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몽골방랑 -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김홍희 지음 / 예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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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와 떠나는 방랑길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설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면서 그렇다고 스릴이 잔뜩 담긴 것도 아닌, 꼬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그와 함께 떠돌이 방랑객이 된다는 건 늘 기분 좋은 무엇으로 가득하다. 정처 없이 떠나고 기약 없이 발걸음을, 대책 없이 젖어들고 스며드는 그만의 흔적들은 정말이지 하나하나가 놓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것일지라.  


『김홍희 몽골방랑: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제목 그대로 몽골을 휘젓고 다닌 그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말을 타고 몽골의 초원을 멋진 자태로 뽐내면서 흔적을 새겨나가는 게 아니라, 고물 지프차를 타고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건조한 사막에 길을 내며 몽골 너머의 몽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길’이라는 근원적인 물음과 시 · 공간 그리고 ‘나’ 혹은 ‘너’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철학을 몽골 방랑길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에서 김홍희에 대해 또 하나 알게 된 게 있다면, 그는 지극히 낭만적이면서도 시쳇말로 ‘산통 다 깬다!’고 할만치 솔직하다는 점이다. 가령, 입에 맞지 않는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몽골식 국수를 ‘이해’라는 소화기관을 통해 섭취하기보다 차라리 생라면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생수 한 병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낫다는 식의 솔직함을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이 ‘솔직함’이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부족’이라는 설익은 여행자의 자질도, 방랑객의 고집스러움도, 맹목적인 배타성도 아니다. 그는 단지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강요할 수도 없는 문화의 상대성을 ‘존중’하기에 솔직할 수 있었고, 선택에 있어 지극히 솔직한 하나의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워하지 않고 그리워해본 적조차 없다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감성과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태초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포기한 것이다.(p12)  


그리워하지도, 그런 적조차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에게 그리움이란 가슴앓이 혹은 열병과도 같다고 종종 느낀다. 마치 가슴이 녹아내리고 미어지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그런 서글픈 쾌락이랄까. 가령 누군가를, 어떤 존재에 대한 통제할 수 없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들곤 한다. 단순한 그리움으로 시작한 이 감정은 그리움의 ‘형태’에서 그 ‘정체’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스스로를 그리워한다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자신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그리움이 어느 곳, 어떤 외부에서 밀려들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지만, 그리움은 이미 내 속에서부터 뻗쳐 나와 내가 인식하는 모든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막상 내 주변에 흩어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인, 나라는 존재가 그리움에 휩싸여 있는 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 그리워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 대한 그리움인 것이다.  


바깥에는 내 생에 한유했던 어떤 비밀의 오후가 멈추려 했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의 셔터는 깜박이는 눈과 같다. 어떤 것을 보는 순간은 뜬 눈이지만, 메모리가 되는 시간은 눈을 깜박이는 탄지의 순간이다. 그러니 실제로 촬영되는 어떤 광경이란 실제로는 사진가가 보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것이 카메라의 숙명이자, 사진가의 운명이다.(p20~p21)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부제에 대한 의문이 순식간에 풀리는 구절이다. 왜 김홍희는 실컷 잘보고 기록으로 남기고 했으면서도 무엇도 본 게 없다고 하나 싶었다. 카메라의 숙명이자 사진가의 운명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정말이지 전혀 의심하지도 않았던, 어쩌면 김홍희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래 나는 이 사진 속에 있는 것들을 보았지! 하는 착각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사진이 찍히는 그 순간,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셔터가 끊어지는 순간, 우리의 디지털 카메라 LCD 혹은 여타의 뷰파인더는 우리 눈에 무엇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잠시잠깐 까만 어둠을 선사할 뿐이고 우리는 그 어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그 어둠의 순간 너머의 영역은 오직 카메라의 렌즈만이 관할하는 하는 영역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짧은 어둠의 순간과 오롯이 마주하고 있을 때, 정작 내가 분명하게 봤고 찍기까지 했다고 착각한 그 결과물은 사실상 내 눈이 아닌 카메라의 눈만이 선명하게 보고 기억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일상에서의 일탈로 구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를 굳건히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일상 속에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일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삶.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일상을 버린 존재 확인도 없고, 일상을 버린 자유도 없다. 일상 속에서 일상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162~p163)

