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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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여성으로 사는 게 두렵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 뉴스나 언론 보도를 통해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성들이 남 같지 않다고 느낄 때. 택배나 배달 주문을 할 때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입력한다는 글을 보고 나도 이렇게 해야지 싶을 때.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공중 화장실에 가를 걸 주저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씩 무서울 때가 있다. 어쩌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게 되었을까.


이서수의 장편소설 『헬프 미 시스터』 속 주인공 수경도 자신이 성범죄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직장동료가 건넨 음료수를 마시고 위험한 일을 당한 뻔했다. 다행스럽게 피해를 면했지만 수경은 그 일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나라도 그 동료를 계속 볼 수 없을 것이다. 수경은 한동안 집 밖에 나갈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경이 마냥 집에서 쉴 수만은 없었다. 15평 빌라에 여섯 명의 가장 역할을 하던 수경이었다. 남편은 투자 전문가지만 수익을 낸 적이 없고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부모님은 수경의 집으로 왔다. 엄마는 큰일을 당한 수경을 돌보려 청소 일을 그만둔 상태다. 거기다 남편의 조카 둘까지. 조금 색다른 가족 구성원이다.


수경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예전처럼 직장에 나가 동료들과 일할 자신은 없었다. 수경에게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존재였고 그래서 선택한 일이 택배였다. 택배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노동자인데 소속된 곳이 없어 노동자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이상한 사업자 신분이 되었다. 수경의 택배 일을 엄마가 도왔고 남편과 아버지도 일을 찾았다.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수경과 같이 플랫폼 노동자였다. 수경의 일을 계기로 가족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수경 자신이 시간을 견디고 앞으로 나가는 동안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수경의 다짐을 응원하면서도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스스로 일어서는 것. 상처를 지닌 채로 걸어가는 것. 다시 사회에 뛰어들어 생계와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러게 해보고 싶었다. (256쪽)


소설의 제목 ‘헬프 미 시스터’는 아마도 수경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서비스 앱 ‘헬프 미 시스터’는 일을 구하는 이도 일을 의뢰하는 이도 모두 여자다. 수경은 엄마 여숙과 함께 택배 배송을 그만두고 이 앱에 등록하여 일을 시작한다. 여성이 사용하는 앱이므로 여성의 마음을 대면하고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 동성 연인과의 결혼식을 축제처럼 즐기고 참석하는 일, 제사 음식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이제는 음식 하러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일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의뢰가 많았고 수경과 여숙은 흔쾌히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헬프 미 시스터’에서 요구사항은 다양하다. 그 모든 것의 핵심은 남편 우재의 말처럼 “나는 누군가 필요합니다”이다. 그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함을 수경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반드시 여자여야만 하는 절박함을 말이다. 어쩌면 수많은 앱 가운데 이런 앱이 곧 등장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사용자가 있을지도. 그만큼 무서운 세상이라는 게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놓고 모든 걸 부탁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든든하다.


설 속 수경의 가족은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헬프 미 시스터’처럼 서로가 돕는다. 그게 참 좋았다. 그러니까 유머와 격려를 잃지 않는 것. 끝없이 무겁게 빠져들 수도 있는 상황을 타개하는 힘을 키운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가족,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서툴지만 따뜻한 연대가 만들어내는 작은 변화가 불러온 기적. 이서수 작가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들 모두 이렇게 한마음으로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웃고 있다는 것이 기적.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모든 게 기적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338쪽)


상처와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부정이 아닌 긍정을 선택하는 일. 어렵고 힘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시작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나 하는 한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픈 마음을 공감하고 연대하며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소설이 아닌 현실이 아름다운 기적으로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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