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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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를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다. 부전공을 신청해 들은 사학과 강의 중, ‘한국사회경제사’와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강의를 맡으신 교수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솔직히 알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의 저서를 읽은 건 몇 안 된다. 도서관에서 빌려 본《작은 풍요》,《1%의 대한민국(공저)》그리고 이 책《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밖에 없다. 앞서 말한 두 책은 그래도 힘이 덜 들었는데, 이 책은 좀 많이 힘들었다. 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리가 안 되는 걸 보니 나는 아직도 멀었나보다.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는 아주 작고 두껍지 않은 녀석이다. 솔직히 좀 만만하게 봤다. 이틀이면 읽어낼 수 있으리라. 웬걸, 크지도 않은 내 코가 완전 뭉개지고 아주 보기 좋게 작살(?)이 났다. 요 조그만 녀석을 거의 한 달 가까이 붙들고 씨름했으니 남들이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일지라. 그래도 조금씩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이겠지, 하며 위안을 삼아본다. 장하다 인마!!(ㅡ,.ㅡ*;;)

『삶과 일, 가정에 대한 작은 에세이; 2. 일에 대한 가치관』
사실 우리의 현실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가정의 이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nest)’가 아니라 단순한 ‘버스정류장(bus-stop)’으로 변하고 있다. 가정은 노동에 종속되어 노동의 긴 여정을 다니기 위한 간이정류장이 되었다. 아이들도 노동하는 어른과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갖기 어려워 그 간이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바삐 떠난다. 어른들은 삶이 고달플수록 고통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진하는 병적 경향이 있다. 가시적 성과를 올리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p20)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이런 현상이 알게 모르게 가정을 변화시키고 있음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듯하다. 이런 결과를 낳는 그 과정에는 우리의 ‘일중독현상’이 그 몫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업무에 몰입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함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낳는, 이러한 일에 대한 우리의 아이러니한 가치관. 뭔가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고 조급증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그로부터 우리는 스트레스를 자신도 모르게 재생산한다. 그렇게 생산된 스트레스를 재가공하여 우리는 일중독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초래된 결과(일중독현상)의 심각성에 따라서 가정은 조금 ‘덜한’ 버스정류장, 조금 ‘더한’ 버스정류장, ‘심각한’ 버스정류장의 모습을 보이는 것일 뿐, 맞벌이를 하는 요즘의 추세에서 보면 그리 놀랄만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노동시간이 월등하게 높은 것(어떤 국가와는 거의 2배 가까이 우리가 높다)으로 분석하고 있고, 여러 설문조사에서도 일을 할 때와 일을 통해 어떤 성과를 올렸을 때 대다수가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러니 가정에서 느끼는 행복은 직장에서 업무달성·성취로부터 얻는 행복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행복과 기쁨이란 게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에 비례해 나타난다고 본다면, ‘보금자리’에서 ‘버스정류장’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무책임; 2.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의_ 2) 기업의 ‘5D전략’』
그러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사회의 압박이 증가한다고 해서 기업들이 진정성을 갖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개 세 가지 전략(‘3D전략’)으로 대처한다. 첫째, 부정(Deny), 둘째, 지연(Delay), 셋째, 지배(Dominate)전략이 그것이다. 먼저, 부정전략이란 기업이 책임질 직접적 대상이나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것이다. 상황 자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대개 인과관계를 부정하거나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린다. 다음으로 지연전략이란,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이나 상황 자체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경우 그 해결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론을 편다. 아직 문제 자체가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거나 그 해결을 위한 역량이 아직 구비되지 않았다는 식이다. 오랜 시간을 끌면서 저항세력이 지치게 되거나 세력관계가 뒤바뀌면 포장만 달리하여 자기들의 의도를 관철한다. 끝으로, 지배전략이란, 어차피 부정도 못하고 지연도 못할 조건이라면 문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기업이 장악하려는 것이다. 문제 상황의 규정 자체를 기업에 덜 불리하게 한다거나, 우호적인 학자나 전문가를 초청해서 토론회를 열어 해결방식을 기업에 유리하게 끌고 가는 식이다. 그리하여 ‘전화위복’을 꾀한다. 대단한 위기에 휘말린 기업이 오히려 그 위기를 딛고 더욱 번창하게 되는 것은 지배전략이 효과를 낸 결과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판단으로 나는 위 ‘3D전략’에다가 두 가지를 더 부가해 ‘5D전략’이라 명명한다. 하나는 왜곡(Distort)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사기(Deceive)전략이다. 왜곡전략이란 문제 상황을 비틀어 더 이상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상적인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다. 특히 건설이나 개발과 관련된 사례에서 두드러지듯 애초엔 사업 그 자체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가부문제로 시작하지만 대개 끝은 보상문제로 귀착한다. 다음으로 사기전략이란 전문가회의 등을 통해 형식적 민주주의는 준수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뇌물, 감투, 암약 등을 통해 대 사회적 사기를 치는 것이다. 서류조작, 자료조작, 통계조작, 수치조작이 기본이다.(p70~p72)

