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달째 이 책을 끌어 안고 있었다. 읽기 어려워서도 아니었고, 읽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이 책을 보내주셨던 분은 이분과 사랑을 나누는 중이라고 하셨다. 대체 어떤 책이기에...... 

책을 받아 들고서 시간이 여의치 않게 되자 자꾸만 미루게 되었다. 그래도 늘 침대 옆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읽어야 할 책들을 그곳에 쌓아두고 읽는 편이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서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고, 나도 그만 그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조금씩 아껴가며 그의 글을 읽었다. 

마치 내 옆에 다가와 속삭여주는 그런 느낌의 글을 읽었다. 

 

시를 읽는 사람을 사랑한다. 아니 지금은 시를 읽어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내게 생소한 시인들조차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마력이 있다. 

  강정 -  본명이 '강정'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 이름 과연 임자 만났구나 싶어진다. 필력강정()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그의 문장은 솥[鼎]을 들어올리는[] 혹은 들어올리고야 말겠다는 무모한 에너지로 넘친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이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되어버린다. 죽고 싶다는 욕망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내전(內戰)을 벌이는 시를 쓰는 사람에게 이름이야 별무소용일 것이다. 그는 그저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이는 몸, 부단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혼의 이름 없는 주인 같다.(p.23) 
  그의 첫 시집은 폭발적이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음악과 경전(經典) 사이에서 좌충우돌한다. 전언이 명료하지만 에너지가 없는 문장이 있고, 종잡을 수 없지만 뭔가를 자꾸 폭발시키는 문장들이 있다. 그는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 나는 지금 죽어야 하나?"라고 묻거나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라고 명령한다.(p.24)

 김민정 -  예컨대 그녀는 "삐친 자지처럼"([거북 속의 내 거북이])과 같은 비유를 구사하는 시인이다. 이 직유는 허를 찌른다. '시'라는 제도와 남근주의의 허장성세를 동시에 밟아버린다......예컨대 그녀는 "나는 한 그루의 눈알나무"([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눈알나무, 라고 그냥 읽어버리지 말고, '눈알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줄기가 휘청거리는 나무'를 나의 감각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쓸쓸하고 오싹하다. 온몸이 눈이 되어 세계를 경계해야 할 만큼 상처가 많은 것인가,(p.30) 

  이장욱 - 뛰어난 시인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같는다......그는 소위 '미래파'의 산파 중 하나다. 그 자신이 이미 뛰어난 시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어떤 시에서 화자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고백은 지겹다, 모든 고백은 거짓이다."([감상적인 필름]) 이를테면 내면이 있고 내면의 진실이라는 것 또한 있어 그것이 질서 있게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이 고백을 낳을 것이다.(p.48)
  진은영 -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철하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떄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p.52)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ㅡ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읽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떄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ㅡ[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p.53)

 내 옆에 와서 시인들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그를 자꾸만 생각한다. 

  "후천성 위트 결핍증이라고 하셨던가요?"(p.67) 그가 내게 묻는다. 난 정말 재미없는 여자라고 누군가가 말했던 적이 있었다. "선비 아니면 투사, 댄디 아니면 아티스트. 그래서 다들 너무 비장하고 너무 슬프고 너무 우아하다 운운. 인정! 그렇다면 정현종의 [헤게모니]나 황인숙의 [시장에서] 같은 시는 어떠신지?" 발랄한 시, 그래 내게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나 여전히 뻣뻣한 당신. 그렇다면 특단의 조치. 성미정 시인의 시집들을 권합니다. 잘 모르신다고요?"하고 말해준다. 정말이지 난 그녀를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이라니 믿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미정 시인의 시집을 찾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또 그는 이런 이야기도 해준다. 

