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ox 포토박스 2009.10
이미지파인더 엮음 / 이미지파인더(월간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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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덤’이라는 개념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개념인 듯하다. 덤이란 ‘물건을 사고팔 때, 제 값어치 외에 조금 더 얹어 주거나 받는 물건’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단순히 조금 더 주거나 받아온다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잠시나마 맑게 웃을 수 있게 하는, 그런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는 온정과도 같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이를 조금 악용(?)한 적도 있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럽기도 하다. 덤으로 주기도 전에 먼저 덤으로 받고 싶은 걸 낙점하고서 시건방지도록 당당하게 요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PHOTO BOX』는 그렇게 시건방지게 요구해서 덤으로 갈취한(?) 책이다.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그 꼬장꼬장한 주인 할배의 헌책방에서 김중만의『동물왕국』과 태평양전쟁 당시 상황을 사진자료로 담아 정리해놓은 오래된 판본(70년대)인太平洋戰爭을 똥값으로 얻은 것도 모자라서 저, 저기 쪼매한 책 끼워주시면 안됩니까(들릴 듯 말 듯 잔뜩 주눅이든 목소리로), 하고 간도 크게 스스로 덤을 요구하다니! 사실 그날 주인 할배가 기분이 좀 좋으신 것 같아서(햇수로 6년 만에 처음으로 커피 한 잔 얻어 마신 날이었으니!) 아예 작정을 했었던 것 같다. 


집에 와서 찬찬히 살펴보면서 아차! 싶었던 건, 난 그저 어느 잡지를 사면 부록으로 끼워주는 그런 비매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가 5000원에 달하는, 보기에는 작고 볼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엄연한 사진 잡지더라는. 그때서야 어이쿠! 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었구나, 싶더라는. 그날 이후로는 절대 헌책방에서 끼워 달라니, 값을 좀 깎아달라니(사실 단골 헌책방 두 곳에서는 절대 주인 할배가 셈한 값을 깎지는 않는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즘은 당돌하게도(?) 너무 쌉니다, 다시 셈해주세요, 하는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래봐야 늘 내 손에 쥐어지는 책들은 너무 싸다!  


*

내가 겁도 없이 덤으로 갈취해온『PHOTO BOX』는 아마 2월호(‘+02’라고 새겨져 있다)인 것 같다. 크기는 작지만 꽤나 내용이 옹골찬 잡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좋아해서 동호회활동을 하거나 아마추어, 프로 사진가들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 또 사진은 물론 미술관련 전시일정도 정리되어 있으며, 후반부에는 메모를 할 수 있는 공간(엽서로 사용해도 괜찮을 법한 메모지?)도 근사하게 꾸며져 있다. 이밖에도 사진을 주제로 한 카페나 스튜디오정보, 포토샵 강의, 카메라에 대한 궁금증, 새로 출시된 카메라를 비교·분석하고 있으며, 카메라 부수기기에 대한 꼼꼼한 리뷰는 물론 사진에 도움이 될 만한 서적들 소개까지, 실질적으로 사진을 찍는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로 그득하다.

 

비. 내 리 는 풍 경 이 좋 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마치 그걸 예고하듯이 비가 올 듯한 구름이 만들어진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 설레임처럼 나는 비를 기다리고 있다. 곧이어 비가 내리면, 빠르게 흐르던 도시의 모습들이 비로 인하여 잠시 더디어진다. 달리던 버스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참을 바라본다. 회색빛 도시 위 젖은 티셔츠, 젖은 신발들. 소리를 잃은 듯 그렇게 세상이 고요해지면, 점점 커져 오는 빗소리가 묘한 감성을 이끌어 낸다.

∥『PHOTO BOX』_ 김대현「Rainy Day」中..∥

이 작지만 그득한 녀석과의 첫 만남이 더없이 인상적이었던 이유가 있다. 거의 첫 코너에 소개된 김대현 작가(아마 취미로 사진을 찍는 대학생인 듯하다)의「Rainy Day」라는 작품들 때문이다. 그가 느끼는 비오는 날의 감성은 작품 속으로 나를 빨아들이기 충분했으며, 작품을 떠나 그와 아주 긴밀하게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 설레임처럼 나는 비를 기다리고 있다’는 작가의 말은 곧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아주 보기 좋은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대변해주는 듯했다. 묘한 감성을 자극하는 그 빗소리의 매력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은 참으로 기분 좋으며 오묘한 일이다. 더군다나 사진이라는 표현 도구를 통해서라 그런지 더더욱...

