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덥다" 소리가 나온다.
방학이라 하루 종일 분주하다. 아이들 세 끼 밥 챙겨주는 일로 분주하다고 말하다니 엄살이 좀 심하긴 하다.
날이 더우니 엄살은 더 늘어간다. 어떻게하면 좀 더 편하게 하루를 보낼까 궁리하느라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것 같다.
이런 무더위 속에,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 노벨문학상 수상,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이런 이유와는 상관없이 친구와 한참 수다 떠는 중이었다. <폭풍의 언덕> 영화 개봉에, 보고 싶다, 하지만 볼 수 없다, 언젠가 밤새워 읽었던 그 시절을 생각한다, 다시 읽어야겠다, 친구에게 있어서 <폭풍의 언덕>은 인생을 관통하는 그런 소설이었단다. 그래서 여러번 읽었다고, 그러면서 덧붙이길 김연수 작가는 <설국>을 네 번 읽었단다. 인생을 관통하는 그런 소설이라고, 그래? 난 아직 한번도 읽지 않았는데, 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하고 호기심이 생겼던 게 그 이유다.
그래서 이 더위에 눈의 나라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p.7)
첫 문장을 읽었다. 내 머릿 속은 곧장 하얀 눈밭이 떠올랐다. 이 더위에 눈의 고장으로 간 것이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내다보면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을 것만 같고, 이 더위는 오히려 바깥의 추위를 녹이는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기차를 타고 눈이 내리는 철길 위를 달린다. 시마무라이든 요코이든, 아니면 니가타의 고마코이든.
"감상을 써두는 거겠지?"
"감상 따윈 쓰지 않아요. 제목과 지은이, 그리고 등장인물들 이름과 그들의 관계 정도예요"
"그런 걸 기록해 놓은들 무슨 소용 있나?"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래요" 하고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밝게 대답했으나 물끄러미 시마무라를 응시했다.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雪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38~39)
모든 게 헛수고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때, 내가 지금 무얼 했단 말인가하고 망연자실해했던 적도 여러번이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에 수고롭지 않은 일은 없다고 생각이 바뀐 건 아마도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어제는 술에 취해 들어 온 남편이 냉동실에서 쭈쭈바를 꺼내 먹었던 듯, 아침에 일어나보니 거실 바닥에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 그걸 일찍 일어난 아들이 먼저 발견하고 닦았고, 쭈쭈바를 들고 무얼 했길래 구석 구석 어딘가에서 계속 떨어진 흔적들 때문에 끈적거렸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데 남편은 쭈쭈바 국물을 줄줄 흘려 놓았고, 나는 그걸 찾아 열심히 닦아내는데 참 기묘한 게 어떻게 이곳에도 흘렸을까 싶은 곳까지 쭈쭈바 자국이 남아 있었다. 대체 남편은 쭈쭈바를 먹으며 무얼 했던 것일까? 아이들 책에 까지 흘려 놓은 건 정말 너무하다 싶었다.
가끔 이런 남편의 행동은 낯설다. 가스레인지 위에 잔뜩 흘려 놓은 라면 국물과 건더기들, 싱크대에 아무렇지 않게 버려진 라면 건더기들......평소에 싱크대에 아무렇지 않게 음식물 버리는 걸 싫어하는 나는 한밤중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기겁할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벌써 1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사람인데도 그의 내면을 온전히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시마무라에겐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고 먼 동경이라고 애처로워도 지는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서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p.64)
"왜 그래?"
"갈래요"
"바보 같은 소리"
"상관 말고 당신은 쉬세요. 전 이렇게 있고 싶어요"
"왜 가려는 거야?"
"가지 않아요.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 있겠어요"
"공연히 심술 부리지 말아"
"심술 부리는 거 아녜요. 심술 같은 거 안 부려요"
"그럼?"
"그냥, 몸이 좀......"
"괜찮아, 그런 것쯤. 전혀 상관없어" 하고 시마무라는 웃으며,
"얌전히 있을게"
"싫어요"
"그러게 바보같이 왜 그리 성나서 걷느냐고"
"갈래요"
"갈 필요 없어"
"힘들어요. 당신은 이제 도쿄로 돌아가세요. 힘들어요"(p.69~70)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대화, 이 둘의 대화는 내내 겉돈다. 서로의 마음이 들키는 것이 두려운 것이겠지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언젠가 돌아가야하는 여행자,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향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으니, 그녀의 말은 겉돌 수밖에 없었겠다.
날은 계속 덥고, 마음만이라도 추운 눈의 고장을 생각하는데, 소설은 소설대로 아름답지만 슬프게 끝이나고, 마음과 달리 이 새벽에 배는 고프고, 감상자로서의 자세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결국 소설은 읽었고, 결국엔 다시 또 읽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