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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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여태 읽었던 책들 중 몇몇 책에서『나무를 심은 사람』을 언급한 걸로 기억한다. 정확하게 어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지를 죄다 기억할 수 없지만, 최근에 읽은 이명원의『말과 사람』에도 이 책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종종 ‘책 속에 언급된 다른 책을 통해 어떤 메시지, 신호가 쏘아져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혹은 상상, 어떤 예감을 한다. 그래서 웬만큼 제목이 눈에 익고 암암리 뇌리에 각인된 이 책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살육전쟁.. 그 속에서 주인공은 초연하게 무엇이 올바른 가치인가를 몸소 실천한다. 그것은 바로 나무를 심는 것, 건강한 도토리를 골라 심는 것. 올바른 가치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으며 살아가는 소박함.’ 이 소박함이란 당연한 것, 그저 단출한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숭고한 그 ‘무엇’이 있다. 진중권의『레퀴엠』에서 말하는 미학이 내포하고 있는 그런 숭고함이랄까.  


‘충격과 공포’의 미학이 만연한 살육전쟁 통에 묵묵히 나무를 심는 주인공의 행위는 다분히 자연의 이치를 따랐기에 드러나는 미학적 가치, 즉 그런 숭고함을 넘어선다. 그것은 현 시대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를 대입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전 인류적·지구적 가치를 위한 행위인 것이다. 단 한사람의 이 행위로 인해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현대미학이 전하는 충격과 공포, 눈부신 기술 발전이 전하는 숭고함의 가치, 태곳적 자연으로부터 풍겨 내려오는 또 다른 충격과 공포를 넘어 인간만이 발현할 수 있는 그 숭고한 미적가치를 지닌다.  


그는 3년 전부터 이 황무지에 홀로 나무를 심어왔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십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다. 그리고 십만 개의 씨에서 2만 그루의 싹이 나왔다. 그는 들쥐나 산토끼들이 나무를 갉아먹거나 신의 뜻에 따라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경우, 이 2만 그루 가운데 또 절반 가량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이 땅에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살아 남아 자라게 될 것이다.(p32~p33)  


김용규의『숲에게 길을 묻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번식’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번식은 곧 생산과 재생산을 의미하며 자연을 가꿔나가는 것에 있어 단시간에 뚝딱! 하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것. 지금의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끈기가 필요한 것이지 과학과 기술력으로 뚝딱! 해결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류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진중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번식이란 시간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으며, 미련하리만치 끈기 있게 순응하는 그 과정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젊은 나이에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다른 고독한 사람들의 영혼에 섬세하게 다가갈 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젊은 나이 탓에 나 자신과 관계된 일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미래를 상상해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삼십 년 후면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일 하느님이 삼십 년 후까지 그를 살아 있게 해주신다면 그 동안에도 나무를 아주 많이 심을 것이기 때문에 이 1만 그루의 나무는 바다의 물 한 방울과 같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p34)  


인식의 차이랄까. 어떠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 나가는 방식과 자세가 극명히 대조를 이룬다고 느꼈다. ‘뚝딱!’으로 만족하고 그것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윗세대들이 삶을 이해하는 방식과 차이를 보인다. 좁은 시각, 자신과 관계된 일들을 우선시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경향, 미래를 스스로 그리기보다 이미 정해진 미래상을 자신이 그린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 ‘빠른’것으로부터 느끼는 쾌감에 젖어 ‘느린’것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고방식 등등. 앞으로의 미래가 양적인 부분과 함께 질적으로도 성숙한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배워야한다. 윗세대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말이다.  


1933년엔 숲을 보고 깜짝 놀란 산림감시원이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왔다. 그 관리는 ‘천연’ 숲이 자라는 것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니 집밖에서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이 노인에게 경고했다. 그 관리는 순진하게도 숲이 혼자 저절로 자라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p49)  


어쩌면 우리는 이 ‘관리’와 다르지 않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일는지도 모른다. 또한 당시를 포함해 현재 우리가 자연에 대해 어떤 관점을, 어떻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런 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베르공 마을에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공동작업을 한 뚜렷한 흔적이 있었다. 희망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망가진 집들과 담장을 모두 허물어버리고 다섯 채의 집을 새로 지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의 수는 28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가운데는 네 쌍의 젊은 부부도 있었다. 산뜻하게 벽을 바른 새 집들이 채소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채소밭에는 양배추와, 장미, 파와 금어초, 셀러리, 아네모네 등 채소와 꽃들이 가지런히 자라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p62~p64)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가. 그런 도시를 만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자연이 아닌 조형물이 자라는 도시, 경계가 불분명한 어울림의 장이 아닌 상가가 자라는 도시, 살고 싶은 도시가 아닌 살아내야 하는 도시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선이 분명하고도 분명해서 요즘 말로 ‘완전!’ 단절이 가능한 그런 도시·터에서 살고 있으면서 정작 뜬구름 잡듯 행복을 말하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가련한가.  