평범한 일상이지만 빗소리 하나하나에 귀 기울여 바라보기

 

나의 이런 묘한 심리상태가 내 손끝으로 이어져 빗속에서 빗소리와 함께 셔터를 누른다.
‘찰칵’
실내로 들어간다. 경쾌했던 빗소리가 사뭇 다르게 들린다. 다음 빗소리 트랙으로 넘어간 것이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창문을 두드리며 흐르는 비가 나의 가슴을 울린다. 그것은 어쩌면 창밖의 세상들로 하여금 내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을 하게 만들지도 모를 풍경. 

 

잊 고 지 냈 던 추 억 들 이 비. 와 함 께 뿌 려 진 다

∥『PHOTO BOX』_ 김대현「Rainy Day」中..∥

잊고 지냈던 추억과 만나는 시간. 그 추억들이 비와 함께 뿌려지는 시간. 그래서 더더욱 숨을 죽이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지도 모를 그런 시간. 어느새 내가 흐느끼게 될지도 모를 그 막연하면서도 야릇한 시간이 비가 내리면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피어난 시간들은 비가 그치기까지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빗소리에 담긴 많은 감정과 추억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피어올라 물이 내어주는 여행길을 따라 세상 곳곳으로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비가 오는 날이면 무작정 비를 맞으며 곳곳을 누비고 싶은 충동이 이는지도.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우산으로 반을 가리고 세상을 본다.
나는 가려진 그 반을 나만의 시선으로 사진에 담아 보았다.
우산에 가려 볼 수 없었던 우리의 평범한 일상, 비 오는 날의 모습들이다.  


∥『PHOTO BOX』_ 김대현「Rainy Day」中..∥  


그러고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비오는 날을 사진으로 담아본 경험이 없다. 그렇게 마음먹은 기억조차 없는 것 같다. 그저 음악을 듣는 기분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추억에 젖고 잦아들고 노닐었을 뿐이다. 내 눈으로 기억했던 그 많은 비 오는 날의 풍경들은 어느새 흐릿하기만 하다. 오직 몸으로 기억하는 풍경들만이 표현할 길을 몰라 뒤섞여 피고 질뿐이다. 언젠가는 빗소리가 담긴 그런 풍경을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그와 작품을 만나서 더없이 반갑고 기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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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11-15 0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헌책방에서 책을 산 적은 없고 제 것을 가져다가 바꿔온 적은 있어요. 근데 그게 문제집이었다는..^^; 독해집이 필요해서 바꿔왔었죠. 그래서 전 헌책방의 계산법을 잘 몰라요.^^;;다음번에도 책을 몇 권 들고가서 바꿔와야지 했다는...^^ㅋ

이 책이 그 덤^^? 비가 싫을 수도 있고 눈이 싫을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눈,비오면 불편하니깐...그런데 그 걸 그냥 자연의 감정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또 괜찮더라고요.^^ 천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음 마음이 편안해 져요.

ragpickEr 2009-11-18 13:47   좋아요 0 | URL
와~^^* 맞교환이군요..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서..^^* 멋진데요?
계산법은 저도 몰라요..^^* 주인할배의 계산법이 있겠지요? 저는 이제 순응하려구요~좋은 책에는 제각각 제 값이 있겠지요~으흐흐~

네..제가 달라고 해서 빼앗은(?) 덤이 이 책이야요..^^*;; 부끄럽네요..;덤을 달라고 떼를 썼으니..;; ㅋㅋ

비나 눈..더운 날이나 추운 날 모두 불편한 점이 있기 마련이겠지요..그걸 되도록이면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창조적인 행위 이상의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것 때문에 비를 좋아하고 그런건 아니지만요..후훗.. '천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음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나곰양의 말씀이 참 좋으네요~^^* 으흐흐~

오늘도 멋진날 보내셔요~!! ^^* 이얍~!!
 
