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합니다.. 그대 알라딘이, 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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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뜰에도 상사화가 피고 진다 - 세상 바깥에 은둔한 한 예술가의 세상에 대한 ‘한 소식’
김양수 글.그림 / 바움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가는 사람
오는 사람도 없다.
내가 저 길을 따라 나서지 못함은
저 길을 따라 걸어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이다.

가지 위에 참새 한 마리 머물다 간다.
『외로움(p48)』


저자는 그렇게, 그 ‘누군가’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에서 말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답고 경탄할만한 병풍을 두르고서, 어리숙하고 때가 잔뜩 묻은 도시빈민인 내게 제일 먼저 편안함을 선물했다. 비포장도로를 터벅터벅 걸어 그에게로 가는 길에 흙먼지가 폴폴 날렸지만, 도시의 먼지와 공해보다 훨씬 좋은 맛이었다.

달과 별
새와 고요를 긴 팔로 껴안은
따뜻한 그림 한 폭.
『겨울나무(p42)』


그 아름다운 병풍 속에서 자연스레 발화한 것만 같은, 꼭 그런 느낌으로 충만한 게 그의 작품이다. 꾸밈없고 편안하며, 내가 늘 가보지도 못한 먼 어느 곳을 동경하며 거짓으로 그려 놓은, 훌륭하다고 그저 생각만한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름다운 그 병풍 속에 그려진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의 작품이며, 폴폴 날리는 흙먼지며 길가에 지려놓은 오줌자국까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느꼈다고나 할까.

귀뚜라미 달 갉아 먹는 소리인 듯
창문 열었더니
둥근 달이 간 곡 없고
반달 홀로 나무 위에 걸려 있네.
『반달(p64)』


세상에 만연한 이기심들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생각과 꿈을 갉아먹고 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귀뚜라미나 매미의 울음소리는 늘 성가신 것으로 생각하며 진정한 아름다운 화폭을 우리는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소한 아름다움조차 알지 못하면서 진정한 미(美)의 가치를 논하느라 ‘귀뚜라미 달 갉아 먹’듯 허허로운 시간이 우리를 갉아 먹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건 아닐는지.

안개 속에
점 하나 찍었다.

살아서 움직인다.
『새(p74)』


저자의 감수성은 이렇듯 세밀하다. 나는 늘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그 안개 너머로부터 불안을 떠안은 채 오로지 그 너머의 것만을 보려고 애쓰고 지레짐작하기에 급급하다. 나와 안개가 함께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는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다. 구태여 그 너머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를 불안이나 환희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떨어진 감은
나비들의 몫이고

달려 있는 감은
까치들의 몫이다.

생의 한 길가에 선
나는 누구의 몫인가.
『감(p68)』


한참을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무방비 상태로 그저 노니는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러다 툭하고 떨어진 채 으깨진 ‘감’과 맞닥뜨렸다. 그리곤 아직도 세월 모르고 달려 있는 ‘까치들의 몫’을 올려다보았다. ‘생의 한 길가에’서 마주친 그 ‘감’은 화두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보다 더 근원적이고 겸손한 화두였다. 진정 ‘나는 누구의 몫인가.’

잎도 나무를 떠나고
열매도 가지를 떠나고
철새들도 떠날 채비 서두르는 길.

진초록의 강인함도
결실의 풍요로움도
보금자리의 따스함도
털어내는 저 자유로움.

늦은 가을
늦깎이로 홀로 서서
세월을 주워 담는다.
『늦은 가을(p76)』


가을은 늘 내게 풍요로움과 때마침 아름다운 그런 계절이었다. 모든 걸 비워내고 털어내는 ‘자유로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종종 늦가을이 주는 을씨년스러움과 허무함과 같은 감정은 만나보았지만, 이처럼 자유로움으로 가득한 늦가을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떤 세월, 어떻게 그 세월을 주워 담느냐는 것으로부터 내 봄은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꽃도 사람인 양
봄이면 잎이 올라와
님을 기다리지만