일상을 벗어나는 것, 소위 ‘일탈’이라고 부르는 그 어느 곳이든 자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자유란 구질구질하고 단조롭기 그지없어 지루하고 밍밍하기까지 한 일상이라는 굴레 속에는 절대로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방랑자의 발걸음은 일상과는 전혀 다른 이상향이라는 구름 위를 산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김홍희 역시 자신의 일상과는 다른 풍경 속에서, 그것도 방랑객으로써 내딛는 그 흔적들이기에 자유를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자유란 그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자그마한 내 방에도 자유가 있고 심지어 학교나 군대에도 자유란 존재한다. 다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때 자유란 어디든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닐까.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란 불가능하니까. 결국 관계란 것은 일상이라는 시 · 공간을 배제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숨 쉬고 사유하고 인식하는 ‘나’라는 존재의 참모습을 확인시키고, 그 곳에 자유를 흩뿌리는 씨앗과 같은 게 아닐까.  

 

*

햇귀님께서 선물해주신 영화『NEVER CRY WOLF』에서 주인공이 벌거벗은 채로 광활한 대지를 가득 메운 카리부 떼 속을 미친 듯이 휘젓고 달리는 명장면이 나온다. 대자연이 선사하는 꾸밈없고 자연 그 자체의 신비로움이 가져다주는 감흥에 젖어 태곳적 인간이라도 된 양 질주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 그 이상이었다. 김홍희 역시 몽골의 광활한 대지에서 메뚜기 떼를 온몸으로 받으며 내달렸다. 한 올 한 올 벗어던지기 시작한 옷들, 몽골의 대자연이 주는 감흥에 빠진 그에게 옷은 거추장스러운 부장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껏 벗어던지고는 몽골의 초원을, 사막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친 듯 내달린 김홍희의 흔적은 정말이지 인상 깊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친구 녀석이 가진 소위 ‘발로 찍어도 예술작품이 된다!’는 최신 카메라를 부러워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카메라를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그네들이 담아내는 결과물을 볼 때마다 시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발로 찍어도 심지어 애완견이 실수로 셔터를 눌러도 예술작품처럼 결과물을 쏟아내는 카메라보다 김홍희처럼 미소만 살짝 지어도 스스로가 예술작품의 한 풍경이 되는 그런 방랑자를 더욱 흠모하게 되었다. 내딛는 발걸음들이 불어오고 가는 바람결에 그 흔적이 사라져버린대도 그 속에 녹아들어 스며든 방랑객이라는 존재를 더욱 동경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이 책 말미에 인용된 몽골의 시가 인상 깊게 남는다. 문학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나는 왜 여태 깨닫지 못했을까. 몽골에 시인이 있다는 게 어떻게 이리도 생경하게 느껴졌을까.『몽골현대시선집』에 수록된 몇몇 인용된 시를 보면서 김홍희가 절절하게 느꼈던, 말하고 싶어 했던 생각이나 철학을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오랜만에 김홍희와 함께 한 방랑길, 끝없는 초원과 사막을 내달리는 고물 지프차의 운전수가 되고 싶었다. 생라면을 와그작와그작 부셔 먹는 그를 조수석에서 연신 지켜보고 싶었다. 캑캑거리길 기다렸다가 냉큼 물 한 모금 대령하고 팠다. 꺼내 문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댕겨주고 싶었으며, 가려줄 거라곤 하나 없는 그 광활한 대지 어느 한 점에 나란히 바지를 내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그곳에 영역표시(?)를 하고 싶었다. 이처럼 그란 사람은 늘 나를 애끓게 한다. 김홍희의 다음 방랑길을 기대하며 애끓는 마음을 추슬러본다.  