하늘색 지도
나시야 아리에 지음, 박소연 옮김 / 가람북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래된 농담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이 혹은 어떤 관계들이 마치 오래된 농담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기억은커녕 전혀 의식하지도 못했던 그런, 어떤 혹은 어느 농담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농담처럼 내뱉고는 돌아서 잊히기도 전에 잊었던 그 어떤 말을, 누군가는 오래도록 깊은 약속처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많은 사건들 중에는 이처럼 아주 오래된 농담 같은 일들이 생각보다 많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

『하늘색 지도』는 오래된 농담처럼 내게 왔다. 기억이라는 소유권을 스스로 망각해버린 어느 시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달려 온 것이랄까. 책 속에 고스란히 펼쳐지는 두 소녀의 이야기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과거의 ‘나’에게서부터 온 의문의 편지 한 장에 어리둥절하게 되고, 아주 오래전 진정으로 내뱉은 다짐과 만나게 된다. 그 다짐과의 첫 대면, 추억으로의 여행을 하면서 어리둥절하고 쉽사리 믿어버리기엔 너무나도 농담 같았던 그 시절의 자신을 발견해나간다. 


그에 앞서, 이야기의 첫 장면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두 소녀는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이 있기에 서툰 솜씨로 관리인의 눈치를 살펴가며 가슴 졸이는 길거리 연주를 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안고 아주 긴 추억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렸을 때 세상은 무척 작았다. 작은 세상에 있을 때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따뜻하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점점 지평선이 빛을 받아 나의 세상이 넓어지면서 나는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단련하고 덩치는 커졌지만 세상의 거대함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고 있었다.(p121) 

 

순수했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값지고 빛난 그 시절에는 누구나가 세상 앞에 당당했으리라. 물론 두려움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두려움이란 무지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에 지나지 않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 뭔가를 조금씩 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넓다, 는 설렘 가득한 사실과 더불어 그 넓다는 사실만큼 반비례, 혹은 그 이상으로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두 소녀는 지난날의 아름답고 소중한, 때론 기억하기 싫은 것들과 더불어 만나면서 지금의 스스로를 인지하게 된다.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지난날에 비해 내 꿈은 얼마나 커졌고 혹은 작아졌는지 등을 되짚는다. 무엇을 잃었는가, 에 대한 해답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해답을 찾기 위해 두 소녀는 그 어느 때보다 용기 있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추억 속으로 그리고 새로운 도전 속으로 달려간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언젠가 혼자서 날아오를 것이다.(p198)

 

그렇다. 두 소녀는 아직 ‘여기에’ 있다. 의문의 편지를 받아들기 전까지, 두 소녀는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비로소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그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과,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다음 단계를 위한 계획과 도전인 ‘언젠가 혼자서 날아오를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두 소녀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어느 철학자보다 더 멋지고 의미심장한 문장을 가슴에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존재한다는 인식 그 다음은 바로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꿈과 도전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 짧은 두 문장으로 정리했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오버해서 궤변을 해내는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때로는 스스로를 텅 빈 비닐봉지 같다고 느끼기도 하겠지만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자신을 얻은 미나기처럼, 그리고 글라이더를 타고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하쓰네처럼 다시 일어서서 자잘한 즐거움과 모험을 즐기며 앞으로 걸어갈 것이라 생각한다.∥옮긴이의 글 中 _ p207∥ 