꽃도 사람인 양
여름이면 꽃이 피어
님을 기다리지만

꽃도 사람인 양
목 놓아 흐느끼다 지쳐 잠드니
바람도 멈춰서서 울고 가는 밤.
『상사화(p131)』


나는 도시에 살면서 이 도시라는 경계 너머에 있을, 아니 저 멀리 밀려나버린 땅을 종종 그려본다. 도시에 비한다면 그 처량한 땅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다. 내가 그 땅을 처량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불손한 생각일지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 숭고한 땅으로 갈 용기가 없음에 나는 감히 ‘처량한 땅’이라는 연민을 품으며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에 불과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그 처량한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인연을 따라 산다는 것은
순리를 따라 산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은 거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인연은 우리에게 옵니다.

무엇을 사랑한다고 이름 짓지 않고
무엇이 내 것이다 집 지어놓지 않고
무엇이 옳다 그르다 시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인연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그 어떤 것들도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스치는 바람, 발밑에 뒹구는 낙엽까지도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인연입니다.
『인연(p158)』


인연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인연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삶이라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인연의 꼬리를 쫓아 그것을 쥐려했던, 지금도 그렇게 어리석은 헛수고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감히 그 인연이라는 것을 탄탄한 내 마음 속 어딘가에 가둬두고 빗장을 단단히 채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거리삼아 내비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늘 내 관심 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내가 익히 알고 충분히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 이외의 것들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만을 한 채로 말이다. ‘스치는 바람, 발밑에 뒹구는 낙엽까지도/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인연’임을 몰랐던 것이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도시라는 화려하지만 도를 지나친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소리를 덮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네가 내게로 오는 소리 외에는······.
『비 오던 날(p161)』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눈과 비가 외진 이 곳에서 비는 내 님이요, 그립다 지쳐버려도 맹렬히 사랑할 존재랄까. 내 마음속에 핀 상사화는 비를 향한 내 그리움을 양분으로 피고 진다. ‘모든 소리를 덮’고 ‘내게로 오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내 마음속 상사화는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내 님을 맞는다. 오롯이 내 님과 단 둘만의 시간까지 허락되는 날이면, 나는 정신줄을 놓고 흠뻑 취하고 또 젖어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내 님은 맑아오는 날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다시금 내 마음속 상사화는 그 오롯했던 만남을 양분으로 다음을 기약한 채 여전히 촉촉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람 끝에 향기가 난다.
오시려나, 내 고운 님.
『예감(p192)』


어떤 예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비’일수도 있고 어느 계절일수도 있다. 하물며 내가 기다리는 버스일수도 있고, 아련한 첫사랑과의 조우를 예감할 수도 있다. 어떤 예감이건 간에 그 속에는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엉뚱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늘 혹은 종종 어떠한 예감에 사로잡힌다면, 굳이 현실화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현실에 투영될 것이다.

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가장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진실로 바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도, 예감할 수도 없는 게 아닐는지. 바라고 바라는 그 마음속에는 사랑과 더불어 고마움도 있을 것이다. 그 이외의 모든 감정들이 잠재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알 수 없는 그 오묘한 예감 속에는 우리들의 모든 감정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의 작품 속은 단아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전혀 꾸밈도 가식도 없는, 때론 거친 보리밥을 씹는 듯했지만 그만큼 정겹고도 아련한 감정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쾨쾨한 도시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병풍을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어쩌면 꼭 만나리라는 열망의 씨앗이 심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씨앗이 내 마음속에 뿌려졌다면, 아마도 그것은 ‘상사화’가 될 운명의 씨앗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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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췌~말이지~~본 글보다 레인님의 사유가 더 멋지니, 이런 리뷰는 추천받아 마땅해!!!!!!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 - 한쪽 가슴만으로도 행복한 여자
곽정란 지음 / GenBook(젠북)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의 일이다. 일곱 난장이 중 한 녀석의 어머님이 병원으로부터 유방암 판정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절제수술을 받으셨다. 그때 그 친구네는 ‘남산골’이라는 곰탕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장 일손이 부족해 부랴부랴 친구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 친구는 아버님을 도와 가게에서 바쁜 일손을 거들었고, 저녁이면 병원을 방문했다. 그렇게 친구네 집에서 두 달여 동안 살았다. 집-가게-병원을 오가며 여름방학을 꼬박 보냈다.