한 사람이 오직 육체적, 정신적 힘만으로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늙은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된다.(p68~p69)  


‘진정 숭고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고 칸트가 말한 바 있다. 과학과 기술 역시 인간을 도구화하고 지배하고 있는 형국이긴 하지만, 인간만의 숭고하고 창조적인 인식과 사유가 없었더라면 과학과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원대한 힘을 지닌 인간, 숭고한 인간이 물질문명에 찬사와 존경을 표하고 숭배함으로써 타락의 길을 걷고 나약함을 인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연 역시 인간이 어떤 인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더불어 숭고한 빛을 발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지배의 대상으로의 인식을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인간은 절대 이 지구상에서 어느 것보다 숭고하지 않을 것을 안다. 인식은 행동과 행위의 바탕이 아닌가 싶다. 또한 인식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위치를 존경과 숭고함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고 나약한 도구적 인간으로 전락함을 초래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초조함 속의 욕속부달欲速不達이 아니라 인식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골몰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이 책을 통해『장터』에서 느꼈던 ‘회생불능의 유물’인 장터마저 되살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한 인간의 행위가 어떤 인식을 바탕으로 어떤 가치를 내세우느냐에 따라 이만큼 숭고할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일지라. 이렇듯 ‘희망의 전주곡’ 같은 책을 늦게나마 만나게 돼서 기쁘다. 또 시들어가고 병들어가는 인간, 자연, 도시, 그리고 이 지구를 되살리는 방법이 꼭 돈과 기술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한다. 진정 일말의 이기심조차 짜내어 여태 자연이 일군 ‘천연의 숲’이 주는 지혜를 답습함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으로 ‘시작’을 외칠 수 있지 않을까. 시작이라는 그 첫발은 이렇게 내딛어야 비로소 ‘성공’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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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6-0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토리 심기, 다람쥐가 반가워할 것 같네요.^^ 당장은 식량 도토리를 빼앗겨 울지라도요 ^^;; 느림의 미학이네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ragpickEr 2009-06-07 07:01   좋아요 0 | URL
다람쥐..^^* 우리학교에는 청솔모가 다람쥐들을 죄다 내쫓아버려서..ㅋ
느림의 미학.. 그러네요~^^* 너무 빨리~빨리~달리다보면 놓치는 게 많으니까.. 남은 휴일 알차게 보내셔요..^^* 고맙습니다~헤헤..

에샬롯 2009-06-0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솔모 걔 좀 무서운 애라던데요...--;; 전 너무 느린게 탈인데요.^^;

ragpickEr 2009-06-08 04:14   좋아요 0 | URL
아..^^* 생김은 귀여운데 좀 지랄같은(??) 면모가 출중한 녀석이지요..^^* 후훗.. 느리시군요.. 저도 요즘은 느리게 살려고 무던히 노력중입니다~^^*
 
곰아 - 월드원더북스 1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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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를 읽은 감동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호시노 미치오의 다른 책을 검색해서 보관함에 담고 어떤 책을 접할까 며칠을 고민했다. 일단 전투식량(?)이 넘쳐나는 관계로 두텁지 않은 녀석『곰아』를 선택했다. 전투식량 핑계는 농담 반 진담 반이고, 사실은 호시노 미치오의 목숨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곰을 만나고 싶었다. 그가 평상시 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얼마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노닐었는지 느껴보고 싶었다고 할까.  


『곰아』는 유아도서로 분류되어 있다. 두텁지 않고 책도 큼지막한 것이 보기에도 좋다. 중간 중간 호시노 미치오의 생각들이 짧게 수놓아져 있으며 사진과 절묘한 짝을 이뤄 더없이 아름답다. 사진은 정말이지 예술이다.『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에도 기꺼이 양면을 할애해 알래스카의 모습을 펼쳐놓긴 했지만,『곰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비유하자면 가히 영화관 스크린만한 사이즈?(^_^*;)  


띠지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었어.” 또 한 번 신비스럽고 오묘한 일상임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호시노 미치오의 또 다른 여행의 출발지, 근원인 곰을 만나보고 싶다고 느꼈었는데. 군더더기 없는 그 한 문장이 나를 그토록 설레게 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가 만나고 싶다 했던, 함께하고자 했던 곰을 나 역시 바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그 무엇이었다.  


나는 알았지.

너와 나 사이에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p6)  


어느 날, 이야기 속에 살고 있던 녀석이 불현듯 전철이 흔들리며 달리던 때, 건널목을 건너던 때에 되살아난 것이다. 그가 이야기 속, 자신과는 무관한 어느 곳으로부터 곰의 숨결을 느끼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원래부터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를 알래스카로 이끈 그 신호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대단히 강렬한 것이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채 숨결을 서로 갈구할 만큼 필연적인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무심코 앞을 봤을 때

풀숲 속에
‘이거 어쩌지?’ 하는 얼굴로
네가 앉아 있었어.
나도 어쩔 줄 몰라
꼼짝도 않고 서 있었지.

