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전해진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표지가 하는 말은 그랬다. 이 책이 왜 궁금했을까. 그건 제목 때문이었고 표지 때문이기도 했다. 저자인 에이드리언 리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녀의 시도 읽은 기억이 없다. 책날개의 소개와 더불어 검색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도. 고백하자면 내게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단순한 시인의 산문과 에세이 정도를 기대하고 있다면 아마도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시대를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일, 그것이 가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한 권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여성의 삶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말하는 건 어렵다. 같은 여성이라서 때로 주관적일 수 있고, 한쪽으로 편향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주관성과 편향이 가장 객관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을 읽고 샬럿 브렌테의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다른 시선으로의 읽기가 필요하다.


여성들이 경험한 피해자성과 분노는 모두 현실이고, 현실적인 원천이 있다. 그 원천은 우리가 사는 환경 곳곳에 존재하고 사회와 언어와 사고 구조로 스며든다. 다른 누구보다 시인들이 그곳을 탐색하고 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안주하지도 않을 것이다. (48쪽)


과거 시나 소설에서 여성은 항상 보조적인 역할에 충실해왔다. 우리 문학만 봐도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그들에게 보호받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우리는 그렇게 양육되었고 지배받은 것이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성으로 어머니로 시인으로 살았다. 아이를 낳고 쓴 일기에서는 보편적 여성의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글쓰기의 생활을 쉬어야 했고, 연이은 임신과 육아가 그녀를 지치게 했으며 그 시간을 지나 다시 열정적인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 마음이 있었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글은 특히 더 많은 생각과 공감을 요구한다. 나와 같은 성의 어머니를 통해 여성의 삶을 본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면서 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것들이다.


딸을 키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 딸들은 무엇을 가지기를 혹은 가질 수 있기를 바랄까? 우리 어머니들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깊이,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신뢰와 애정이 필요하다. 분명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사실이지만, 자신에게 너무나 적대적인 세상에서 자라는 여성들은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매우 심오한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저 남자들이 요구해온, 오래되고 제도화된, 희생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용기 있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원한다. 문화가 여성에게 새겨놓은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우리의 한계에 대한 의식이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확장하는 것이다. (207쪽)


우리 딸들에게는 자신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를 모두 원하는 어머니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여성의 자기부정과 좌절을 담는 그릇이 될 필요가 없다. 어머니의 삶의 질은ㅡ아무리 무방비 상태로 싸움 중인 삶이라도ㅡ딸에게 물려주는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자신을 믿는 여성, 싸우는 여성, 그리고 주변에 살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여성은 딸에게 이런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08쪽)


한 사람의 여성 시인으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알 수 없고 닿을 수 없다. 그녀의 글을 통해 조금 접촉할 뿐이다. 예술이, 그러니까 문학과 시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돌아볼 뿐이다. 독자이자 여성으로 말이다.


예술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고, 우리 자신과 타인의 경험과 상상의 삶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인류의 인간성을 지속적으로 재발견하고 복구하는 측면에서 예술은 민주주의의 전망에 필수이다.(462쪽)


우리는 그저 현재에 붙박혀 있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끝이라는 좁은 복도에 갇혀 있지 않다. 누구도 다수를 배신해야 굴러가는 체제의 물결 위에서 파도타기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역사의 한 토막을 통과하며, 그 안에서 살고, 그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써야 한다. 수많은 다른 사람과 함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 아니면, 우리 의식과 연민을 거세당한 채, 없는 사람처럼 마지못해 살아갈 수도 있다. (489쪽)


시인의 산문이나 에세이를 떠올리며 기대했던 보통의 독자에겐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하지만 더 알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뭐랄까 점점 더 알면 알수록 내가 발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전체를 재독하지 못하겠지만 밑줄 그은 부분이나 관심 있는 주제의 글은 반복해서 읽고 기억하고 싶다. 책을 통해 접근한 세계의 실체,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한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여성학, 페미니즘,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리베카 솔닛의 책과 함께 읽어도 괜찮겠다. 좋다는 표현보다는 근사하고 멋진 책이라는 말로 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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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8-2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의 사진이 정말 근사해서 관심이 가던 책인데요. 자목련님 글 읽으니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자목련 2020-08-22 17:23   좋아요 0 | URL
표지가 책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ㅎ 좋은 책이라는 확신에 비해 포스팅은 부족합니다. 개인적으로 추천해요. 바람돌이 님, 주말 시원하고 건강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