**

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의『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와 비슷하면서도 느낌이 많이 다른 이야기랄까. 엇비슷한 또래의 소녀들이 등장한다는 것이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그 느낌은 꼭 ‘천진난만’하다는 차이를 보이는 듯하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야기는 조금은 선명한 색채와 색감이었다면, 이 책은 파스텔의 아련한 느낌이면서 아주 어린 꼬마들이 장난감 삼아 마구 다룬 삐뚤빼뚤한 크레바스 같은 느낌이랄까. 뭔가 은은한 색으로 옅은 안개가 걷히는 듯하지만, 처음 사용해보는 크레바스에 힘을 너무 많이 줘버려서 조금은 서툴고 거친 맛이 난다고 할까. 그래도, 어쩌면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두 소녀는 천진난만한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보면 짧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설핏한 하늘색 이야기는 하나의 소품 같다. 조금은 앙증맞은 느낌이고 설익어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도입부에 등장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인내심 있게 책의 마지막 장까지 무사히 덮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천진하게 웃어볼 수 있는 작은 여유가, 그런 시간이 행간들 사이를 까르르하고 흐르기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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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코 2010-01-1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웃~!..깜딱이야~! 여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요...정말 놀랐어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말...이때 해당하겠네요... 소설의 내용보다..북글이 더 멋지니까요..

ragpickEr 2010-01-19 13:37   좋아요 0 | URL
마루코님^^* 후훗.. 그러게요..^^* ㅋㅋ 서프라이즈~~?
(여전히 잘 지내시나요? ^^* 한동안 너무 안부를 여쭙지 못해서..죄송해요;;)

무슨 그런 말씀을요..;; 소설도 북글도 아닌..옮긴이의 당부메시지가 더 멋진걸요? ^^* (파이팅!!)

고맙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제가 감기 때문에 죽을 뻔 했어요;;ㅋ)
 
첫 키스에서 중요한 것은 사거리의 거북이 4
띠에리 르페브르 지음, 박희세 옮김, 신얼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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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들에는 왠지 모르게 설핏한 미소가 어울리는 것 같다. 물론 설핏한 그 미소는 아주 짧은 순간이다. 기억을 더듬어 추억의 한 장소를 발견하는 그 시점에서 찰나에 증발해버리는 아련함이다. 시간을 되짚어 꺼내고 또 꺼내는 추억들은 조금씩 ‘빛바랜 것’이라는 의식과 뭉쳐져 어느새 그 찰나의 미소는 조금은 씁쓸하게 조금은 가슴 저리게 변하고 만다. 그 정도가 심하면, 길어낸 그 추억과의 조우가 길어지면 때때로 한숨과 함께 담배 한 개비를 물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첫’이라는 이 글자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시간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비로소 ‘지난 것’이 되어야 ‘첫’이라는 글자는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되고,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첫’은 더더욱 애잔한 무엇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네 기억이란 게 이 ‘첫’이라는 글자로 인해 더욱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숨이 섞이든, 씁쓸하거나 가슴이 아프든, 아련함과 애잔함으로 몸서리마저 치게 되던 간에 마치 우리네 의지와는 무관하다 싶을 정도로 이 ‘첫’은 늘 기억 속에 기필코 각인되고야 마는 고약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

『첫 키스에서 중요한 것은』프랑스 소설이며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첫 키스에 대한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가진 주인공이 어떻게 첫 키스에 성공하게 되는지를 그리고 있다.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생각보다 각 장의 에피소드들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진지하기도해서 참 재미나게 읽었다.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첫 키스에 대한 주인공의 절망(?)이 그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가 아주 인상 깊었다. 


키스에서 시작된 호기심과 만감이랄까, 이는 ‘사랑’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이것의 계기가 된 것이 앞서 말했던, 아주 인상 깊었다던 그 절망을 포함한 장면이다. 낙담일수도 있고 열등감일지도 모를 그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주인공은 자신만의 ‘섬’을 만들어간다. 그 섬이란 사랑으로 만들어진, 은하수처럼 맑디맑은 주옥같은 자신만의 사랑의 표현들로 눈부신 섬이다. 어느새 주인공은 시를 쓰며 자신의 절망과 고뇌, 좌절을 치유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젊은 날, 아니 어린 날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에 대해 사색할 수 있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으랴. 그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또 있으랴. 더군다나 자신의 내면과 영혼까지 바쳐 시를 지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또 얼마나 값진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이었겠는가. 첫 키스에 대한 호기심으로 키스라는 행위에 집착하고 골몰하는 것을 뛰어넘어 사랑이라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에 시로써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는 것만큼 황홀하고 깊이 있는 청소년시절의 성장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고 멋지고 당당한 것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