‡‡‡‡‡‡‡‡‡‡‡‡‡‡‡‡‡‡‡‡‡‡‡‡‡‡‡‡‡‡¨¨주워 담기¨¨‡‡‡‡‡‡‡‡‡‡‡‡‡‡‡‡‡‡‡‡‡‡‡‡‡‡‡‡‡‡

그때 참바가라브 산을 오르기 전에 찍은 신기루가 나타났다.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구나’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신기루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증명의 사진도 아니었다. 신기루를 보고 황홀경에 빠져 있던 과거 시간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그 순간에 빠진 황홀경의 감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감흥은 더 증폭되어 현재 나에게로 전이 되었다. 눈으로 보는 사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고스란히 찍고 전이시켰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선 짜릿한 교감이었다.(p146)  


몸을 위해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의 평온을 위해 스마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p181)  

 

=>방랑의 세 가지 조건!

“시장만 있으면 정부는 없어도 좋다.”
삶이 있고 활기가 있고, 나눔이 있고 보탬이 있고, 배려가 있고 여유가 있다면 우리는 통제하는 그 무엇이 꼭 필요하더란 말인가.(p238)

=>방랑이기에 가능한 진정한 자유의 맛이 아닐까? 경계도 허물고 시 · 공을 초월한 자만의 짜릿한 맛!  


인간의 본질을 묻고 본연의 자아를 묻던 이들은 모두 별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 이제 도시에서는 별을 볼 수가 없다. 별 대신 반짝이는 것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다. 도시의 인간들은 인간의 본질을 묻고 본연의 자아를 물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오직 네온사인을 켤 수 있는 돈에만 얽매여 하루하루 생존해나가는 슬픈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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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그레그 S. 레이드 지음, 안진환 옮김 / 해바라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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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너의 한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긍정적인 태도만 있으면, 우리가 못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단다.

조금 모자란 듯 이룬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대 이상을 해냈다는 데 대해 여전히 긍지를 가질 수 있지.

( ···중략··· )  


만약 모든 사람들이
비관론자들이나 어두운 미래만을 예측하는 사람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거다. 

네 신념대로, 네 꿈대로 행동해라.
오직 너 자신만이 네가 성취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아는 거다.”
..  


「..본문 中..」  


 

어제는 종일 날씨가 어둑어둑한 것이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마치 말뚝에 묶인 소 마냥 축 쳐진 기분으로 우울한 맨땅을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했다. 한번 가라앉은 이 기분이란 결국 뜻 모를 우울의 언저리를 끊임없이 맴돌 뿐임을 안다. 느닷없이,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밀려드는 온갖 서글픔들은 말로도 꼬집어낼 수 없고 손짓으로도 패대기칠 수 없는 무엇이다. 발짓으로도 날려버릴 수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 그런 무력감으로 나를 짓누르기 십상이다. 형태도 없고 뚜렷하지도 않은 이 감정선 앞에서,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나동그라져버린 어제는 마치 가슴앓이로 열병을 앓고도 남을 만큼 무겁고 혼미하기까지 했다.  


고작 날씨 때문에 그럴까,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중충한 날씨는 내 모든 걸 얼려버린다. 무엇 때문인지도 스스로 파악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된다. 그저 한없이 침몰하는 선상에 멀뚱멀뚱한 채로 자포자기의 심정이랄까. 그렇게 나는 나를 버린다. 내 숨을, 존재를 마음 어느 한 구석에 방기한 채로 오직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한다. 그러고 보면 여태 나는 이런 내 감정선의 몰락을 너무 나 몰라라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은근슬쩍 그 야릇한 쾌감을 즐겨왔는지도 모른다. 것도 아니라면, 분명 나는,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나 아예 외면했던 건지도. 


