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자리는 정리할 게 많았다. 현관문을 열자 한가득의 쓰레기부터 식탁 위에 가득한 물건들. 도대체 왜 식탁의 기능을 망각하고 물건을 쌓아두는가. 침대 위에는 도착한 나를 기다리는 택배 상자. 모두 책이다. 떠나기 전에 받은 책, 내가 없는 사이 도착한 책, 도착할 날짜에 맞춰 주문한 책들. 잠깐 다녀오는 일정이 꽤 길어졌다. 거의 두 달 가까이 다른 곳에서 보냈다. 코로나 19의 여파가 가장 컸다. 아무튼 나는 돌아왔고 돌아왔다는 문자를 보냈다. 청소기를 돌리고 대충 걸레질을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했다. 내가 없는 사이 자주 사용하는 냄비의 뚜껑이 사라졌다. 언제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라면을 끓이는 용도이니 남은 가족이 알 텐데. 아무도 모른단다. 아무튼 대충 정리를 끝냈다.

이곳엔 아직 여름의 흔적이 많다. 침대 이불도 얇고 가벼운 이불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곳은 조금 덥다는 것. 신기하다. 정말 좁은 나라인데 몇 시간 이동 거리로 기온이 다르다니. 9월 말까지는 이대로 갈 것 같기도 하다. 급하게 내려온 것도 아닌데 그곳의 정리는 조카 몫이다. 함께 지내보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어 보인다. 목욕탕 샤워기를 바꾸는 일, 장식장을 거실로 옮기는 일,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모두 만족스러웠다.


 함께 지내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음에 만나면 더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조카는 식탁에서 노트북으로, 나는 컴퓨터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일을 했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일을 마치고 늦은 귀가를 하던 목요일에는 지금쯤 집에 왔겠구나 혼자 생각했다.









이곳으로 오던 날엔 비가 왔다. 문단속을 하면서 창밖으로 내다본 배롱나무는 분홍 기운을 품고 있었다. 꽃으로 피어날까. 나에게 올해의 배롱나무는 이런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안녕, 나의 배롱나무. 잘 지내고 있어야 해’. 나의 인사를 들었을까. 너무 작아서 못 들었더라도 그 마음은 닿았을 거다. 


나를 기다린 책을 살펴보고,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는다. 그 사이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도 반갑고 궁금했던 책을 먼저 읽은 이웃의 글을 읽는 일도 즐겁다. 한 권의 책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고, 그 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먼저 읽은 이가 보여준 풍경, 읽는 중인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까지. 책은 그렇게 나를 누군가와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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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1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의 글도 반갑네요.
:)

자목련 2020-09-19 15:37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의 댓글이 더 반갑지요.
맑은 날씨처럼 신나는 주말 보내세요^^

scott 2020-09-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책사이를 이어주는것도 결국엔 사람이네요 자목련님빈자리를 지켜준 가족들 모습이 따뜻하네요

자목련 2020-09-19 15:38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모든 중심에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이곳 알라딘도 마찬가지고요.

희선 2020-09-1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데서 지내는 거 잘 못하는데, 두달이나 다른 데서 지내다 오셨군요 조카분하고 사이가 좋고 편한 사이인가 보네요 집에 오니 여러 가지가 반겨주었겠습니다 다른 데서 편하게 지내도 집이 가장 편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건 저만 그럴지도... 자목련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0-09-19 15:39   좋아요 1 | URL
다른 곳이라고는 하지만 큰언니가 지내던 집이라 낯설지는 않아요.
종종 다녀오는데 최장 기간 지내다 온 것 같아요. 희선 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 고행이 사람의 일생이며 인간의 역사가 아닐까. (234쪽)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곤 한다. 예전에는 유년기와 청소년을 봄으로 청년은 여름으로 중년을 가을로 분류했겠지만 100세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래도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에게 그들의 계절은 아마도 겨울일 것이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 살다 보니 외지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종종 마주한다. 퇴직을 했거나 새로운 삶을 위해 그곳을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겠지만 그들이 선택한 곳은 이전보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다. 강상중의 『만년의 집』을 읽으면서 정원을 가꾸는 일에 매진하는 한 분이 떠올랐다. 어느 해 6월에 마주한 그 집은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했다. 꽃과 나무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렸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가 소개하는 글을 통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더 많이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처럼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그에 대해 잘 몰랐기에 이 산문집을 통해 들려주는 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책은 마마보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글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함께 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원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일상의 기록이다. 재일교포 1세대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 느끼는 비애, 고통, 정체성의 혼란, 사회적 차별을 견디며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생각하니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다.