모든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첫 키스에 대한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 역시 현실에서의 행위를 머릿속이라는 공간에서나마 자신만의 색으로 형태로 풀어내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과 금지된 것이라 규정된 틀 사이에서 모든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왜곡을 경험하게 되고 사실 혹은 진실과는 너무 다른 것에 탐닉하기도 한다. 할 수 있는 것과 금지된 것 사이의 그 틈이야말로 청소년들의 순수한 감정을 보호해준다고 여기는 어른들의 생각은 얼마나 바보스럽고 많은 부작용을 낳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호기심에 찬 순수한 열망에 휩싸인 청소년들의 그 고귀한 상상이란 늘 현실에서의 금기와 좌절로부터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의 보호와 관심을 가장한 간섭 때문이 아니라 그 고귀한 상상은 스스로의 건강한 감정의 결과물일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서툴지만 내적성숙에 이르는 그 과정은 오롯이 아이들의 몫이며, 그 결과 역시 아이들이 노력한 결과물일 것이다. 결코 어른들의 보호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 착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결국 아이들의 그 고귀한 상상이란 스스로를 성숙시켜나가는, 그 사이사이의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의지의 한 표현인지도 모를, 어쩌면 오묘한 마법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첫 키스에서 중요한 것, 그것은 평생토록 기억하는 것이다.(p129) 


결국 첫 키스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이란다. 그것은 자신의 섬(시)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을 오롯이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시를 쓰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단순한 행위로서가 아닌 진정한 사랑의 실체를 깨달아가는, 그런 자신의 변화를 평생토록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밀려드는 호기심과 다채롭고 때론 위태로워 보이는 그네들만의 모호한 감수성은 결국 자신만의 색과 특징을 지닌 위대한 ‘섬’을 탄생시키는데 소중한 의의가 있는 건 아닐는지. 

 

어쩌면, 첫 키스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홀로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당당히 이를 극복해 일어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그것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는 것, 그것을 평생토록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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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글쓰기엔 뭔가 비밀이 있다 CEO의 비밀
닉 사우터 지음, 정윤미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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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서 그렇게 한참을, 며칠씩이나 ‘곰곰’하다가 나도 모르게 어느 지점(?)에 도달하게 될 때, 하나의 낙서가 탄생(?)하게 된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 같다.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펜을 들거나 키보드를 두드리기 마련이다. 어떤 글쓰기건 간에 나만의 원칙이나 순서 따위는 없는 듯하다. 아니,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뭔가 이끌려 나올 때까지 생각만 한다는 걸 빼면 내 글쓰기는 늘 즉흥적이고 지극히 알맹이가 없는, 그런 감상을 빙자한 궤변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이다.  

 

*

『CEO의 글쓰기엔 뭔가 비밀이 있다』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위한 창조적인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의 행동을 유도함으로써 보다 생산적이고 효과적이며 흡족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글쓰기는 어떠해야하는지를 십여 가지 단계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간단하게 그 과정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가장 먼저 글쓰기의 목적을 스스로가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비교적 간단한 심리학적 이론을 활용하여 자신은 물론 글을 읽을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한 후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를 정한다.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어떤 구조로 작성할 것인지도 정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 및 계획단계를 거쳐 초안을 작성, 수정, 최종글쓰기에 이르게 되며 꼼꼼하게 완성된 글을 교정하는 단계를 지나면 글쓰기는 완성되는 것이다.  