위와 같은 기업의 ‘전략’에 관해서 저자는 태안 앞바다에서 있은 기름유출사고와 충남 연기군 신행정수도이전에 관한 사례 등을 가지고 상세하게 분석·설명을 하고 있다. 너무 순진한 물음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잘못을 했거나 실수를 저질러 놓고는 저런 추악한 짓을 해가면서 모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경영학 강의와 기업윤리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회적 책임이란 것을 학교에서는 마치 대단한 선행을 한 것처럼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했던 것 같다. 사회적 무책임에 관한 사례분석은 결론적으로 오직 기업의 이윤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귀결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한심한 강의를 들은 것 같아 후회가 막심하다.

물론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당한 수단과 방법으로 올바른 과정으로부터 얻어지는 이윤을 기본 전제로 한다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역겨운 냄새가 진동한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요나 압박에 못 이겨 하는 척이라도 하는 놈(?)들은 그나마 양반이고, 왜 내가 힘들여 장사한 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날뛰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격이고, 더 어리석은 것은 우리 다 굶어죽고 나면 지네가 말하는 경쟁력이다 생산력이다 하는 것을 어디에다 팔아먹을 심산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다.

언제까지 돈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며, 언제까지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때울 작정인지. 스스로 저지르거나 실수로 발생한 잘못에 대해서만큼은 당연히 책임을 져야하는 걸 가지고 그런 것까지 기업경영의 ‘위기상황’이라는 원론적인 틀에 넣고서 스스로 자초한 위기가 아닌 그저 예상치 못한 ‘발생한 위기’로 치환하여 어떻게든 손해를 최소화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게 참 안타깝고 어리석을 따름이다. 차라리 무책임하면서 고통이라도 안 주는 게 백배 천배는 나은 처사일진데, 왜 그리 사누.

『삶과 사랑, 그리고 마무리; 1.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삶과 평화』
하지만 이런 혼란은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된 가치관을 내면화한 결과일 뿐이다. 자, 여기서 정신을 바짝 차리자. 경제든, 평화든 우리 삶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행복’이 아닌가? 삶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경제든 개발이든 교육이든 평화든 발전이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 아무 쓸 데 없다. 그렇다면 행복 증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민중 평화를 깨는 경제 개발인가, 아니면 민중 평화 그 자체인가? 단연컨대, 민초들이 자신의 살림살이(자급의 문화, Subsistence culture)를 우애롭고 평화롭게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행복한 삶의 과정이다. 이 중심 잣대, 즉 줏대를 잘 세운 다음에 다른 요소들을 하나씩 고려할 때 비로소 올바른 판단, 올바른 선택, 올바른 행동이 가능할 것이다. 자, 이제부터,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라는 올림픽 구호 대신, “더 느긋하게 더 적게 더 낮게”를 외치며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을 참되게 구조조정하는 건 어떨까?(p157)

저자는 우리가 잘못 받아들인, 내면화의 부정적인 요인으로 ‘경쟁력 중심’으로 삶을 설계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그럼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경쟁력 중심이 아니라 ‘삶의 질 중심’으로 그 패턴을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행복하지 않고 평안하지 않은들 무엇이 이로운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 물론 현대사회에서 그것이 말처럼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고 여태껏 길들여져 온 경쟁력 혹은 생산력 중심의 패턴을 뒤엎기는 힘이 들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 대안으로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범지구적인 연대’를 통한 소통을 강조한다. 즉, 소규모 혹은 지역적인 ‘자급의 문화’를 형성해나감과 동시에 범지구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그 기대치와 효과를 높이며, 그에 따르는 불안과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바 있는 일에 관한 우리의 가치관에서 선진국과 차이를 보이는 게 있다. 정년에 관한 사례가 그것인데, 선진국에서의 관념은 정년이 줄어드는 게 노년의 삶과 행복을 앞당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정년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 학을 뗀다는 것이다. 즉, 선진국의 관점은 자신에게 주어져야할 마땅한 행복이 정년이 늘어남에 따라 그만큼 ‘유예’된다는 것. 반대로 우리는 그 ‘유예기간’을 늘임으로써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러니 일중독은 가정의 버스정류장화, 경쟁력 중심의 삶을 내면화함으로써 발생되는 문제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연대와 소통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할 행복은 고통과 불안 속에서 언제까지나 유예되거나 유폐될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게 아닐는지.