친구 어머님은 퇴원을 하셨고, 예전과 다름없이 쾌활하게 생활하셨다. 언제 내가 아팠냐는 듯이 말이다. 그때는 유방암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때라 그저 유방절제수술을 받고 나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시는 친구 어머님을 뵈었기에 별로 심각한 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를 읽고서, 친구 어머님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어느 날, 천청벽력 같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서 얼마나 충격이 크셨을까, 내심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친구와 아버님, 여동생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유방절제수술을 받고서 하나의 유방이 아니라 세상을 다 잃은 듯 한 그 상실감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등등의 생각들이 이미 흘러간 그 시간을 다시금 불러냈다.

엄마로서도 아닌, 여자로서, 한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이제 젖먹일 아이도 없고, 살아가는데 지장도 없으니 하나쯤 없은들 무슨 상관이냐고 너스레를 떨어볼 용기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으리라.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진 저자의 가슴 아픈 절규와 고백은 내 친구 어머님과 오버랩 되면서 더더욱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재발에 대한 걱정, 아니 그것은 저자가 말하듯 거의 공포에 가깝다. 저자와 내 친구 어머님은 발병으로부터 좌절하고, 수술로 통해 생명은 살렸으되 자신의 존재감의 상실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언제고 재발할지도 모를 공포와 몇 년을 싸웠던 것이다.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재깍재깍 들려오는 죽음이라는 공포의 시간들과 늘 싸우며, 다시금 평온함을 찾는 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내 안의 두려움아,
난 이제 너와 이별하려고 한다.
내 안의 새로움과
만나기 위해!

『본문 中..』


저자는 기필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내야만 했고, 결국 이겨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격려와 위로가 그녀에게 살아야할 이유를 알려주었고, 종교에 귀의해 모진 시간을 이겨냈다. 또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시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봉사하는 삶, 유방암을 앓고 힘들어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망을 전달해주는 공연을 기획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는 바로 유방암환자들을 위해서 그녀가 기획한 공연의 제목이다. 숨은 자아와도 같은 여성성의 상실로 인해 움츠려들고 희망과 용기를 잃어가는, 살아 숨 쉬면서도 늘 절망에 빠진 채 죽음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그녀가 경험하고 이겨낸 바를 바탕으로 진심어린 동반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유방암환자들과 함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감, 상실감, 좌절감, 무력감, 공포심 등등을 떨쳐내기 위해 희망과 축복을 노래한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고, 그 치부를 진심어린 자기애로 감싼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가 되고, 암 판정을 받은 후로 방치한 채 돌보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고귀한 생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당당하게, 다시금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녀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남자들도 어렵다는 암벽등반에 도전하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난다. 또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도 모자라 그 힘들다는 사막마라톤까지.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위해 ‘도전’이라는 선물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삶의 보람을 느끼며 이전과는 다른 삶, 늘 일에 쫓기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주며, 진정 자신은 돌보지 않은 채 무심하게 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보람찬 삶을 가꾸어 나간다.

가장 흥미로웠던 그녀의 도전은 사막마라톤이었다. 내가 갓 전역을 하고서 인터넷을 통해 사막마라톤에 대해 접한 적이 있다. 꽤나 매력적인 스포츠(?)라는 인상을 받았기에, 나름 도전해볼 요량으로 검색을 해봤었다. 코스도 힘들뿐더러 그 비용도 만만치 않은 터라 지레 겁을 먹고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경기관련 동영상을 보면서 나름 체력도 좋고 자신감도 있던 나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사막마라톤을 그녀는 참가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 그 이상의 결과를 맛본다. 40대 여성 참가자들 중에서 1등을 한 것이다.