*

『10년 후』는 자기계발서이다. 몇 안 되지만 여태 내가 접했던『멘토』『마시멜로 이야기』,『It's Work』와 유사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책의 구성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형식,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들이 닮았다. 다른 구석을 꼽자면, 어느 어느 책에서는 체크리스트나 노트를 작성하면서 꿈을 이루는 팁을 주었다면, 이 책에서는 카드의 형식으로 쟁점을 간결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쯤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의 문제점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실천과 실행의 문제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어째서 매번 제자리걸음일까. 늘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구상하고 계획하며 실천한다. 이미 상상 속의 나는 버젓이 꿈을 이룬 채 내가 그리는 단출하지만 나름의 만족하는 삶을 대가로 받기까지 한다. 아니 몇 천 번이고 그런 결과를 이루었다. 결국 나는 ‘완결’이라는 의미를 너무나도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 속, 머릿속에서는 이미 완결에 완결을 거듭하는 시나리오를 탄탄하게 구성한 채 그것에 그저 ‘만족’하고 만 것이다. 결과는 언제나 머릿속 상상의 ‘나’에게만 주어질 뿐이며 결국 ‘소득’은 없는 그런 게으른 삶을 ‘부유하는 삶’이라 합리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어제와 같은 이 기분은 결국 마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부재로 인한 마땅한 결과인 듯하다. 스스로 충분히 다잡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손 놓고 지레 나를 놓아버리는 것에 너무 익숙했던 것이다. 마치 앞서 말한 것처럼 이미 나는 ‘완결에 완결을 거듭하는 시나리오’ 속에서만 이 기분을 탈피했다고 착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던 것이다. 늘 머리로만 몸을 쓰고 실천하는 그런 환시 혹은 망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그것에 너무나도 익숙한 채 시쳇말로 ‘똥인지 된장이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있었던 것이다.  


**

스스로를 추스르지도 못하는 나란 사람은 꿈을 꿀 자격도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다고 꿈을 가질 자격까지 포기할 순 없겠지.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허우적거리는 마음으로는 적어도 꿈을 꿀 준비가 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머릿속으로만 몸을 쓰는 그런 환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실재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머리가 아닌 실행하는 것이 자유로울 때만이 내 꿈은 비로소 첫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여, 이 책을 선물해준 ‘까까’가 부러울 때가 있다면, 닮고 싶은 게 있다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일 게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쾌활함을 넘어서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에너지를 선사해 본 적이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본다. 아닌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조차 낙천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내가 혹시나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말 한마디를 건넸다고 한다면, 그건 ‘짝퉁’에너지거나 적어도 ‘반쪽짜리’에너지에 불과했으리라.  


나를 돌보는 시간, 그런 시간에 익숙해지고 무르익어가기를, 그래서 좀 더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먼저 되기를 바라본다.  


‡‡‡‡‡‡‡‡‡‡‡‡‡‡‡‡‡‡‡‡‡‡‡‡‡‡‡‡‡‡¨¨주워 담기¨¨‡‡‡‡‡‡‡‡‡‡‡‡‡‡‡‡‡‡‡‡‡‡‡‡‡‡‡‡‡‡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현재 하는 일을 좋아하면
성공은 저절로 따라온다.(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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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 2011-11-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아 글이 정말 좋아요 인간의 내면을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 제가 반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요리사
KMA 지음 / 원앤원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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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대한 세상이 아주 복잡하다고는 하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할까 싶은 생각을 종종 하는 편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것이 지난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라고 표현하기엔 좀 어색하지만 분명 그러한 관계 속에는 생각보다 값진 보상이 숨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인 듯하다. 새로운 에너지, 일상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일종의 설렘, 지역과 나이 그리고 성별이라는 경계가 비로소 무의미해지는 작지만 깊은 희열감,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울타리에 대한 실감 등을 비롯해 많은 것을 주고받게 된다.  


이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는 서로가 일종의 타협점을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더군다나 서로 공통된 관심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타협점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쉬워지기도 하니까. 만약, 어떤 ‘환경’이라는 요소가 보태진다면,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더욱 복잡해지는 것 같다. 아직 직장생활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다소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일지도 모르지만, 원론적인 시각(?)에 비춰보면 어떠한 특정 조직을 이루는 구성원들 간의 관계란 학문적인 차원에서 다룰 만큼 복잡한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

『마음을 움직이는 요리사』는 인적자원관리나 조직행동론을 연상케 한다. 조직전체에 위기가 닥쳤을 때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즘 기업(경영)의 미래는 사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여봐란듯이(?) 광고를 하는 기업을 보면서, 조금은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다, 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아무튼 이 책은 그렇다!(??) 