『삶과 사랑, 그리고 마무리; 3. 제도화, 체계화, 상품화에 대하여』
또한 우리들 모든 삶의 과정이 ‘상품화’한 것이 바로 오늘날 ‘서비스 경제’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친밀함과 우정, 환대, 사랑의 관계를 만들고 확인하고 나누던 행위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서비스 경제’라는 이름으로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다. 예컨대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는 행위(정자/난자 은행, 산부인과 병원), 아이를 키우는 행위(유아원, 놀이방, 학교, 학원), 식의주 등 살림살이 행위(식당, 세탁소, 주택 시장), 어려울 때 돕기(금융, 사채, 보증, 보험), 문화 향유(콘서트, 콩쿠르), 여가(여행, 관광, 엔터테인먼트), 소통(정보통신, 전화, 인터넷), 그리고 심지어 사랑 행위(성매매, 전화방, 섹스 쇼)까지도 온통 ‘서비스 경제’ 속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서비스는 있되 참된 봉사는 없고, 학교는 있되 참 교육은 없다. 또 고급 아파트는 있되 참 살림은 없고, 레스토랑은 있되 참된 먹거리는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오늘날 주류 경제학에서는 서비스 경제, 즉 3차 산업이 발전할수록 ‘선진국’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지배하며 현실 삶을 피폐하게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이런 환상에서 탈피하여 삶의 자율성, 삶의 친밀성, 삶의 직접성을 복원해야 한다.(p163)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들이 ‘서비스 경제’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어쩌면 역사적인 생활 패턴에 대한 이해랄까, 그런 부분들에 대한 학습이랄까, 어떤 ‘연결고리의 부재’로 인해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활패턴들에 대해 ‘당연성’을 부여한 채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 모든 상황과 현상, 체제들이 인류가 여태껏 가장 합리적인 모델로써 진화시켜온 바로 그것이라고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은 채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오로지 현재가 선사하는 ‘합리성’이라는 의미만을 맹신한 채 말이다.

예전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오래된 미래》를 읽고서 생태적인 삶에 대해 조금은 눈을 뜨게 되었던 게 생각난다. 지금도 내 삶의 패턴을 모조리 바꾸지는 못한 채로 살고는 있지만, 적어도 잃어버렸거나 혹은 잊은 채로 살았던 그 ‘연결고리’를 찾고 붙잡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냐고, 지금이 어떤 시댄데 그런 고리타분한 삶을 이야기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대부분이 반발할 것이 분명하다. 왜?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편리한 시대에 불편함을 쫓는 다는 게 어리석어 보이고 그로부터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불안심리 혹은 반발심에 대한 예상이 분명하기에 연대를 통한 소통이라는 대안이 더더욱 최선의 선택으로 와 닿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밖에도 고전적 자유주의 단계와 케인즈주의 단계를 지나 현재의 단계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 특징과 문제점에 대한 논의는 매우 시급하며, 그 한계성을 극복할 방안을 논의해야할 단계가 바로 지금이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행위가 아닌가 싶다. 단번에 모든 걸 해결하려고 조급해하다가는 지치고 불안을 겪고 포기까지 단숨에 이르기 십상이다. 편리한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우리 주변의 문제와 각자 삶의 설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보는 것이 최선으로 가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정리를 워낙에 못하는지라 늘 횡설수설입니다.
목차를 덧붙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참고하시길 바라며.. 