이처럼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는 눈물과 감동 그리고 시련을 딛고 일어서 새로운 삶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으로 가득 담긴 책이다. 저자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알곡 같은 ‘대서사시’가 아닐까 싶다. 오래간만에 가슴 찡한 감동과 눈물 그리고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도전이라는 비행을 한 듯해서 뿌듯하고 가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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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아름다운 도전 뒤엔 그런 고난과 역경의 극복의 스토리가 꼭 있더라구요.
 
The Daydream 3집 - Melody Tree
The Daydream 연주 / Kakao Entertainment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그것이 꿈이었는지, 전혀 꿈이 아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어떤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는 것이고, ‘만졌다’는 것이다. 그 크기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안았다’는 것을 알 뿐이다. 어떤 오묘한 느낌에 이끌려 살포시 귀를 대고 ‘들었다’는 걸 기억할 뿐이다. 아니, 분명 나는 귀를 대고 한참을 그렇게 들었으리라. 어쩌면 며칠 혹은 몇 달을 그런 채로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A Princess Of Goguryeo】
구슬픈 가락을 들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 담긴, 꼭 그런 느낌의 멜로디였던 것 같다. 마치 어여쁜 한 소녀가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옹달샘에 쪼그려 앉아 한 방울 한 방울 사무치는 그리움을 떨어뜨리며 내는 소리인 듯했다. 그 멜로디는 떠난 임에 대한 처연한 그리움으로 돋아나, 언젠가는 꼭 돌아 올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으로, 돋아난 그리움을 달랜다.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깊은 밤 풀어내 보며 시린 밤을 이기려 해보지만, 풀어낸 그 행복의 순간들은 이내 시린 밤을 비추는 달빛 속으로, 반짝이는 별빛 속으로, 적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다시 시리고 적막한 밤과 함께 사무치는 그리움만 남는다. 소녀는 매일 옹달샘 위로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리움을 달랜다. 이것이 내가 처음 들은 멜로디이다.

【My Home】
‘봄이다!’ 내가 들은 두 번째 멜로디의 첫 느낌은 봄이었다. 영화 <4월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집을 떠나 도쿄에서 맞이하는 첫 날이 떠오른다. 벚꽃비가 내리는 그 멋진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꼭 이와 같지 않을까싶다.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조금은 설레기도 한 기분 말이다. 일말의 두려움에는 늘 가족들의 격려가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가족의 품을 떠나오면서부터 여태 가족들과 부대끼며 살았던 내 집은 비로소 ‘고향’이 되는 게 아닐까. 늘 따뜻한 봄 햇살 속에 있을 것 같은 가족들과 고향집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봄이 아닐까 싶다.

【Serenade In Autumn】
생동하는 봄으로부터 나는 달음질쳤다. 언제 여름옷을 벗어던졌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가을을 노래하는 풍경 속에 서 있다. 여름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부드럽게 밀어붙이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렇게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언젠가 여름처럼 내 곁을 지나쳐 갈 이 가을, 마치 영원을 약속하는 속삭임처럼 달콤한 맛이다. 지는 석양과 함께 장관이 펼쳐지고, 어느덧 가을의 첫 어둠이 내려앉는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금 여름이거나 겨울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아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가을의 첫 날이랄까. 수면제 100알 아니 100통으로도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섣부른 그리움과 갓 피어난 백일홍의 설레는 첫 세상구경 사이를 오가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을 거니는 듯한, 꼭 그런 기분이다.

【Again】
‘힘을 내, 힘을 내!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있지는 마.’ 꼭 이렇게 들린다. ‘여태껏 잘해왔잖아. 단지 조금 힘에 부치는 것뿐이야.’ 이런 위로와 격려처럼 들린다. ‘결과는 분명 중요해. 하지만 어떤 결과물도 인내하고 노력하는 그 값진 과정 없이는 불가능해.’ 내가 시련과 절망 속에서 어떤 삶의 지혜를, 이 고통 속에서 어떤 의미와 힘을 찾아야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삶 속에서 고뇌하는 그 순간마저도 얼마나 축복이고 값진 시간인지를 잊지 마.’ 절망 속에서 세상 모든 아름다운 빛이 잿빛처럼 보이고, 나 홀로 힘든 시간 속에 갇혀버렸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놓치고 잃어가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가르침 같기도 하다. 그렇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듯한, 그런 따뜻한 위로를 받은 듯하다.

