피 잔에 시선이 가고 참았던 책도 둘러본다. 읽는 속도는 현저하게 느리지만 멈춤이 아니니 괜찮다고 말하면서 책을 주문한다. 1월과 2월 이런 책을 샀다. 읽은 책은 겨우 환상의 빛』한 권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계속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우선 『지평『8월의 일요일들을 곁에 두었다. 아직 읽지 않았으니 어떠냐고 묻지 마시길 바란다. 물론 다른 책도 다르지 않다.

 

 내게 코맥 매카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였다. 그럼에도 매번 그의 소설이 궁금하다. 『선셋 리미티드도 그런 결과물이다. 신영배의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가 새단장으로 돌아왔다. 첫 시집을 만나는 설렘의 시간이 곧 시작될 것이다.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다시 읽고 싶어 구매했다. 내게 없는 다른 책이 그렇듯 큰 언니 집 책장에 있을 것이다. 봄맞이를 알리는 책은 당연 메리 올리버의 휘파람 부는 바람이다. 죽음과 상실로 가득했던 단편집 『환상의 빛』을 읽으면서 겨울 바다와 봄 벚꽃을 떠올렸듯 『휘파람 부는 바람을 통해 봄향기를 맡는다.  Winter Hours: Prose, Prose Poems, and Poems 란 원제가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아직은 봄이 아니라고 겨울과의 동거가 끝나지 않았다고 소리치는 2월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다. 그럼에도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 봄 햇볕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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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2-1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모르는 책이 많아요. 휘파람 부는 사람_ 궁금해서 장바구니에 퐁당 넣어놨어요. 따뜻한 봄날_ 곧 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요, 우리.

자목련 2015-02-12 10:01   좋아요 0 | URL
<완벽한 날들>을 먼저 만나셔도 좋아요. 김연수가 사랑하는 시인,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ㅎㅎ
눈부신 봄날을 기다리는 시간, 이미 봄인지도 몰라요^^

보물선 2015-02-11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날이 지나면 이제 봄이 오는거죠! 봄~너무 좋은 단어^^

자목련 2015-02-12 10:00   좋아요 0 | URL
맛난 떡국 한 그릇 먹고 나면 짠, 하고 환한 봄이 나타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