 

[삶과 일, 가정에 대한 작은 에세이]
1. 우리의 현실 / 2. 일에 대한 가치관 / 3. 과연 삶과 일에 대한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가? / 4. 국제 비교에서 두드러진 한국의 특성 / 5.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길로

[경쟁 압박은 어떻게 내면화하나?]
1. 이른바 ‘팔꿈치사회’ / 2. 팔꿈치사회 속 ‘생존논리’의 함정 / 3. 박수치기 시합을 통해 본 ‘경쟁과 지배’ / 4. 경쟁의 내면화는 자기소외의 기초 / 5. 소통과 연대가 대안 / 6. 연대지향적 사회의 밑그림

 

[학교가 가르치지 않는 것, 열 가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무책임]
1. 머리말 / 2.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의 / 3. 기업의 사회적 무책임 / 4. 기업의 사회적 무책임에 관한 사례 / 5. 맺음말

 

[구조조정; 계속 위로부터 아니면 다시 아래로부터?]
1. 구조조정의 개념적 차이들 / 2. 구조조정의 결과와 저항 / 3. 구조조정과 실업대란 / 4. 경쟁력 중심의 구조조정과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 / 5. 맺음말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우리의 미래]
1. 머리말 / 2. 현 단계 세계화의 특성 / 3. 풀뿌리의 반작용과 우리의 미래

 

[삶과 사랑, 그리고 마무리; 앙드레 고르, 이반 일리치, 우리 어머니]
1. 이반 일리치(영문이름)의 삶과 평화 / 2. 우정(영문)과 환대(영문)에 대하여 / 3. 제도화, 체계화, 상품화에 대하여 / 4. 앙드레 고르와 도린의 아름다운 사랑 / 5. 나비처럼 날아가신 우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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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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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책입니다. 여러 권을 살 정도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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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8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gpickEr 2009-05-28 23:30   좋아요 0 | URL
흔적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머리가 좀 나빠서..혹시 아는 분인데 제가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으니 이점 양해바랍니다..^^*;;
저는 꽤나 괜찮게 읽은 책이라서요.. 여러 권을 주문해서 선물도 하고 그랬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쯤 접해보셔요~! 코멘트 고맙습니다..^^*

에샬롯 2009-05-2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서재 다녀가셨더군요. 답변 감사.^^ 어제 만들어서요. 그래서 아무도 안오는 곳인데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책 소개받아서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읽어볼게요.^^ 저 리뷰도 읽어봤어요. 잘 쓰셨네요. 그런데 엄청난 길이에 놀랬습니다. 글을 참 길게 쓰시네요. 전 능력부족으로 그러지 못하는데.가끔 놀러와도 되지요? 안녕히 계세요.


ragpickEr 2009-05-29 00:14   좋아요 0 | URL
아하! ^^* 책은 사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셔요~ 실망하게 되실지도..^^*; 본래 글재주가 없어서..할 말은 많고..그러다 보니 영양가 없이 길어지기만 하고..^^*;; 자주 뵈요~^^* 편안한 밤 되시구요~ 헤헤..고맙습니다~!!

에샬롯 2009-05-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십니다. 글이 좋습니다.^^ 오늘도 한편 읽고 가겠습니다.

ragpickEr 2009-05-30 07:15   좋아요 0 | URL
^^*;죄다 인용문인걸요.. 요즘 에샬롯님 덕분에 서재에 자주 들어오게 되네요~리뷰만 올리고 슝~나몰라라 했었는데..후훗..^^* 귀한 시간 영양가 없는 낙서에 투자해주셔서..고맙습니다..^^* 헤헤..

에샬롯 2009-06-0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겸손도 하시지^^ 이런 생각이 드네요. 인터넷과 실제의 모습은 보통 같은 것일까요.
넝마님을 의심해서가 아니고 전 좀 달라서^^;

ragpickEr 2009-06-01 08:21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겸손이 아니라..전 그저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후훗..^^*;; 실제와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 저 역시 몇몇 이웃님께서 저를 실제로 보시더니.. '인터넷에서 뵐 때랑 느낌이 다르네요~' 이러셨다는..^^*;; 후훗..
 
부처님과 내기한 선비 샘깊은 오늘고전 8
김이은 지음, 정정엽 그림, 김시습 원작 / 알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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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내기 한 선비》는 조선 전기의 사상가이자 문인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금오신화金鰲神話』에 실린 다섯 작품 중「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읽기 쉽게 풀어 엮어놓은 책이다.「이생규장전」은「이생이 담 안을 엿보다」로,「만복사저포기」는「부처님과 내기 한 선비」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두 작품(「이생이 담 안을 엿보다」,「부처님과 내기 한 선비」) 모두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뛰어 넘지 못하는 연인의 모습은 한스러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어느 몽환적인 ‘공간’에서 잠시나마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엔 이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다가온다. 잠시나마 만끽한 그 행복한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연인들은 가슴 아린 이별을 하고야만다.