【Pour Chopin】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바닥을 치고 너부러져 있던 나를, 내 마음을 다부지게 가다듬고서 한발자국씩, 서두르지 않고서 다시 내가 걸어야할 길 위에 서있음이 느껴진다. 하늘에는 아직도 뜨거운 태양열이 나를 괴롭히고 있고 내 앞에 놓여있는 이 길은 한도 끝도 없이 가늠할 수 없지만, 이미, 나약한 내 모든 것들은 흥건하게 흘려버린 지난 눈물에 젖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음을 알 뿐이다. 괴로웠던 시간들이 떠올라도 이젠 움츠려들지 않는다. 그 고통들을 곱씹으며 단맛을 느낄 수 있음을 막연하게 떠올릴 수 있는 나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그렇게, 시작할 수 있음을, 조금은 선명하게 느낄 뿐이다.

【Kissing Bird】
언제 내가 고통 속에서 정신줄을 놓은 채,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가. 일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태어난, 아니 꼭 내가 다시금 새롭게 태어난 듯한, 그런 기분이다. 너무 움츠려있던 탓에 내 앞에 놓인 길 위를 좀처럼 제대로 걷지 못한다. 하지만 이내 조금은 여유롭기도 하고, 조금은 사뿐사뿐 날림걸음이 되기도 한다. 늘 마음만이 저 길 끝 미지의 세계에 닿아 있었고 내 몸은 늘 그에 못 미쳤지만, 이젠 몸과 마음이 보조를 맞춰 나아감을 느낀다.

【Running On The Clouds】
내 걸음이 너무 사뿐했나보다. 어느덧 나는 허공을 걷고 있다. 그렇게 허공을 박차고 애드벌룬처럼 평화롭게 떠다니는 기분이다. 높이, 높이, 더 높이. 여태껏 날 감싸고 있던 울타리가 한 눈에 보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울타리는 불과 하나의 작은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진다. 아! 내가 열심히 달음질치고 내가 보던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 아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내 울타리 너머에는 이처럼 더 큰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랄까. 내 생각과 내 꿈도 한 아름 더 굵어지고 커진 듯하다.

【A Melody Tree】
겉모습만 웃자란 내가 아님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 확신에 찬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조금은 더 과감해진, 하지만 그만큼 더 신중한 용기가 돋아난다. 조금은 더 깊어진, 그만큼 더 사려 깊은 생각들이 튼실한 모습으로 뿌리내린다. 조금은 더 넓어진, 그만큼 더 소중한 것들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가슴이 펼쳐진다. 마치 내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된 듯하다. 넓게, 자유로이 드리운 가지 사이로 햇살을 품을 줄 알고, 싱그러운 잎사귀를 펼친 채 누군가에게 푸르름을 선사할 줄 아는 지혜로운 나무가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누군가를 위해 허물어질 것만 같은 흙덩이를 단단히 움켜진 채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되어 보람된 하루하루를 사는 것 마냥. 소소한 행복을 노래할 줄 아는 그런 소박하지만 튼실한 나무마냥.