 

꽤나 흥미롭게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다름 아닌 재미가 있었다(?), 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기업 내 사원들의 교육목적으로 창작뮤지컬을 만들었는데 기존의 딱딱하고 지루한 프로그램에 비해 아주 반응도 좋았으며, 효과와 만족 역시 아주 높았기 때문에 책으로까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몽블랑’이라는 레스토랑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인물들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만큼 그냥, 재미있다! 따뜻하기도 하면서 때론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던, 자기계발서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가 있는 내가 재미나게 읽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면서.

 

**

뮤지컬을 책으로 옮겨서 그런지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한, 연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한, 무대를 상상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제스처도 번번이 떠올려보게 되는 그런 편안하면서도 재미도 있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일련의 우화적이면서도 단조롭다 못해 앞부분만 대충 읽어봐도 뒤에 이어질 스토리가 눈에 훤했던 기존 계발서들의 이야기 구조에 비해 월등하게 낫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문학적인 성향이 좀 더 짙기 때문에 ‘소설처럼’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덧붙여, 마침맞게 다니엘 페나크의『소설처럼』과 번갈아 가면서 읽게 된 이 책은 다니엘 페나크가 강조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가미함으로써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격으로 편식의 대마왕(?) rainlife도 재미나게 읽게 만든다!(?)를 느끼게 한 책인 듯하다. 그 단순한 것이란 이야기를 듣는 것 혹은 듣는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 조성이랄까. 다니엘 페나크가 강조한 ‘무상성’에 충실했다고 봐진다. 어떤 강요나 요구, 교육적인 측면을 우회적으로 이야기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저 즐길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도록 편안함을 제공했다는 것,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비로소 책으로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소설처럼’ 부담 없이(?) 즐겁고 후련하고 가뿐한 기분으로 읽은 자기계발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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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 희망무역 - 아시아의 여성 공정무역을 중심으로
김정희 엮음 / 동연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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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3학년 어느 때, 뜬금없이 물음 하나가 나를 옭아맸다. ‘나는 통상학을 전공해서 뭘 하려는가?’ 이 물음은 말하기는 쉬워도 생각보다 골이 깊은 문제였다. 그저 수능성적에 맞춰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고 말 그대로 ‘그냥’ 학교를 다니고 ‘그냥’ 전공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강의시간에는 무역법률, 무역계약론, 결제론, 운송론, 보험론, 소비자 마케팅, 금융론, 외환론 등등 오로지 상행위에 적법한 사고를 요구하고 여태 다져진 일련의 ‘룰’을 따르는 수동적인 자세만이 강조되었다. 이런 것에 대해 깨닫기 전까지 나는 ‘그냥’ 졸업해서 ‘대충’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가 ‘그저 그런’ 끌려가는 삶을 너무 일찍 허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 시작된 물음은 꼬리가 길다. 강의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말이 인간이 하는 상행위이지 기계적인 사고와 마인드를 주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통상학을 가르치는 모든 학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물며 현장에서 직접 무역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모두 인간미도 없고 기계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폄하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우리학교’에서 내가 접한 통상학 강의란 것이 지극히 ‘통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물음은 의문의 탈을 쓰면서 ‘인간이 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오직 기술적인 부분만 주입하는가?’에 머물렀다. 오직 ‘거래행위자’로서 수동적인 ‘나 아닌 나’가 되어가는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 오더라는.  


어쨌든 간에, 나는 무책임하게도 전공을 버렸다(?). 최소이수학점만을 ‘안전빵’으로 수강하고 다른 전공을 전전(?)했다. 경영학과, 사회복지학과, 문예창장학과, 사회학과, 사학과 등등을 무차별적으로 들락날락거렸다. 그 중 하나가 걸렸는데, 결국 부전공을 하게 된 사학과가 그것이었다. 특별히 역사의식이 투철한 것도 아닌 내가, 역사에 관해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도 아닌 내가 사학과 수업을 들었던 이유를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했던 것 같다. 첫째가 교수와 학생 간에 ‘말이 통한다!’는 것(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고 토론하는 분위기?)이었고 둘째가 시험문제가 주관식 서술형이라는 것(시험공부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셋째는 강의실 분위기가 아주 조용하고 엄숙(?)했다는 것.  