한쪽은 삶 속에 한쪽은 ‘이미’ 죽음 속에 있으며, 이 둘 사이에는 이미 숙명일지도 모를,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여있다. 이처럼 사랑이라 게 연인들의 마음과 영혼을 초월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결국 현실세계에 붙박여 있는 육체가 지니는 유한성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가슴이 아려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결코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없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진정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간절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숭고함이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슬픔, 눈물, 간절한 바람 등을 통해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야기의 문체는 요즘 우리에게 익숙한 문체와 거의 같게 풀어놓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으며, 간간이 삽화도 있어 지루하지 않다. 또 이야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는 시詩는 아름답고 절절하며, 주인공들의 심리변화를 세밀하게 나타내고 있어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재미를 더해준다.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와 함께 읽으면 참 좋겠다싶게 만들어져 고전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즐거움을 늘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종종 일상이 삶이 신비스럽고 오묘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예컨대, 읽고 싶어 마음에 담아두었던 책을 이웃북로그에서 업데이트한 리뷰를 통해 만난다든지, 종일 풀리지 않아 끙끙대던 문제가 북로그세상에서 쉽게 풀린다든지, 절판되어 구입할 수 없었던 책을 종종 가는 헌책방에서 때마침 만나게 된다든지, 종일 이유 없이 울적한 마음 때문에 풀이 죽어 있었는데 다른 이웃 중 한 분도 그렇다하여 서로 다독이며 좋은 기운을 주고받는다든지 할 때, 나는 세상으로부터 홀로된 듯 느끼던 칠흑 같은 고독과 외로움에서 벗어남을 맛본다.

또 책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종종 오묘함을 느낀다. 흘려버리고 잊은 줄로만 알았던 어느 시간으로 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어떤 기억을 되살려주는 신비스러운 힘을 지닌 듯하다.《부처님과 내기 한 선비》를 만남으로써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를 담당하셨던 담임선생님이 느긋하게「이생규장전」과「만복사저포기」에 대해 설명하시던 때가 떠올랐다. 훗날 어떠한 연유로도 떠올릴 수 없을법한, 그저 흘려버린 채로 혹은 전혀 들은 바 없고 겪은 바 없는 일로써 치부해버리고 상실하고 말았을 시간을 되살리고 되돌려 주었다는 것이 이 책으로부터 얻은 부수적인 득이 아닐까 싶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어리석음을 조금이나마 벗고 깨치고, 삶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시절은 없다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한 책 읽기였음을 덧붙인다.   

 

포털사이트에서 ‘이생규장전’, ‘만복사저포기’로 검색해보니,
원문내지는 한글로 옮긴 글을 만날 수 있더군요.
아마 ‘금오신화’에 실린 나머지 작품들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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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김홍희 글.사진 / 마음산책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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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감기로 본격적인 골골거림을 시작하던 지난 월요일. 전날 종일토록 잠을 자둔 덕분에 본의 아니게 월요일을 일찍 맞았다. 아침을 거의 안 먹는 습관에도 불구하고 그 전날 집에서 먹은 게 하나 없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대충 밥상을 차려서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돌리는데 구수한 경남 사투리가 새어 나온다. 볼리비아의 소금사막 위를 달리면서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그 특유의 말씨는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어느 아프던 날 새벽녘, 신기루처럼 펼쳐진 소금사막 위에서 사진작가 김홍희 씨를 만났다.

