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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내가 겪은 6.25 전쟁
김원일 외 글, 박도 사진편집 / 눈빛 / 2006년 6월
평점 :
때론 내 꾀에 ‘꼴까닥’ 보기 좋게 당할 때가 있다. 그리 두껍지 않으니 수삼 일 안에는 읽어낼 수 있겠거니, 사진이 많으면 그만큼 만만하겠거니, 글이 많지 않으니 이번에는 굼벵이 책읽기를 면할 수 있겠거니 하며 집는 책들은 죄다 나를 정신 못 차리게 옭아맨다. 종종 이런 나의 오만방자함은 보기 좋게 ‘즉결심판’ 당한다. 세상 어느 것도 만만한 게 없듯이, 책 역시 적어도 ‘읽어내기’라는 끈기와 의무, ‘주워 담기’라는 자기화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하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사진자료실이 그 출처이다. 그보다 앞서 출간된『지울 수 없는 이미지1·2』에 담은 사진 1천2백여 매 가운데 1백 장면을 엄선해 문인들이 직접 겪은 체험담(「내가 겪은 6·25전쟁; 김원일·문순태·이호철·전상국」)과 함께 엮은 것이 바로『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다. 다시 말해, 앞서 출판된 책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은 일반 대중을 위한 보급판 포토에세이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글이 참 빼어난 책이다. 6·25전쟁뿐만 아니라 전쟁이라는 걸 경험해보지 못한 내게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을 만큼 생생한 네 문인의 체험담은 정말이지 ‘명품’이라 할만하다. 조금 과장해 덧붙이자면, 신랄한 굿판에 빠져드는 기분이랄까. 신명나게 한(恨)서린 넋두리를 풀어내는 그들의 필력은 단숨에 나를 당시의 전쟁고아로 만들어버렸다. 말로는 죄다 표현할 수없는 내 속에 숨은 응어리와 글로는 죄다 담아낼 재간 없는 나를 아예 6·25전쟁 통으로 빨아들이는 느낌이랄까.
귀중한 자료로써 사진이 갖는 위력을 실감하게 된 것 또한『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 갖는 매력 중 하나이다. 한 컷에 담긴 이미지들은 6·25라는 시공간의 ‘현재진행형’으로써 살아 숨 쉰다. 내 시선은 과거를 보는 초점을 상실한다. 아득한 미지의 소실점으로 내달리다 그 ‘현재진행형’에 동화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체된 것 혹은 지난 것, 과거사에 대한 사실이나 하나의 단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나와 함께 숨 쉬고 생동하는 ‘공간성’을 확보한다고 할까. 사진과 메모, 문인들의 생생한 경험담, 문학작품을 비롯한 참고문헌들이 빚어내는 빛은 가히 눈이 멀고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기 충분하다.
가슴이 아픈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학살에 대한 증언들과 마주할 때마다 치가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사진은 학살의 과정을 차례로 보여주기도 한다. 자신의 운명조차 가늠하지 못한 표정으로 손이 묶인 채 카메라를 의식하는 모습, 곧장 손에 쥐어진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간 모습, 그 위에서 많은 총부리들이 구덩이를 향해 발악한 뒤 죽은 자들의 표정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처형을 담은 한 장의 사진 속 까까머리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자갈밭에 엎드린 채 서로의 허리께 높이로 묶은 손들,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그 자세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 그 까까머리 청년의 표정은 아직도 지우기 힘들다. 너무도 앳된 얼굴에 곧 온몸에 총구멍이 날 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메라에 복잡한 표정을 들이민다. 내 눈을 응시하던 청년의 서글픈 눈빛과 복잡한 표정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말을 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어디 가슴 아픈 사연과 사진이 앞서 말한 것뿐이랴. 그 원혼들을 고작 한 시간 가량에, 그것도 달랑 종이 몇 장도 안 되는 공간에서 위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닐까 싶다. 그럴만한 능력도 내겐 없지만. 이 책에서 사진이 전쟁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전하고 있다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네 문인들의 경험담은 60년 가까운 그 기나긴 세월을 좁혀준다. 여러 문학작품과 참고문헌들은 설득력 있게 사진과 경험담을 뒷받침해주며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을 곱씹어보며 반성해본다.