  "시는 감각의 경련이고 언어의 운동이다. 그것만으로도 시가 된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강하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번역된 외국 시를 읽는 일은 원칙적으로 허망한 일이다. 감각의 경련은 상당 부분이, 언어의 운동은 거의 전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신 이야기와 메시지가 남는다."(p.168)  

그가 하는 말에 자꾸 귀기울이게 된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가끔 주제넘은 충고를 한다. 나 자신은 소설을 단 한 줄도 써본 바 없으면서 말이다. "인물의 내면을 말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어라.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라.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장악한 것을 향해 최단거리로 가라. 특히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리고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p.287) 

7월 27일 이후 우리 부부 사이도 썩 좋지 못하다. 폭우를 뚫고 시내를 달리게 한 아내에게 화가 난 남편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 일의 얘기를 꺼냈다. 구름빵 영어 뮤지컬이 취소된 건 내 탓이 아닌데도 나는 계속해서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로는 그 분이 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 아니 내가 없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있는데도 남편은 거침없이 말을 한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고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는데 그깟 공연을 보겠다고 위험하게 차를 몰고 나가길 고집했다고 계속해서 책망을 했다. 그 뮤지컬을 보고 페이퍼 쓸 생각뿐이라고 내 마음까지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하는 것이다. 결국 공연 보러 갈 것을 고집한 건 나만의 욕심일뿐이었다는 것이다. 며칠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공연보러 갈 거라고 책도 읽고 구름빵 인형놀이도 하며 지냈었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엄마, 오늘 구름빵 보러 가는 거 맞지?"하고 계속해서 물었었고, 남편이 부정적으로 말할때마다 아이들은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난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었다. 비가 많이 온다고해서 공연이 취소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날 이후 남편에게 얘기도 하기 싫어졌다.  

나희덕의 시 [물소리를 듣다]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 그대로 담긴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부 싸움의 정황을 진술한다(起). 돌아누운 두 등의 이미지로 생의 고독을 묘사한다(承). 아이의 오줌 누는 소리가 문득 들려온다(轉). 애틋한 그 물소리가 부부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화해시킨다(結). 이것이 전형적인 만남의 시다. 그러나 이 시는 엇갈림을 엇갈림으로 내버려둔다." 이게 현실인 것 같다.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정말 그러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중간에서 화해의 역할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나는 남편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자기 생각대로 생각해버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 옆에 가까운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를 대신하는 것이 있어 소통하지 못해서 외롭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오히려 나를 오해하는 남편보다 내게 시를 쉽게 읽어주는 이 남자가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를 읽는 남자를 만났다면 내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았을까? 아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그도 그렇지 못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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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8-0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님은 심각한데 나는 실실 웃어서 미안해요.^^
시를 읽어주는 '그 남자'가 좋아보여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고,
먼 것 같지만 가까이 할 수 있는 내곁의 '그남자'가 좋다는 걸 알잖아요.
잠시 뾰로통 투정부리는 꿈섬님이 내 모습 같아서 그냥 '곱게' 보여요.ㅋㅋ
어쩌면 옆지기는 빗속을 달리게 한 것보다 '알라딘'을 사랑하는 님께 질투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꿈꾸는섬 2011-08-03 23:0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시를 읽어주는 그 남자, 정말 너무 매력적이에요. 왠지 내 마음도 다 알아줄 것 같고....뭐 그런 마음이긴 한데 순오기님 말씀대로 그 남자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 맞아요.ㅜㅜ
곱게 봐주시는 순오기님께 감사할뿐이에요.ㅎㅎ 옆지기는 알라딘을 질투하는 거군요.
연륜이 넘치는 순오기님의 말씀에 저도 웃음짓게 되네요.^^

양철나무꾼 2011-08-0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건가요?^^


꿈꾸는섬 2011-08-03 23:0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정말 매력적이에요. 내 옆에 있는 남자에게 느끼지 못하는 그런 매력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마녀고양이 2011-08-04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남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남편, 진짜 순간적으로 미워요.
저두 남들 앞에서 저를 깍아내리는 순간을 참아내지 못 해요. ㅠㅠ. 하지만....
이번 휴가 동안, 서로 스르르 풀어지고 있는 중이시지요? 빗속을 달리면서 남편 분, 고생 많이 하셨을거예요.

꿈섬님.... 쪼옥~~ 정말 이쁜 페이퍼예요. 그러니까, 나무꾼님과 꿈섬님이 한 남자에게 빠졌다 이거죠?

꿈꾸는섬 2011-08-15 21:17   좋아요 0 | URL
마고언니가 제 맘을 이해해주시니 정말 좋아요.^^
남들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구요.ㅜㅜ
시 읽어주는 남자랑 살면 어떨까요? 그냥 그런 생각을 좀 해봤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