【No Geunri】
며칠 혹은 몇 달,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모를 내 여행은 끝을 맞이한다.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내 가슴 속에 뭔가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늘 치고나가는 생각과 몸과는 달리 늘 김칫국만 먼저 마시던 마음은 어느새 평온하고 차분한 보금자리에 든 듯하다. 늘 내 길 끝에 있을 ‘무언가’에만 집착한 채, 내 ‘지금’을 오롯이 느낄 수 없었던 시간들. 늘 무채색의, 어떤 촉감도 느껴지지 않는 생각만을 주렁주렁 달며 살아가던 나. 여행의 끝인 지금 이 순간,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충만하다. 바람이 나를 간질이는 것이 느껴지고 누군가의 허물없는 미소가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것이지를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 마음의 촉수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형체도 없는 모든 감정들까지도 더듬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꿈같은 실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보고, 만지고, 안고, 들었던’ 이름 모를 그 ‘나무’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동행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저 멀리 도망간 채로, 혹은 나 자신조차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무언가를 더듬어 만지고 만났던들 그게 무슨 의미가 되고 소용이 되는 것일까 싶은 지금이다.

나를 이 오묘한 여행으로 이끈 이름 모를 그 ‘나무’,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사회라는 규정된 틀에 얽매임 없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게끔 만드는, 일종의 환영(幻影)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인간이라는 고귀한 소우주가 비로소 자연의 이치에 맞게끔 제 궤도를 찾아가려는 관성적인 숨은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분명한 것은 나는 언제고 그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그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사실이 아닐까 싶다.


『 나머지 멜로디 』

【A Princess Of Goguryeo [해금 Version]】
【My Home [Piano Solo]】
【A Melody Tree [Piano Solo]】
【Again [Piano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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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울 레인님~~뭔 음악감상도 이렇게 멋들어지게 한답니까?

에샬롯 2010-04-2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드림 ㅋ 우리 데이드리머는 요즘 뭐할까..ㅋㅋ 문제해봐야지...ㅋㅋ ;; 감상문과 전혀 상관없는 감상..-_-;;
 
숲의 가족
아모스 오즈 지음, 박미영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꾸벅씨(?)가 된 채로 지내고 있다. 네모난 상자 안에 꼬박 하루를 밀어 넣은 채 졸음과 싸우는 학생들 틈바구니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공부가 될 리 없다. 주위를 둘러봐도 죄다 네모난 것들뿐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앞 다투어 네모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 도서관. 그곳에서 네모난 책 속에 잠자고 있는 ‘숲’을 만났다. 비밀로 가득한 숲을.

스타카토. 《숲의 가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스타카토’와 같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길게 연주되는 스토리가 아닌, 딱딱 끊기는 전개방식이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내 손에는 퍼즐조각이 하나씩 생긴다. 서로 닮은 구석도 별로 없는 그런 퍼즐조각을 얻으면서 결정적인 퍼즐조각을 얻을 때까지, 그렇게 스타카토.

어느 마을, 동물들이 없다. 사라진 건지 죄다 죽은 건지 알 수 없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마치 저주받은 마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학교에서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을 뿐이고, 마을의 어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쉬쉬하는 듯한 모습이다. 간혹 학교 선생님처럼 참다못해(?)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몹쓸 행동을 한 것 마냥 금방 함구해버린다.

『이것은 마을에서 오랜만에 처음 보는 생물이었다. 그날 밤 산귀신 네히가 모든 생물을 데려간 뒤로 마을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물, 말이나 비둘기, 쥐, 양, 수소 등의 생물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부모들 중에는 동물에 대한 주체 할 수 없는 그리움이나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나머지 동물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고서 아이들에게 동물 소리를 흉내 내어 들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닭이나 하마의 울음, 소가 음매 하고 우는 소리, 숲 속의 늑대가 짖는 소리, 비둘기가 구구하는 소리,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 거위가 꽉꽉거리는 소리, 개구리가 개굴개굴 하는 소리, 올빼미와 수리부엉이가 우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자신의 슬픔을 부인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단지 재미있는 소리를 내본 것뿐이라고 했다. 그게 전부라고. 또 동물들의 소리는 현실 세계의 것이 아니라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따라해 본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략·····)
“그건 그냥 전래동화란다.”
“그 이야기는 농담이야.”
전래동화나 농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p50~p51)』


어둠이 깔리면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어둠 속에 잠식당한 것처럼. 집집마다 커튼을 치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어떤 두려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산귀신 네히에 대한 공포를 아이들에게 심어준다. 어둠이 깔리면 절대 밖을 나가서는 안 되며, 숲 근처로는 절대 가서도, 궁금해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할 뿐이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라고 말할 뿐, 마을 사람들은 그 ‘시답잖은 이야기’에 대해 언제나 쉬쉬할 뿐이다.

