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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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點)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8쪽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12쪽

나의 세계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의 삶이 과거가 되며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나는 얼어붙는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빨아들이는 새 뿌리가 되어 바깥에, 어둠과 낯선 것에 닻을 내리고 붙박혀 있는 것을 감지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죽음은 쓴맛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탄생이니까, 두려운 새 삶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니까.-27쪽

카인에 관한 이야기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 완전히 진실이고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들 모두를 선생님들이 보시는 것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어. 그러면 대체로 훨씬 나은 뜻을 갖게 되지.-39쪽

<허용되었다>, <금지되었다>라는 것이 사실 무엇인지 통찰할 수 있는 곳에 넌 아직 가보지 못했어. 비로소 하나의 진실을 느낀 것뿐이야. 다른 것이 또 올 거야. 그것에 자신을 믿고 내맡겨봐!-85쪽

백은 즐겁게 내 말에 귀기울였다. 마침내 누군가가 내 말에 귀기울이고, 그에게 내가 무언가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를 굉장한 녀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뭔가를 전하고 싶은 고이고 고인 욕구를 실컷 쏟아내는 기쁨에, 인정을 받는다는 기쁨에, 연장자에게서 다소 인정받는다는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가 나를 천재적인 멋들어진 녀석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 말이 감미로운 독주처럼 영혼 속으로 번졌다. 세계는 새로운 색깔로 불타고 있었다.-96쪽

"너한테 유쾌하지 않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어. 아무려나 어떤 목적으로 네가 지금 네 잔을 마시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 둘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미안하지만, 난 집에 가봐야겠다.-116쪽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123쪽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혔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압락사스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처음에 겁을 먹고 느꼈던 것처럼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또한 더 이상 내가 베아트리체의 영상에다 바친 것 같은 경건하게 정신화된 숭배 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둘 다였다. 둘 다이며 또 훨씬 그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128쪽

자네를 날게 만든 도약,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위대한 인류의 재산이지. 그것은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지. 그러나 그러면서도 곧 두려워져! 그것은 빌어먹게 위험하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듯 차라리 날기를 포기하고 법 규정에 따라 인도 위를 걷는 쪽을 택하지. 그런데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계속 날고 있어. 유능한 젊은이에게 합당한 대로 말이야. 그리고 보게, 자네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네. 자네가 점차 그 주인이 되는 것을 말이야. 자네가 계속 낚아채 가고 커다랗고 알 수 없는 보편적인 힘에다가 하나의 섬세하고 작은 자신의 힘이 더해지는 것을 발견하네. 하나의 기관, 하나의 방향 키 말일세! 이건 대단한 거야. 그것이 없다면 그냥 공중에 떠 있을 테지, 미친 사람들이 그러듯이 말이야. 자네에게는 인도를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보다 더 깊은 예감이 주어졌어. 그러나 거기에 맞는 열쇠와 상향 키가 없어. 바닥없는 곳으로 솨악 빨려들고 있지. 그러나 자네는 말이야, 싱클레어, 자네는 그 일을 하고 있어!-144~145쪽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지. 우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현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한 번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어. 우리들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보세."-152쪽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힘들었어요" 내가 잠꼬대처럼 말했다. "힘들었어요. 꿈이 올 때까지는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꿰뚫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해요. 그러면 길은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190~191쪽

처음에 나는, 총격의 선정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실망했다. 예전에 나는 한 인간이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일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드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개인적 이상, 자유로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217쪽

그들에게는 미움과 분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어 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아니다. 대상들은 목표들과 꼭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이었다. 원(原) 느낌, 가장 거친 느끼들도, 적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혈의 위업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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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7-1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미안, 중학교 때 필독도서로 읽은 후 다시 읽은 기억이 없는데...이참에 읽어봐야 겠어요.
님의 밑줄긋기를 따라 읽다보니, 오히려 어렵게 읽었던 '싯다르타' 마저 이해가 되려하고 있어요~^^

꿈꾸는섬 2011-07-20 00:29   좋아요 0 | URL
저도 중학교 때 필독서로 읽고 이번에 조카랑 읽으려고 다시 읽었는데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희망찬샘 2011-07-20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때 헤르만 헤세 책을 정말 많이 읽었더랬어요. 근데, 아쉽게도 다 문고판 도서라... 일종의 요약본이었던 거죠. 그래도 그거 읽었다고 어디 가서 책 읽었네... 하고 아는 척 할 수도 있던걸요. 이제는 제대로 된 책들도 찾아 읽어 보아야겠네요. 아, 데미안~ 입에 침 튀기면서 이야기 하던 울 큰 언니 때문에 읽었었는데, 왜 그리 어렵지... 했던 책!!! 이 책 덕에 갑자기 중학 시절로 잠시 떠나 보았습니다.

꿈꾸는섬 2011-07-21 12:26   좋아요 0 | URL
희망찬샘님도 문학소녀셨군요.ㅎㅎ

후애(厚愛) 2011-07-20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못 뵙고 가게 되어서 너무 서운하네요.
올해 꼭 뵈려고 했었는데... 죄송해요.
다음에 기회가 오면 꼭 만나요^^

꿈꾸는섬 2011-07-21 12:25   좋아요 0 | URL
후애님 한국 계신 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 후회없이 다 하고 가시길 빌어요.^^
이제 몸은 많이 좋아지셨나요? 건강하게 계시다가 돌아가시길......
다음에 만날 기회가 생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