‘당신은 6·25전쟁에 대해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왜 그렇게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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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겪은 인공치하 석 달」_ 김원일 소설가
전쟁으로 농사조차 짓지 못한 들판은 황량했고, 더러 철길 가에 버려져 있는 시신을 보기도 했다. 한데라 밤이면 추위가 살을 저몄다. 누울 자리조차 없으니 누나와 나는 꼭 안고 하늘에 뜬 별빛을 바라보며 서로의 체온으로 밤을 났다. 가장 고통스럽기는 기차가 굴속으로 들어갈 때였다. 석탄의 힘으로 가는 증기기관차가 뿜어내는 매연 탓이었다. 기차가 속력이 늦은데다 아무리 코를 막아도 스며드는 석탄 매연을 참을 수 없어 모두 기침을 쏟아내며 어질머리를 앓았다. 굴이 길 때는 그 매연에 질식하고 마는 갓난애와 병약한 노인도 있었다.[p41~p42]
*「골짜기마다 떠도는 고혼들」_ 문순태 소설가
어느 사이엔가 다발총을 든 카키색 제복이 사라지자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경찰들이 돌아왔다. 그 무렵 낮에는 경찰들이 진을 쳤고, 잠에는 산사람들이(빨치산을 산사람, 밤손님이라 불렀다) 마을로 돌아와 밥을 지어 달라고 하여 먹거나 식량을 가져가곤 했다. 산사람들이 마을에 나타난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경찰들이 몰려와서 밥을 해준 사람들을 붙잡아 갔다. 낮과 밤의 세상이 서로 달랐으며 마을 사람들은 양쪽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해야만 했다. 지서에 붙들려 간 사람들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고문을 받았고, 성한 마을 사람들이 초주검이 된 이들을 지게에 짊어지고 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밤에 나타난 밤손님들은 마을 남정네들한테 식량을 지워서 산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낮 세상과 밤 세상 사이에서 시달리게 된 마을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살얼음판을 딛는 듯했다. 단 한 순간도 생과 사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p72~p73]
그날, 나는 토벌대의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죽은 마을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마당이며 고샅, 동구 밖 느티나무 밑, 하천가 자갈밭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이날 우리 마을에서는 일곱 사람이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와 아낙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p77]
한국전쟁이 남긴 결과를 먼저 살펴보면, 우선 지적돼야 할 것은 엄청난 규모의 인적 손실이다. 전쟁은 무려 4~5백만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남겼는데, 이것은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약 6분의 1, 즉 약 6명당 1명의 한국인이 전쟁으로 인해 손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이토록 좁은 영토에서 이토록 집중적으로 많은 인명이 손실된 전쟁, 도는 혁명적 격변은 근대 이후의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그리 많지 않다. 1가구당 최소한 1명의 피해를 말해 주는 이 수치는 당시 한국인 누구도, 어느 가족도 전쟁의 광포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말해 준다.|박명림「한국전쟁의 구조: 기원, 원인, 영향」.『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박현채 엮음), 소나무, 1992, 124쪽|[p83]
전쟁은 대규모 집단학살을 수반했다. 전쟁 초기의 학살로는 형무소 재소자 학살과 보도연맹원 학살이 규모가 컸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학살인 보도연맹원 대학살은 경찰과 군에 의해 7월초 평택 부근에서부터 시작되어 북한군이 들어오지 못한 경상남도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자행되었다. 이 대학살로 최소한 5만 명 이상, 많으면 1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집단학살은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학살은 빨치산 등 좌익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서중석 지음,『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5, 104쪽|[p83]