도시를 떠나 고원에서의 일상은 하루를 여는 아침이 맞이하는 풍경으로 시작한다. 마주하는 하늘과 땅,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이 주는 신선한 기쁨. 물론 나는 그저 상상할 뿐이다. 작은 텃밭에 가지, 오이, 토마토를 심는 일이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땅을 고르고 씨앗을 심고 지지대를 만들어주고 보살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저자와 아내가 직접 경험하고서야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고원에서 홀로 골프를 치며 느꼈을 완전한 고독,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복수초, 동백꽃, 개나리, 진달래, 작약, 인동초)의 의미와 그것들이 전하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어머니와 아들에 대한 그리움. 담담하게 들려주는 아들과 백합의 사연과 먹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어머니를 추억하는 일, 아내와 마시는 커피 한 잔, 그리고 반려묘 이야기.

우리는 지금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계절을 맞이하려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에 살고 싶어진 것도 고독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도회지가 아니라, 고독을 즐기는 삶을 나누고 각자의 최후를 맞이하기 위한 절묘한 거리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38쪽)

물론 한적한 곳에서의 유유자적한 삶이 이 책의 전부는 아니다. 하루하루 고원에서 그만의 통찰력으로 시대를 읽고 해석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 이념의 대립, 한반도의 분위기까지 놓치지 않는다. 부드럽고 유연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완고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잊고 있던 역사적 순간과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정해진 끝이 있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생에 생에 대해서도 말이다.

인간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그 삶의 집적인 역사 또한 하나의 수수께끼다. 이 수수께끼에 정해진 해답은 없다. 그렇다고 ‘사람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역사란 결국 그런 것이다’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상대화하지 말 것.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해명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 것. 거기에 인간의 존엄이 깃들어 있다. (87쪽)

좋은 글을 읽을 때에도 기쁨을 안겨주고 그것을 생각할 때에도 미소를 짓게 만든다. 강상중의 『만년의 집』도 그런 책이 아닐까 싶다. 안개 자욱한 고원에서 먼 곳을 응시하는 노년의 신사를 떠올린다. 그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잘 하고 있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다정하게 손을 흔드는 것만 같은 착각,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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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전해진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표지가 하는 말은 그랬다. 이 책이 왜 궁금했을까. 그건 제목 때문이었고 표지 때문이기도 했다. 저자인 에이드리언 리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녀의 시도 읽은 기억이 없다. 책날개의 소개와 더불어 검색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도. 고백하자면 내게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단순한 시인의 산문과 에세이 정도를 기대하고 있다면 아마도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시대를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일, 그것이 가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한 권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여성의 삶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말하는 건 어렵다. 같은 여성이라서 때로 주관적일 수 있고, 한쪽으로 편향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주관성과 편향이 가장 객관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을 읽고 샬럿 브렌테의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다른 시선으로의 읽기가 필요하다.


여성들이 경험한 피해자성과 분노는 모두 현실이고, 현실적인 원천이 있다. 그 원천은 우리가 사는 환경 곳곳에 존재하고 사회와 언어와 사고 구조로 스며든다. 다른 누구보다 시인들이 그곳을 탐색하고 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안주하지도 않을 것이다. (48쪽)


과거 시나 소설에서 여성은 항상 보조적인 역할에 충실해왔다. 우리 문학만 봐도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그들에게 보호받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우리는 그렇게 양육되었고 지배받은 것이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성으로 어머니로 시인으로 살았다. 아이를 낳고 쓴 일기에서는 보편적 여성의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글쓰기의 생활을 쉬어야 했고, 연이은 임신과 육아가 그녀를 지치게 했으며 그 시간을 지나 다시 열정적인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 마음이 있었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글은 특히 더 많은 생각과 공감을 요구한다. 나와 같은 성의 어머니를 통해 여성의 삶을 본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면서 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것들이다.


딸을 키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 딸들은 무엇을 가지기를 혹은 가질 수 있기를 바랄까? 우리 어머니들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깊이,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신뢰와 애정이 필요하다. 분명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사실이지만, 자신에게 너무나 적대적인 세상에서 자라는 여성들은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매우 심오한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저 남자들이 요구해온, 오래되고 제도화된, 희생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용기 있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원한다. 문화가 여성에게 새겨놓은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우리의 한계에 대한 의식이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확장하는 것이다. (207쪽)


우리 딸들에게는 자신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를 모두 원하는 어머니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여성의 자기부정과 좌절을 담는 그릇이 될 필요가 없다. 어머니의 삶의 질은ㅡ아무리 무방비 상태로 싸움 중인 삶이라도ㅡ딸에게 물려주는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자신을 믿는 여성, 싸우는 여성, 그리고 주변에 살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여성은 딸에게 이런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08쪽)


한 사람의 여성 시인으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알 수 없고 닿을 수 없다. 그녀의 글을 통해 조금 접촉할 뿐이다. 예술이, 그러니까 문학과 시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돌아볼 뿐이다. 독자이자 여성으로 말이다.


