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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사랑,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콩닥콩닥. 마치 내가 누경이라도 된 양 감정이입. 아, 이런.
"너를 참고 있는 마음이 맑고 낮아서 소중해."
이제는 사랑 그 정도는 다 안다는 듯이 누경을 향해 계속 속삭였어. 잊어버려, 잊어버려, 잊어버려. 너에겐 기현이 있잖아. 근데 아뿔사! 누경의 기현에 대한 마음은 진짜였나봐. 갑자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뭐지. 누경, 너가 아니면 안 된다는 기현이 있는데, 기현을 만나야 너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도 있는 것 같은데...근데, 넌 다시 또... 그래, 사랑은,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고, 기현에겐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래서 기현에게 넌 그러는 거라고. 알아, 네 맘 알아. 하지만, 하지만 말야....
"마음속의 빈 상자들이 젖어서 모두 무너졌어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 너의 마음을 흔드는 누군가 나타났다는 것은 어쩌면 '그'를 잊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지도 모르는 거니깐. '그'를 평생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왠지 가슴 아픈 일이니까.
"힘들 땐 어떻게 하세요?"
"그냥 견뎌. 끝까지 견디는 거야."
인생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 말했다. 누구나, 정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구나 그럴까?
그, 누경의 일기장 속에 숨어 있는 그 남자. 그는 '답답할 만큼 자신에게 엄격하고, 까다로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하고, 심지어 약간 수줍어하는 내성적인 남자'였어. 누경이 가진 고통의 트라우마를 씻어준 사람이었지만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지. 더 깊이 사랑한다면 그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런 마음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게 과연 사랑일까? 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랑은, 그래 사랑은, 같이 나누어야 하는 거야. 마음 속에 품어두고 이 생애에서 너와 인연이 아니었다면 다음 생애를 기약하지, 따위는 말짱 필요 없는 거지. 혹은 그가 말했듯이 지금 같이 살려고 애태우지 않으려고 전생에서 같이 살아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따윈 그래, 말일 뿐이야. 현재는, 지금 바로 이곳에선 그와 누경인 같이 있지 못하니깐.
그 환멸의 정체는 어떤 이 주일을 보냈든, 그것은 각자의 것이라는 진실이었다. 각자의 고뇌, 각자의 귀로, 각자의 그리움……
그러나 그는 알까. 다른 풍경이 또다른 풍경을 그토록 사랑해서 세상 모든 발소리를 세며 오직 그 하나만 기다리는 것을, 다른 세상이 또다른 세상을 그렇게도 생각해서 피부가 갈라지는듯 가뭄 드는 것을. 눈이 너무 깊어져 두려운 나머지 자꾸만 뒤로, 매일 뒤로 물러나야하는 것을…
주말 내내 누경의 가슴 뻐근한 사랑이 너무 절절하여 내 맘 마저 싸~하게 아파왔어. 당분간 달달하든 콕콕 쑤시든, 사랑 이야긴 안 읽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그만 누경의 일기장을 봐 버렸고, 누경의 아픔을 알게 되었지. 주말 내내 실연 당한 여자 같았어. 어느 누구든 내게 따듯한 말 한마디로 위로해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지 뭐야.
"세상도, 삶도,우리 마음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심연의 외줄 위에서 안간힘을 다해 현재를 제어하려는 아둔하고 흐릿하고 가냘픈 의식의 줄타기뿐이야. 야윈 불빛 깜박이는 그가난 속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 그 가난 속에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것이 젊음의 마지막에 빠져들었던 내 사랑의 이야기라 해도, 있었던 일 그대로 좋은 시간이었어. 난 괜찮아. 이렇게 가깝고도 먼 근처에서 당신을 바라볼게. 누경, 그러니 웃어. 당신은 편안하게 웃어……."
사랑이 지나가면, 또 다른 사랑이 오는 거래.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은 사람도 어느 순간엔 까마득하게 잊고 만다지. 그러니 사랑 앞에선 누구나 속물이어도 괜찮아. 사랑할 때, 그때 만큼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아. 남들이 뭐라 하든 그 사랑은, '내' 사랑은, 진실이니까. 누경!
나는 인생에서 가장 후회할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해를 덮은 달처럼 몸 가장자리가 홍염의 불꽃을 일으키며 파들파들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검게 타는데도 고통조차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