몸을 좀 움직일만할 무렵, 그립던 도서관에서 그의『방랑』에 동승했다. 그가 생각하는 삶에 함께 골몰해보고, 그가 바라보는 눈을 통해 세상을 다시보기 위한 연습을 했다. 함께 여행하고 유학했으며 방랑했다. 죽음에 대한 그의 고백들을 통해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아예 그를 부둥켜 앉고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그가 가진 기억들과 만나면서 내 지난 일들을 회상해보기도 하고, 미래를 가늠해보기도 하면서 방랑자의 눈으로, 몸으로 밤을 고스란히 안아보기도 했다. 그의 발길을 평생 쫓아가고 싶다는 욕망과 만나고, 그가 가진 카메라를 훔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내 그런 내 생각들이 어리석었다는 걸 알았다. 훔쳐내 봐야, 쫓아봐야 결코 그와 같아지거나 혹은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그의 푸근한 미소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조금은 ‘촐싹거리는(?)’ 분위기로「방랑」은 시작된다. 무게감이 없어 보였다는 말이다. 역설적이지만 그 분위기는 청춘 특유의 진지함이었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설익은 채로 세상을 몸으로 받아들이려고 부산하게 움직이며 일으키는 흙먼지 같은 것이랄까.「죽음」부터는 그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조금은 촐싹맞은(?) 그 특유의 분위기와 더불어 삶과 죽음에 관한 그의 철학이 지난 날 경험한 일들과 어우러져 더없이 오묘한 맛으로 드러난다. 특히나 [삼촌], [참새], [통표], [벚꽃]에서 보여준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은 ‘맛깔스러움’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또동경東京」에서는 지난 일본유학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질적으로 사진에 관한 철학을 형성해가는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오직 좋은 사진을 건져 올리기 위해 흘린 땀방울과 팍팍한 생활담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또 하나의 맛을 들자면, 김홍희 씨의 구수한 사투리를 들어본 분들이라면 아마 이 책을 좀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평소의 표준어체로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 어색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의 조금은 익살스러운 특유의 말씨가 잘 배어 있기 때문에 색다른 맛이 난다. 마치 사투리로 내레이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그만큼 재미를 더해주고 편안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또한 사진에 달린 ‘캡션’들은 쉽사리 풀리지 않는 암호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다. 그 덕분에 우리는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돌이켜 보게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화두’라 하기엔 너무 거창하다손치더라도, 적어도 사진에 배어 있는 삶의 ‘단상斷想’ 쯤은 되지 않나 싶다.

등잔 밑이 어둡다던가.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선물 받은『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속 사진을 김홍희 씨가 담당했다는 걸 뒤늦게야 알고 다시 찬찬히 사진만 뜯어 봤다. 또 햇귀님이 내주신 숙제(?)를 통해『편집자 분투기』속에 있는 그를 만날 수도 있었다. 모두 예전에 보았던 책들인데 어째서 그때는 그 이름자를 기억하지 못했을까. 도대체 나는 책읽기를 통해 무엇을 담고 무엇을 흘려버리는 것일까. 괜스레 나 자신이 꼴통 같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이렇게 다시금 만날 수 있는 연(緣)의 오묘함에 감탄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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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모든 것들은 사랑한 것들이고, 사랑한 모든 것들은 낯선 것들이다. 우리는 낯선 것들과 만나 사랑하고, 낯선 것들과 이별한다. 방랑 역시 낯선 것들과의 조우다. 조우는 고통이고, 고통은 신음한다. 그래서 방랑은 신음이다. 그러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음이다. 오히려 아프기 위한 신음, 그것이 방랑이다. (개정판을 내며 中..)

사람들은 묻는다. 그 많은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냐고. 내 대답은 언제나 간단하다.
“사랑에 빠졌던 곳.” (글머리에 中..)

불빛에게 물었다.
“거기가 끝이냐?”
불빛이 답했다.
“여기가 시작이다.” (사진; 2001 변산 새만금)

한 톨 쌀알 크기의 눈송이가 히말라야의 정상, 면도칼처럼 날을 세운 꼭대기로 떨어지면 티벳 평원에 쌓이고, 남쪽으로 떨어지면 억겁의 세월을 거쳐 갠지스의 물방울이 되어 바라나시로 흐른다.
히말라야에서 갠지스로 오기까지 성수는 무엇을 보고 왔을까? 사람이 수없이 나고 죽는 동안 히말라야의 백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지금 그들이 마시는 바라나시의 성수는 역사 이전의 시간에 지구의 정수리 히말라야에서 녹아내린 눈일 것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에 서면 모두가 숙연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p65)

인도에 가려거든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동물 중에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챙기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 문명의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을 때, 문화의 주머니가 없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 여행이 충분히 가능할 때, 당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갠지스 강에 몸을 맡기게 될 것이다.(p67)

배에 묶인 물
선술집 없는 젓가락 장단
떠돌지 못하는 사진기 (사진; 2001 변산 곰소항)

어물전에 누워 낄낄대는 생선들
산자의 바바리 코트 속을 보았니? (사진; 변산 곰소 시장)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던 시절, 참새가 죽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왁자지껄한 잔치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저 조용하게 잠자듯이 오는 것이라는 것. 살아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죽어 있더라는 것.(p88)