어린 남매가 이미 숨을 거둔 엄마의 시신을 붙잡고 길가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영국군과 호주군이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사진자료; p115]
한 미군 병사가 안양에서 전투중 눈먼 소녀를 돕고 있다. 소녀는 왼쪽 다리마저 절고 있었다. 때때로 전쟁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홀로 살아가야만 했다. 전쟁이 잔인하다는 것은 아이들은 전쟁의 부조리에 저항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양, 1951. 2. 5.[사진자료; p118]
해군 소장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밤낮 없이 폭격했다. ··· 그것은 아마도 한 도시에 이루어진 함포 공격이나 공중 폭격으로는 역사상 최장시간일 것이다.” 그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인 원산에서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지음, 차성수·양주동 옮김,『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158쪽|[p143]
*「내가 겪은 6·25전쟁」_ 전상국 소설가
내가 북한군 병사를 처음으로 가까이 본 것은 우리 집 마루에 걸터앉아 여봐란 듯이 자기 키만큼 긴 총을 내게 보여주다가 오발 사고를 낸 한 열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빡빡머리 소년 병사였다. 그날 이후 나는 북한군 생각만 하면 그날 자신이 낸 총소리에 놀라 나와 함께 마루에 나자빠졌던 그 어린 병사의 얼굴부터 떠올랐다.[p154]
무서웠다.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낯선 사람은 낯설어서, 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무서웠다. 다른 세상을 만나 살기 띤 눈으로 기세등등하던 어른들이 그해 9월쯤에는 그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던 마을 청년들한테 잡혀 죽임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 칼에 찔린 자식이 빠져나온 창자를 끌어안고 신음하다가 죽자 그 시신을 부둥켜안고 밤새 절규하던 그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해 가을 퇴각하는 북한군 패잔병을 잡기 위해 길목을 지키고 숨어 있던 어른들의 살기 띤 눈만 봐도 우리는 오줌이 마려웠다. 마을 사람들한테 붙잡힌 북한군 하나가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우리 집 부엌에 숨어들었던 북한군 병사가 마을 청년들한테 잡혀 나가면서 나를 바라보던 그 절망적인 눈빛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붙잡힌 북한군 패잔병들은 진격해 오는 국군에게 인계되기도 했지만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의해 대부분 마을 인근 골짜기로 끌려가 땅속에 묻혔다.
어른들이 북한군을 산속에서 그렇게 처치하고 돌아온 밤은 유난히 마을 사람 전체가 공포에 떨었다. 북한군 부대가 곧 마을로 들이닥쳐 그 보복을 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마을 사람 모두가 산 속에 숨은 채 밤을 새웠던 날도 있었다.
사람 목숨이라는 게 정말 별게 아니었다. 총에 맞고 칼에 찔리고, 비행기 폭격에 온 가족이 살점을 흩뿌리며 죽었어도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 눈에는 그냥 원초적인 증오심과 동물적 공포감만이 번뜩였을 뿐이다.[p155~p156]
청주 근처 그 광산촌에서 장질부사를 앓을 때, 바로 우리 옆의 움막에서도 사람이 죽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피란을 나온 만삭의 아낙네가 해산을 한 뒤 배가 고파 실성을 한 끝에 낳은 아기를 끓는 물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 결국 그 아낙네도 죽고 말았는데 경찰 가족으로 아버지마저 만나지 못한 그 집의 어린애들 둘이 움막 앞에 쪼그려 앉아 볕쪼임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p157~p158]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민족상잔의 전쟁도 3년으로 끝났다. 얼마나 많은 동포가 서로 쏘고 찌르고, 죽고 죽였는가! 얼마나 많은 동포가 남북에 들어온 외국 군대의 폭격으로 살상되었는가. 가뜩이나 가난한 겨 례 의 재산이 잿더미로 화해 버렸으니 살길이 막막하였다.|이영희,『분단을 넘어서』, 한길사, 1984, 304쪽|[p161]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
|최인훈,『광장』, 문학과 지성사, 1980|[p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