예술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고, 우리 자신과 타인의 경험과 상상의 삶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인류의 인간성을 지속적으로 재발견하고 복구하는 측면에서 예술은 민주주의의 전망에 필수이다.(462쪽)


우리는 그저 현재에 붙박혀 있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끝이라는 좁은 복도에 갇혀 있지 않다. 누구도 다수를 배신해야 굴러가는 체제의 물결 위에서 파도타기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역사의 한 토막을 통과하며, 그 안에서 살고, 그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써야 한다. 수많은 다른 사람과 함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 아니면, 우리 의식과 연민을 거세당한 채, 없는 사람처럼 마지못해 살아갈 수도 있다. (489쪽)


시인의 산문이나 에세이를 떠올리며 기대했던 보통의 독자에겐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하지만 더 알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뭐랄까 점점 더 알면 알수록 내가 발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전체를 재독하지 못하겠지만 밑줄 그은 부분이나 관심 있는 주제의 글은 반복해서 읽고 기억하고 싶다. 책을 통해 접근한 세계의 실체,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한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여성학, 페미니즘,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리베카 솔닛의 책과 함께 읽어도 괜찮겠다. 좋다는 표현보다는 근사하고 멋진 책이라는 말로 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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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8-2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의 사진이 정말 근사해서 관심이 가던 책인데요. 자목련님 글 읽으니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자목련 2020-08-22 17:23   좋아요 0 | URL
표지가 책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ㅎ 좋은 책이라는 확신에 비해 포스팅은 부족합니다. 개인적으로 추천해요. 바람돌이 님, 주말 시원하고 건강하게 보내세요^^*
 

‘고요’란 단어를 좋아한다.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의 마음을 원한다. 나의 마음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게 좋다는 걸 아는데도 그게 참 어렵다. 내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도 세상 일들이 내 마음 같지 않아 속상하고 힘들다. 친구나 지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고요’를 만들거나 그것에 다가가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것을 원한다. 이런저런 불평과 생각의 끝엔 결국 산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이토록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삶이란 허망한 것이구나. 결론을 맺다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이 감사하다. 간사한 마음, 그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사는 게 평온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선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힘든 날들이 이어지는 요즘,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아니, 이 시기를 견디고 있는 모두에게. 

 

살수록 어려운 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상담을 받고, 강연을 듣는다. 뭔가 발견하기 위해서,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쓴다. 미국계 한국인인 저자도 그러했다. 보통의 삶을 사는 20대 청년이었고 고민과 방황의 끝에서 한국의 송담 스님을 찾았다. 10년간 묵언 수행을 하고 참선의 대가로 알려진 스승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처음부터 출가의 길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참선에 대해 배우고 존재의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참선의 세계를 배우고 경험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테오도르 준 박이란 사람의 인생 이야기이자 누구나 한 번쯤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존재와 동시에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계 한국인으로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한국의 사찰에서 스님의 길을 걸으며 스승인 송담 스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일, 그것은 힘들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 안에서 참선의 기쁨을 찾는 일이야말로 수행은 아니었을까. 그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느낀 것을 솔직하게 들려줄 수 있었던 건 그 과정에서 자신이 변화했기 때문에 ‘참선은 삶에 대한 일이다’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나는 참선을 시도했지만 그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창피하지만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고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의 우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30년 가까운 시간을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 강연과 강의를 통해 얻은 명성을 유지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오히려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와 여행을 하고 요가를 배우고 그 안에서 참선의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본연의 나로 돌아와 초심의 마음을 돌아보고 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을까. 일상에서 참선을 하면서도 꾸준하게 요가 수련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는 그의 모습은 아무런 노력 없이 변화를 바라고 고요를 원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을 걸고 세상에 말할 수 있다. 방탕과 방황으로 채워졌던 20대를 알기에 지금의 청춘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참선의 어려움을 알기에 참선을 배우는 이들의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상처 입은 치유자였다.

 

치유를 해주는 모든 사람에겐 아픔이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 공감과 연민을 배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사라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도 자신의 불행을 통해서다. (2권, 103쪽)

 

참선에 대해 몰랐다. 막연하게 심신수련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겼다. 마음을 모으는 기도, 명상, 호흡, 요가, 이런 단어들이 함께 떠올랐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테오도르 준 박의『참선』을 읽었지만 여전히 나는 참선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가 안내하는 방법대로 참선을 해보았지만 집중도 쉽지 않았고 “이뭣고”를 반복하는 일도 어려웠다. 그러니 삶의 화두를 생각하는 일이나 감정을 다스리는 건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수많은 반복과 노력의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참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참선으로 시작해 참선으로 끝나는 하루가 얼마나 충만할지 짐작할 수 있다. 삶을 긍정하는 즐거움 가르침이자 수행법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되었다.