아들과 딸을 키우는 나는 짐이 많다. 여러 번 이사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쓰고 있는 것과 앞으로 쓸 것, 그리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쓰일 것들이라고 재어둔 물건들이 집안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평생을 쓰고도 남을 물건들이 사람이 써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풍요가 가져다 준 공간의 빈곤이다.(p99)

통표는 모가지가 빠지도록 채여 갔다가는, 돌아오는 열차에서 춤추듯 패르르 돌며 통표걸이에 목을 건다. 통표란 길을 떠날 때 반드시 가져가야 하고, 돌아와서는 또 반드시 되걸어두어야 하는 단선수동(單線手動) 역에서나 볼 수 있는 운행허가증.
압록역에 가면 통표를 건네준 빈손으로 열차마다 손 흔드는 등 굽은 노인의 뒷모습이 보이고, 젊은날 길 떠난 아비는 어느새 백발로 돌아와 먼길 가는 아들에게 또다시 통표를 건네준다. 통표를 거머쥔 아들은 또 다시 아비의 길을 떠나고······.(p100~p101)

“젊은날 어디에 살았는가 하는 것은 긴 인생여정을 살면서 참으로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할 걸세. (······)”(p105)

개 짖는 소리
걷던 사진기가 주춤.

흐릿해지는
파-인-더 (사진; 2001 변산 곰소항)

진실로 울어본 자들은 알 것이다. 운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인지. 더구나 그 울음을 혼자 우는 자는 또 얼마나 순수해지는지.(p131)

“결혼이라는 것은 다른 꽃을 포기하는 것이야. 이 꽃을 쥐고 다른 곳에서 더 이쁜 꽃이 필지도 모를 거라는 상상을 하면 결국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지.”(p149~p152)

사랑은 말하지 않는다
니가 말해야 한다

사랑은 니 말 속에 있다

잘 자라, 변산. (사진; 변산 나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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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직동 보림 창작 그림책
한성옥 그림, 김서정 글 / 보림 / 200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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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감기로 앓다가 불현듯 학교 도서관이 그리웠다. 대충 씻고 약 한 봉 입에 털어 넣고는 학교로 걸음을 뗐다. 인도보다 차도가 좀 더 부산한 저녁, 아직 조금 산산한 바람이 내 발길을 막았다 밀었다 한다. 갈피를 못 잡는 듯 한 바람과는 달리 나는 줄곧 앞으로 걸었다.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주변 풍경과 사람들 틈을 지나 도서관에 도착했다. 아주 낯설어 생소하리만치 느껴지는 건, 학생들이 시험이 끝나 죄다 빠져나간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아주 많이 그리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한 서가를 휘젓고 다녔다. 햇귀님이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편집자 분투기』를 찾으려는데, 책이 그 자리에 없다. 안 온 며칠 동안 서가를 정리했나보다. 검색하려다가 그 주변부를 샅샅 훑었다. 그러길 10여 분, 조금 크고 아주 얇은 그림책『나의 사직동』을 만났다. 낯설던 이 공간에 익숙해질 때쯤, 뒤바뀐 서가에서 낯선 책 한 권과 그렇게 만났다.

사진작가 김홍희 씨는『방랑』에서 ‘헤어진 모든 것들은 사랑한 것들이고, 사랑한 모든 것들은 낯선 것들이다. 우리는 낯선 것들과 만나 사랑하고, 낯선 것들과 이별한다.’고 말했다.『나의 사직동』은 그 ‘낯선 것들’에 관한 추억이다. 내가 ‘사랑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고, 그것이 다시금 아주 ‘낯선 것’이 되어 나타나 ‘이별’이라는 시간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누구나가 이러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다 낡아빠진 추억 한 장일지라도, 그것이 지금은 아주 낯선 것일지라도 한때 사랑했던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다.

엄마 어릴 때 이사 와 내가 열한 살 될 때까지 우리 가족이 살던 집, 사직동 129번지. 봄이면 라일락이 향기로웠고, 가을이면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 빛났습니다. 주름살처럼 자글자글 벽에 생긴 금은 무성한 담쟁이 잎이 가려 주었습니다.(p7)

어느 날 갑자기 동네에 낯선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도심재개발 사업시행인가득? 재개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말이라고 엄마는 설명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아파트를 짓는다는 소리라고요. 아파트 사는 친구가 부러운 적도 있던 터라, 나는 조금 들떴습니다. 우리 동네에도 이제 아파트가 생긴다!(p17)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까지, 나는 다세대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그곳은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것처럼 ‘라일락이 향기로웠고’,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 빛나던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주름살처럼 자글자글’한 담벼락이 있었고, 개미굴처럼 골목이 아주 많은 곳이었다. 지금보다는 훨씬 사람 사는 냄새가 짙은 곳이었으며, 골목 어귀마다 동네 꼬마들이 왁자지껄한 곳이었다. 도로 저편으로는 아파트가 있었고, 그곳에 사는 녀석들 중에 내 친구들도 많았다.