**

이 책은 비교적 무겁지 않은 기분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창조적인 글쓰기를 가르친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비즈니스 글쓰기에 대해 무지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떤 글이건 쓴다고 생각해보면, 이미 우리 머릿속에서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러한 버릇은 나도 모르는 사이 책에서 말하는 준비 및 계획단계와 더불어 초안을 작성하는 단계까지 이루어지는 것 같다. 창조적인 글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진행되는 그런 과정들을 쉽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반성하게 되었던 부분이 있다면, 글을 수정하고 맞춤법을 검사하고 윤문 및 교정하는 단계라 하겠다. 나는 늘 얼렁뚱땅 써버리고는 나 몰라라 하는 버릇이 골 깊게 박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막연한 그 과정을 지나 노트나 컴퓨터에 옮겨지고 나면 내가 쓴 글이지만 가물가물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글을 다듬고 고쳐나가는 단계가 없으니 막상 내가 쓴 글이기는 하지만 누군가 내용에 관해 물어오면 우물쭈물하기 일쑤다. 좀 더 글을 다듬어보는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어떤 작가는 글쓰기를 육체노동에 비유한다. 또 어떤 작가는 글쓰기를 지난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글의 성격이 무엇이건 간에, 하물며 우리가 쓰는 작은 낙서에서부터 일기나 리포트, 보고서 등까지 행여 그것이 사소한 글쓰기라할지라도 어떤 일련의 과정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글을 완성시키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정갈한 글쓰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역시나 중요한 건 시간과 더불어 노력인가보다. 


덧붙여, 우스갯소리해보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뭔가 있을 것 같은 비밀은 이 책속에 없었던 것 같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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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분노 - 때로는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조병준 지음, 매그넘 사진 / 가야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이미 오래전, 낯선님에게 선물 받은 이 책은 늘 눈에 밟히는 곳에 꽂혀 있었다. 그렇게 책등만을 훑었고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체 아저씨’만을 보곤 꽂아두기 일쑤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여태 난 몰랐었다.『따뜻한 슬픔』의 저자인 조병준 시인이 여태 책 속에서 분노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고, 매그넘의 사진이 실려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랬다. 난 그저 ‘체 아저씨’가 커다랗게 표지를 장식하고 있던 것에만 관심을 쏟았을 뿐이었다. 그저 난, 책 제목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몰랐고 바보가 따로 없었다.  


세상의 모든 성현들이 분노하지 말라고 가르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사람이 다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분노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을 때,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냉철해진 머리로 생각을 해도 그 분노가 정당한 분노일 때,
불의의 부패와 부도덕이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고 머리가 아니라 몸이 비명 지를 때,
그럴 때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때로는 인내가 아니라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불의와 부패와 부도덕이라는 이름의 탱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할 때,
약하디 약한 살과 피만 가진 인간이 그 앞을 막아설 수 있는 힘은 분노뿐이다.
..  


∥본문 中∥

『정당한 분노』는 조병준 시인이 매그넘의 사진들 중 우리네 분노를 자극할, 분노를 불러일으킬만한 사진들을 골라 글을 단 책이다. 조금은 과격한 구호(?)를 외치며 마치 1인 시위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혹은 거짓을 ‘정정당당’, ‘합리’, ‘사실’이라고 왜곡·조작·조장하는 이들에 당당히 맞서는 소수정예의 정당한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선봉에 선 자의 절규 혹은 외침이랄까. 금방이라도 게릴라부대를 조직해 적(?)들을 응징하러 떠날 것만 같은 조병준의 분노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피와 눈물. 피는 금세 마를지 몰라도 눈물은 그렇게 빨리 마르지 못한다. 어떤 기억에는 시효 소멸이 없고, 그리하여 어떤 눈물은 생이 끝나는 날까지 흐를 수밖에 없다.(p42) 

 

어쩌면 언제든 슬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삶은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없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아픔·슬픔·눈물 앞에서 당당하게 함께 슬퍼할 수 있고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그런 연습을 하지 않고서는 생이 부려놓은 오묘한 퍼즐을 완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때론 들끓는 피가 아닌 가슴을 녹이는 눈물이 강인한 생명과 더불어 정당한 분노를 진정으로 ‘정당한 것’으로 만들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 울고 있을 때,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때 다가가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 생물학적 본능을 잃어버렸다. 허가 받은 집에 살면서 허가 받지 않은 집이 철거되는 건 그저 타인의 개인적인 불행일 뿐이라고 외면한다.(p87)  