마티와 마야. 이 용감한 두 녀석들이 사고(?)를 치고 만다. 금기를 깨고 숲으로 모험을 떠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진실’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함께 어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모험을 말이다.

『“어떻게 너는 숲을 무서워하지 않니? 네히가 무섭지 않니?”
니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나도 무서워. 나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 특히 밤이 무서워. 네히는 무섭지 않아. 사실은 동굴에 있을 때보다 나를 미워하는 아이들 속에 있을 때, 그 아이들이 내게 소리를 지르고 돌과 기왓장을 던질 때가 더 무서워. 어른들이 내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좀 봐, 저기 소리지르는 병에 걸린 불쌍한 아이가 오네, 정말 안됐어, 하고 말하면서 항상 어린 아이들에게 내 곁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 난 그게 두렵고 무서워.”(p70~p71)』


마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몹쓸 병에 걸린 아이 취급을 받는 니미를 만나면서 마야와 마티는 자신들을 둘러치고 있는 울타리의 습성을 알게 된다. 미움과 시기, 다수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멸시와 경멸, 조롱하는 마을이라는 울타리의 습성을 말이다.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을 유리시키고 진실을 은폐하며, 금기라는 것으로 경계를 만든다. 그렇게 세뇌를 시킨 채, 아이들을 유린하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두려움이란 진실체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것으로부터 파생된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혀 진실체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나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나와는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 나보다 우월할 것만 같은 사람들을 오직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고 그들에 대한 왜곡된 정보들을 자기가 속한 집단 속에 퍼뜨린다. 그렇게 사람들은 상대를 격리시킨다는 착각 속에 빠져, 각자 제 스스로 자신이 속한 집단 전체를 고립시키고 외부와 단절시켜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숲의 끝자락에 도착하자 어렴풋이 마을의 집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네히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밤이야. 저기서는 벌써 걱정들을 하고 있을 거야. 이제 둘 다 집으로 돌아가.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땐 산에 있는 숨겨진 우리 집으로 와. 해기 지기 전까지 몇시간 동안은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야. 너희만 괜찮다면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좋고 더 있어도 돼. 다시 만날 때까지 너희도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조롱하고 놀리는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귀찮게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에게 말해. 화나게 하거나 약을 올리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에게 말하는 거야.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거야. 괴롭히지 말라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싫다고 말하는 거야. (····중략····)
자, 이제 너희는 가서 평화롭게 지내. 그리고 잊지마. 너희가 커서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서도 잊지마. 마야, 마티, 잘가. 안녕.”(p136~p137)』

마야와 마티의 험난한 여정을 통해 만난 진실, 온갖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진실을 싸고 있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 등을 벗겨내는 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 그렇게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세상을 바꿔나갈 사명과 힘을 지닌 존재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이며, 아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이 아닐까싶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을 쉬쉬하며 살아가는가. 얼마나 그릇되고 왜곡된 정보들을 가르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단 1%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진실에 대해서 99%의 왜곡된, 자기합리적인, 그릇된 거짓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가. 시시각각 불쑥 찾아드는 진실에 대한 갈망 앞에서 얼마나 초연하고 태연할 수 있는가. 늘 두려움에 떨면서도 쉬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가치관과 중심은 지배나 종속됨 없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인가.

책을 덮으며 퍼즐조각은 다 찾았지만 퍼즐은 완성하지 못한 기분이다.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나를 조롱하듯 그런 퍼즐이 내 앞에 있는 것 같다. 하나씩 찾아낸 그 퍼즐조각들에 대해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은 채, 그냥 당연히 퍼즐을 맞춰나간 결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퍼즐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듬으며, 때를 벗겨내는 작업을 시작해야할는지도 모른다. 마치, 조각모음을 시작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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