때때로 아파트 사는 녀석들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열망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내부의 깨끗한 시설이 종종 부러웠었고, 공부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 부러웠을 뿐이다. 나는 골목대장이었고, 아파트 친구와 ‘非아파트친구’ 간에 벌어지는 어떤 대결(?)에서도 우리는 지지 않았다. 야구도, 축구도, 딱지치기도, 구슬치기도, 오락실 게임도, 심지어 공부까지도. 그곳을 떠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지금도 내게 그곳은 ‘우리 동네’로 남아있고, 지금도 종종 들르는 ‘우리 동네’는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깡그리 사라지지는 않은 채 나를 반기곤 한다.

어느 날, 나는 그러다가 내친김에 골목길로 계속 걸었습니다. 자동차 소리는 잦아드는데 진돌이 컹컹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높은 쇠 담이 나타났습니다. 담은 우리 동네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주춤주춤 걷다 보니 커다란 대문이 끼익 열리며 트럭이 나왔습니다. 얼핏 안을 들여다본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집도 없고, 백 계단도 없고, 감나무도 없었습니다. 커다랗게 입을 벌린 구덩이 위로 얼기설기 엮인 철근과 높다란 타워크레인만 버티고 있었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굴착기가 쇠갈퀴 손으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구덩이가 푸욱 파이는 것 같았습니다. 쇠갈퀴가 뱃속을 긁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손으로 배를 꾸욱 눌러야 했습니다.(p29~p31)

추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곳이 내가 사랑했던 ‘우리 동네’라면 어떤 기분일까.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하지, 라는 입버릇으로는 절대 위안 삼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동네’가 수술대에 올라 있는 모습을 보며, 하나둘씩 잘려나가는 추억들과 새로 세워지고 변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주인공(?)은 ‘쇠갈퀴가 뱃속을 긁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에 구덩이가 푸욱 파이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아픔과 고통, 슬픔을 견디는 연습을 해온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 낯선 세상 속 낯선 것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게 가능하겠는가.

나는 이제 사직동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사직동 129번지가 아니라 모닝팰리스 103동 801호입니다.
단지 안 길은 널찍하고 반듯합니다. 나무에, 꽃에, 분수가 춤추는 작은 공원도 있습니다. 하지만 팽이 돌리고 인형 놀이 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 우리는 이제 가위바위보로 계단 올라가기는 하지 않습니다.(p35~p36)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여기는 사직동이지만, 나의 사직동은 아닙니다. 나의 사직동은 이제는 없습니다.(p38)


『방랑』에서 김홍희 씨는 ‘방랑 역시 낯선 것들과의 조우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가진 애틋한 추억들은 삶이라는 방랑 속에서 낯선 것들과의 조우를 통해 되살아난다. 추억이 예전 같지 않은 현실을 통해 재현될 때, 우리는 신음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고통스럽고 아플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나 살던 정이 넘치던 곳이 지금은 깡그리 무너져버렸다고 한들 마냥 슬픈 일만은 아닌 것, 낯선 그 모습 위로 나 가진 애틋한 추억을 그려낼 수 있는 힘, 그래서 낯선 것도 사랑할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삶 속에서 낯선 것들과 뒤섞여서도 살아낼 수 있는 힘이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종종 나 보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 낯선 것을 거슬러 오르며 사랑하고 이별한 추억을 더듬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무엇과 그리 뜨겁게 사랑했으며 무엇을 그리 애틋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 지금은 무엇과 사랑에 빠져 있으며 얼마 전 무엇과 차갑게 이별했는지를 더듬다 보면, 혹시라도 알게 될는지도 모른다. 내가 여태껏 사랑하고 이별한 것들, 앞으로 사랑하고 이별하게 될 그 ‘낯선 것’들이 오래전부터 전혀 낯설지 않았던 바로 그 ‘추억’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라지만, 때론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이라지만, 더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닐 것 같다는 막연함이 밀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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