한 강의 소설『눈물상자』를 보면 ‘눈물단지’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나온다. 어쩌면 그 아이가 흘리는 ‘순수한 눈물’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생물학적 본능이 아닐까. 아이가 간직하고 흘리는 그 순수한 눈물이란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흘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이유들로 인해 흘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눈물상자』; p17)’이다. 또한 ‘세상의 모든 눈물이 태어나기 전의 눈물······ 세상의 모든 눈물이 죽은 뒤의 눈물······ 세상의 모든 눈물들 사이에 고인 눈물······ 그 눈물에 닿는 것만으로,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마음도 천천히 녹기 시작(『눈물상자』; p26)’하는 눈물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순수한 눈물을 잃어버린 셈인지도 모른다. 그림자 눈물샘마저 말라버려 울고 싶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는 깡마른 몸에 새하얀 머리칼, 흰 모자를 쓴, 옷과 구두마저 모두 흰색인 노인(『눈물상자』에서 눈물을 사려는 할아버지)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순수한 눈물을 가진 아이가 할아버지를 보듬어 어루만지며 위로하던 순간, 평생 동안 말라있던 그림자 눈물샘이 녹아내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이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생물학적 본능을 되찾는 것과 더불어 순수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

『따뜻한 슬픔』의 조병준과『정당한 분노』의 조병준이 과연 동일 인물인가, 하고 어리둥절했다. 느낌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 정도니까. 물론 그가 가진 예리하고 예민한 감수성이 이 두 책에서 다른 방식 혹은 화법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일지라. 글 구석구석까지 그의 분노는 식을 줄 모른 채 서려있다. 정당한 그의 분노는 정말이지 어느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는 악마의 열매인 ‘이글이글 열매’를 먹은 것 마냥 활활 타오른다. 온몸의 핏대를 죄다 세워가며 ‘전심전력’하고 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강하고 짙은 분노를 뿜어낸다.  


덧붙여, 조병준은 사진에 관한 물음 하나를 남겼다. 화려하고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고 익숙한 ‘빛의 초상’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불온한 초상’ 그 그림자를 찍을 것인가. 앞으로 그의 사진이 은근히(?) 기대된다. 


**

나는 매년 한여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싹할 만큼 시린 여름을 만나곤 한다. 대체로 음악과 영화 그리고 책을 통해서 계절을 역행한다. 가슴을 울리는 영화 한 편이 내 여름날의 피서지가 되기도 하고, 잔잔한 파도처럼 살포시 밀려와 거대한 해일처럼 변하는 좋은 음악이 ‘아이스케키’가 되기도 한다. 올여름,『정당한 분노』덕분에 그런 시린 여름을 보냈다. 마치 소름서리(?)라도 맞은 것처럼.

감정선이 민감한 것도 같고 무딘 것도 같은 나에게 들쑥이는 이런 감정선의 변덕은 마치 마른장마 속에서 당당하게 피고 지는 소름꽃(?)을 방불케 한다. 그것이 좋든 아니든 간에 앞으로도 오래도록 만발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 한 줌 남겨보는, 깊어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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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걸이 ‘직업화’된 사회에서는 대개 ‘검은 손’이 걸인들의 뒤에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인도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어느 가이드북에서는 여행자들에게 끔찍한 사실을 알렸다. 어린아이들을 부모에게 돈을 주고 사서 불구로 만들어 구걸을 내보내는 일도 있다는 것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그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의 장애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멀쩡한 아이를 불구로 만들어 구걸을 내보내는 인간. 인간의 사악함에는 한계가 없다.(p124~p125) 

 

말 그대로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들을 접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초강대국 미국의 업보를 생각하게 된다. 무주공산이 아니라, 엄연히 원래 주인들이 살고 있던 땅에 쳐들어가 총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세운 나라였다. ‘살인하지 말라’는 자기네 종교의 계명을 어겨야했던 백인 이주민들에게는 자기 합리화 또는 정당화의 논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당방위! 무단 침입한 강도가 자기 가족과 재산을 지키겠다며 달려든 집주인을 총으로 쏴죽이고 정당방위를 외친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류의 역사는 그처럼 황당무계한 ‘정당방위’의 연속이다. 아비가 지은 죄를 자식이 갚는다? 총으로 일어선 나라 미국의 국민들은 언제 어디서 갑자기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 쓰러질지 모르는 지옥을 살아간다.(p175~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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