사학과 첫 강의는 ‘한국사회경제사’라는 과목이었다. 만약, 이 과목에서 ‘공정무역’이라는 부분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라면, 굳이 사학과 수업을 계속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대학생 둘이 세계여행을 하던 도중에 공정무역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Veja’라는 운동화 브랜드를 만들어, 원재료를 공급하는 원주민들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진국의 ‘윤리적 소비자층’의 욕구와 만족감을 충족시키고 원료를 공급하는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시스템을 구축한 이 두 젊은 청년의 예를 통해 내가 전공수업에서 강의해주길 바랐던 게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무역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도 공정무역에 관해 개설된 강좌도 없었고, 그것에 대해 진중하게 언급하는 교수도 없었다는 것! 그것이 내 골 깊은 물음의 실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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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에둘러 왔다.『공정무역 희망무역』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공정무역에 대한 연구와 일본과 한국, 크게는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공정무역의 현황을 담은 희망보고서이다. 이 책에 담긴 글은 논문과 이미 다른 곳을 통해 기고된 글을 수정한 것, 대담과 인터뷰, 인용자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소 딱딱한 맛이 없지 않지만, 간간이 삽입된 사진과 공정무역이 ‘살맛나는 무역’이고 ‘희망무역’임을 알아감으로써 상쇄된다.  


이 책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페미니즘적인 성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네팔이나 인도 등지에서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여성임을 알게 된다면, 오해하지 않은 채 공정무역의 한 예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공정무역 대상자인 여성들에게서 희망무역이 싹트는 이유를 꼽자면, 대체로 이 지구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이를 가족에게 투자한다. 아이를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며 집을 가꾸거나 장만하는 등의 생산적인 부분에 소득의 일부분 혹은 전체를 쏟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공정무역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큰 것이 아닐까. 어떤 부의 창출로써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것 이상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의 ‘네팔리 바자로’와 한국의 ‘두레생협연합회’, ‘페어트레이드 코리아’의 역할과 모색하고 있는 방향, 어려움과 보람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설립자와 동참하는 많은 이들(이들 모두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사람들이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공정무역의 기틀을 잡아가는 아시아 중심의 이 단체들은 정말이지 대단하거니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의미를 넘어 여성과 가난한 이들의 인권, 아이들이 꿈을 갖고 웃으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계 전체를 기획해나가는 그들의 노력은 정말이지 가슴 찡한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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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한계니 새로운 돌파구는 무엇무엇이니 하는 탁상공론에 진절머리가 날 때가 많다. 그네들의 말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도, 감동도 주지 못한다. 이론과 견해 · 주장들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의 결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실질적으로 발로 뛰면서 작으나마 현실을 그려나가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은 저명한 학자들이나 기득권층의 ‘구상’에 그치는 주장에 비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가!  


나는 지적 오만을 아주 부정적인 것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때론 지적 오만이 의식적으로나마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타인에게 상처 혹은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충분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그것이 변화가 없는 ‘오만’ 혹은 ‘태만’에 그친다면, 더군다나 이런 행태가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계층의 전유물처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남용된다고 한다면 이는 부정적이 아니라 ‘사회악’ 그 자체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는 곰곰 해봐야 하지 않을까. 입과 머리로만 ‘명품 시스템’을 끊임없이 생산 · 재생산하고 있는 치들을 우러러 볼 것인가, 아니면 작으나마 실질적으로 행동하고 징검돌을 놓듯이 하나하나 세계를 직접 그려나가는 이들의 땀방울을 우러러 볼 것인지를 말이다.  