 

참선은 우리 내면에 있는 해와 달의 빛을 모으고 주위의 구름에 초점을 맞춰 다 태워 없애버린다. 참선을 하면 더욱더 많은 빛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뚫고 나와 우리의 마음을 환히 비추고 몸을 가득 채운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두 눈과 얼굴에서 빛이 난다. 마침내 그 빛은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빛이 비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2권, 280쪽)

 

우리는 제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것은 나를 지키면서 타인과 함께 공존하는 일이다. 나의 내면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주위를 살피는 일은 쉬우면서도 힘들다. 그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참선의 삶을 사는 일도 그렇다. 이제 겨우 참선에 대해 알아가는 내가 거들 말은 아니지만 참선이 주는 위대한 감동을 당신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순간, 잠시라도 참선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거기 내가 원하는 ‘고요’가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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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8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0-08-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우연히 동영상 추천받아 보았던 분이시네요. 말씀하시는 태도,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자목련 2020-08-19 09:51   좋아요 0 | URL
글이 아닌 영상으로 보면 색다른 기분일 것 같아요.
 

​주일 아침에 찍은 사진이다. 자목련이었다. 사진을 좀 더 잘 찍을 걸 후회가 된다. 세상에 여름에 자목련이 꽃을 피우나? 이건 꽃이 아닌가. 혼란스럽고 반가웠다. 내가 모르는 자목련의 세계라고 할까. 여하튼 그랬다. 사실 봄이 지나면 자목련을 잊는다. 꽃이 필 때에 다시 바라본다. 자목련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지만 꽃 그 자체를 생각하는 건 봄이라는 계절뿐이다. 그러다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다가 화면 속 자목련을 담아둔 게 생각났다.



1회의 장면인데 나는 이 장면이 좋아서 자꾸 멈췄다가 돌려보기를 반복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그 환한 웃음이 행복해 보였다. 연기가 아닌 실제처럼 여겨졌다. 방영 당시 계절이 봄이었구나 싶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역시 좋은 드라마다. 사랑, 죽음, 우정이라는 진부한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어서 좋고, 서로의 상처에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분노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노년의 삶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노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같이 늙어가는 친구가 있다는 것, 자식 흉을 보며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아픈 몸에 대해 한탄할 수 이를 곁에 두었다는 것, 정말 축복이다.






이렇게 느닷없는 자목련을 보고 즐거운 마음도 축복이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남부 지방에는 폭우로 피해가 많은 듯하다. 출근길, 마스트를 써야 하는 일상에 피로도는 커지겠지만 그래도 이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이 있으니 이 또한 기쁘다. 자귀나무가 한창인 날들, 그 한 귀퉁이에 자목련이 있다. 여름엔 자귀나무와 배롱나무인데 올해는 자목련도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름에 마주하는 봄이라고 할까. 드라마 때문에, 우연하게 만난 자목련 때문이다.

여름이니까 한 권쯤은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책을 만나야겠지.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오랜만에 시집도 한 권 검색한다. 허연의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 그리고 정용준의 장편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도 궁금하다. 


읽고 있는 책은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인데 너무 솔직해서, 너무 신랄해서, 너무 거침이 없어서 놀라면서 읽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은 적이 있지만 이런 느낌을 받는 적이 있던가 싶다. 아니 에르노의 데뷔작이라는데,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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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7-15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오랜만이죠. 다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고 그저 잘 지내시길요.
아니 에르노의 책 담아갑니다. 여름에 만난 자목련 특이하고도 반갑네요. 계절이 따로 없는 것 같은 요즘.

자목련 2020-07-16 09:3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깁니다.
아니 에르노의 책을 함께 읽는 7월의 날들이겠네요.
프레이야 님, 건강하고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stella.K 2020-07-1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자목련님 얘긴 줄 알았습니다.ㅋ
재작년까지만 해도 저희 집도 마당에 목련 나무가 있었죠.
흰색, 자색 둘 다. 그런데 무슨 공사를 하면서 베어버렸습니다.
공동주택 마당에 있는 거라 우리만 사는 것 같으면 결코 베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많이 아쉽더군요.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가 몇년도 작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3, 4년된 작품 아닌가요? 노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과연 재밌을까
싶었는데 확실히 노희경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군요.
무엇보다 저는 오랜만에 노배우들이 나와서 좋았습니다.
옛날에 정말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배우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잘 안 나와서 아쉬웠거든요.
그런 걸 보면 저도 나이 들었다 싶어요.ㅋㅋ

자목련 2020-07-16 09:36   좋아요 0 | URL
자리를 지키던 나무가 사라지면 무척 서운할 것 같아요.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던 거라서요.
노희경 작가의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는 못 봤어요.
고현정과 조인성이 아닌 김혜자, 고두심, 나문희, 윤여정의 연기가 너무 좋았어요.
주현, 신구 배우도 그렇고요.
<거짓말>부터 좋아했는데 점점 더 믿음이 가는 작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