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얼마 안 먹은 내가 요새 자꾸만 나이들어간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감수성이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리라.
예전의 - 그러니까 결혼전 아니 아이들을 낳기 전이라고 해야겠다 -나는 자극적이면서도 기발한 상상력, 아프지만 유머가 넘치는 그런 책들을 즐겨 읽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책들과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끔 그런 책들이 주는 통쾌함이나 유쾌함, 이런 것들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그것만으로는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요책 <너의 시베리아>를 읽으며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이 세상에서 나의 아이와 만난다는 사실은 가슴 벅차며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갖게 한다. 아이를 받아 안는 순간부터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아이가 좀 더 자라 길가를 걷게 되는 순간에도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는다. 엄마의 손을 뿌리치려는 아이의 손을 더 움켜 쥔다. 그럼 아이는 내 얼굴 한번 쳐다보고 그냥 그렇게 발을 내딛는다. 잠깐의 실수로 아이를 잃게 될까 늘 조심스럽다. 아이는 그런 존재다. 바라만 보아도 즐겁고 행복하고 기쁨을 주고 아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를 들을때면 나도 함께 까르르 배꼽을 잡는다. 물론 가끔 아이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때도 참 많다. 되돌아 생각하면 늘 아이들의 관점으로 못 보는 나의 잘못이었다. 늘 나의 기준으로 아이들을 재단하려 들었기때문에 아이들의 소소한 장난을 받아들여주지 못했던 적들이 많았다. 물론 이것도 내 아이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 뱃속에서 자라서 탯줄을 자르고 젖을 먹으며 자란 내 아이들이 내겐 더없이 소중하다.
얼마전 영화배우 송옥숙의 입양기를 TV를 통해 본적이 있었다. 첫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재혼하여 딸아이 하나 낳아 키우는 그녀에게 입양할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한번 버려진 아이를 두번 버려지게 할 수 없었다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 좋았다. 누가 부모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데려와 자신들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유난히 식탐을 보였던 아이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던 것 같다. 양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아이다운 거짓말을 뜻하지 않게 하고, 그것에 속상해하던 송옥숙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를 위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입양기가 눈물나도록 고맙고 사랑스러웠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녀의 가족들이 계속 잘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너의 시베리아>는 시베리아 소녀를 입양한 저자가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시베리아를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입양이라는 절차 또한 한가족이 된다는 것이니 가족으로서의 동질감이나 경이로움은 똑같진 않지만 어느순간부터는 그런 감정들이 생겨날 것만 같다. 한편 한편 읽어내려가며 저자의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느껴본다. 아이가 태어난 시베리아를 느껴보려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너무도 좋다. 나도 함께 아이를 만나기 위해 시베리아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