수도가 없던 시절, 펌프에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해서 한바가지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마중물을 한바가지 붓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생명수처럼 물이 콸콸 올라온다는 것을 아직 어린 나이지만 나 역시 경험해보았다. 공정무역 · 희망무역을 외치며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 마중물과 같지 않을까 싶다. 징검돌을 조용히 날라다 놓고 또 놓으며 전 세계에 희망수· 생명수를 나르는 그런 물장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들의 한바가지 마중물이 세계 곳곳에 희망과 생명을 퍼뜨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각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작으나마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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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세상을 훔치다 - 우리시대 프로메테우스 18인의 행복한 책 이야기
반칠환 지음, 홍승진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몇 번의 북로그 모임을 통해 느낀 점이 있다. 그 중 가장 값진 것, ‘확실하게’ 느낀 것을 꼽자면, ‘누군가’와 책에 대해서,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종일토록 책에 대한 이야기며 그에 얽힌 각자의 경험담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지루하지도, 그럴 틈조차 없다. 많은 독서관련 책에서 책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벗’을 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왜 이 점을 강조하는지 직접 경험해보니 입이 닳도록 침이 마르도록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물론 온라인상의 교류 역시 아주 값진 경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애석하게도 북로그를 하기 전까지, 물론 지금도 내 친구들 중에는 북로그 이웃님들이나 직접 모임을 통해 만나는 분들처럼 ‘확실한 독서 벗’이 없다. 아니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을 듯.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책도 선물해보고 꼬드겨보기도 했다. 아예 ‘수다’를 시작하면서부터 책이야기만 주구장창해보기도 하지만 역부족이다. 웬만해선 내게 대거리를 하거나 반항(?)하지 않는 녀석들이지만, 책이야기 앞에서만큼은 마치 철옹성의 커다랗고 탄탄한 성벽처럼 완벽한 방어태세를 유지한다. 녀석들이 참으로 얄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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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세상을 훔치다』『책, 세상을 탐하다』와 유사한 구성과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열여덟 명의 ‘프로메테우스’들이 책에 대한 감상과 자신들의 최근 생활, 독서를 시작하게끔 해준 책 혹은 최근에 기억에 남는 책,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 등등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덧붙여, 여기 실린 글들은『사람과 책』2004년 7월부터 2006년 1월까지 연재한「나의 서가 이야기」를 엮은 책이기도 하다. 책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교보문고에서『사람과 책』과월호를 열람하는 방식으로도 책 내용을 접하실 수 있으니 참조하시길.  


이 책에는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이 나온다. 가장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故 장영희 교수의 사진을 보면서 가슴 한 켠이 많이 아리고 아팠다. 이 인터뷰 당시『문학의 숲을 거닐다』가 베스트셀러에 올라 많이 유명해졌다고, 앞으로는 좀 안 유명해졌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장영희 교수를 만나니 더더욱 그리움이 짙게 깔렸다.

다음으로는 요즘 들어 많이 좋아하게 된 사진작가 김홍희이다. 그 특유의 입담과 세상에 관한 철학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가장 인상 깊게 본 책들은 죄다 여행기나 표류기였다. 그의 방랑벽의 기원을 알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밖에도 아침편지를 배달하는 고도원, 가수 김창완, 화가 김점선, 시인 장석주, 바람의 딸 한비야, 번역가 김난주, 프리랜서 백지연, 작가 유용주 등등 내 관심 안의 분들이 참 많아서 읽어나가는데 더없이 신나고 의미 있는 독서였다.

덧붙여 인터뷰 연재를 담당했던 시인 반칠환의 글은 아주 감칠맛난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고 문장마다의 표현력은 물론 자연을 벗 삼아 놀아본(?) 적 없는 사람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하고 푸근한 맛이 인상 깊다.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좋은 느낌과 인상으로 깊이 각인된 것이 부수입으로는 꽤나 짭짤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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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세상을 탐한다는 것, 세상을 훔친다는 것은 사람의 손과 입, 그런 행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책은 스스로 힘을 갖지 못하며 절대 빛을 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누군가 책 속에 담긴 내용을 읽어내는 즐거움 혹은 수고로움이 없이는 그저 그 옛날 뒷간에서 볼 일을 보고 마구 비벼서 용무를 마무리(?)하던 신문‘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결국 사람의 손을 타야만 책은 비로소 ‘책’으로 명을 이어갈 수 있으며, 유용한 쓰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독서라는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 삼박자가 갖춰져야 한다면, 나는 이 삼박자가 ‘책’과 ‘사람’ 그리고 ‘벗’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세상을 훔치려면 적어도 마음이 맞는 공범(?)이 좀 있으면 수월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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