 

서로 마주 본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귀에 가늘게
너의 숨소리가 들렸어.(p22)  


바라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로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곰은 그의 숨소리를 들었을까. 숨결을 서로 교환하며 어떤 예감에 휩싸였던 것일까. 마치 무엇도 바라지 않는 오래된 친구처럼, 말없이 서로 바라보아도 모든 걸 느낄 수 있는 연인처럼 둘은 조금은 수줍고 어색한 모습으로 한참이나 바라보고 또 바라봤는지도 모른다.  


밤이 되면 나는 조금 두려워.
어딘가에 있을
너에게 귀를 기울이지.
그럴 때면
옛날의 원시인이 된 것 같아서
짐승이 된 것 같아서
내 몸에 신비로운 느낌이 퍼져. 

 

밤이 되면 나는 조금 두려워.  


하지만 이 야릇한 느낌이 좋기도 해.(p28)  


어쩌면 호시노 미치오는 머지않은 운명의 시간을 ‘야릇한 느낌’으로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잔혹하면서도 아름답고, 강하면서도 연약하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자연의 본능이랄까, 그런 이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날이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고 어렴풋이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불행이고 고통이겠거니 하는 건 그에 대해 우리가 갖는 멋모를 연민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야릇한 느낌이 좋기도 해.’  


그의 사진은 아주 시원하고 장엄하게 우리를 압도한다. 그리고 사진마다 그리움이 잔뜩 배어 있는 느낌이랄까. 함께 숨 쉬면서 알래스카를 거닐었으면서도, 늘 코앞에서 서로 존재를 알았으면서도, 늘 자고 나면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알래스카와 곰을 만났으면서도 호시노 미치오는 언제나 그리웠던 것 같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글귀가 어떤 느낌인지 사진마다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앞표지의 곰 사진은 심심한 표정인데 반해, 뒤표지는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곰 부자인지 곰 모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궁둥이와 아주 작은 궁둥이가 참으로 다정하게 보인다. 그네들의 뒷모습, 발걸음, 모든 일상의 언저리에서 그가 느껴진다. 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들 속에서 언제나 여행 중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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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6-03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만나고 싶어요. 가슴떨리는 말이네요.^^
책에서 나오는 말이군요.

ragpickEr 2009-06-04 10:05   좋아요 0 | URL
만나고 싶으시군요..^^* 책 표지에 적혀 있어요.. 헤헤..
가슴 떨리는 말..저는 이 책을 보고 난 후에야 이 말이 이렇듯 애틋한 말이구나..느꼈어요..^^*
좋은 날 되셔요..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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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어떻게 보면 이렇게 깨끗하게 볼 수 있는 것일까. 햇귀님께 받아든 이 책은 마치 새 책 같다. 책이 워낙 깔끔하고 멋스럽게 태어난 것도 있겠지만, 한 사람의 책손으로서 책을 어떻게, 얼마나 소중하게 다뤄야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참 아끼는 책이랍니다.’라고 씌어있는 글귀에서 자신을 떠나 다른 책손에게서도 곱게 다뤄지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과 당부마음이 읽힌다. 이처럼『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는 ‘척추로 읽읍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한다.  


호시노 미치오. 그는 되도록 알래스카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쓴 흔적들이 역력하다. 가급적 ‘환상’과 ‘동경’의 대상인 알래스카가 아닌 우리와 꼭 같은 ‘일상’이 존재하는 알래스카를 보여주기 위한 그의 노력은 ‘참 잘생겼다!’는 인상을 남기고 감탄을 자아낸다. 누군가가 말한 ‘생명보식’을 생각하면 그의 마지막이 그리 ‘불행’한 것만도 아닌 듯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만나게 된 걸 고맙게 생각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함은 오래도록 그리움으로 남을 듯하다.  


자연은 가끔 이야기가 담긴 풍경을 보여준다. 아니, 우리를 둘러싼 풍경은 전부 어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인간이 그 퍼즐을 읽지 못할 뿐.(p48)  


사진가는 사진으로, 시인은 시로, 소설가는 소설로. 우리는 직접적으로 자연을 대면하면서도 그것과 대화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 증세가 어떠냐면 늘 한 다리 거쳐서, 걸러진, 다른 누군가의 눈과 마음으로 손쉽게 보려고 하고 만나려고 한다는 것. 늘 우리는 누군가의 손을 빌어 다 맞춰진 하나의 퍼즐을 싱겁게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에 반해, 호시노 미치오는 낱낱의 퍼즐이 갖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모습인지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풍경과 마주보기, 풍경과 대화하기, 그것마저도 귀찮게 느낀다면 과연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꼴이 되려나.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알코올중독 문제는 그 뿌리가 깊다. 이상할 정도로 높은 자살률, 폭력, 가정붕괴······. 많건 적건 그 모든 것에 알코올이 관계되어 있다.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문화 사이에서 흔들리며 정체성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그들에게, 알코올은 도저히 어찌하지 못하는 배출구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나로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약간 망설여진다. 자칫 알래스카 원주민 사회 전체를 어두운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과 어우러져 소소한 일상생활을 꾸려가며 사는 수많은 에스키모와 인디언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알래스카 원주민 소년이 15세에서 25세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열 명 중에 한 명이 자살을 시도할 위험이 있다는 것, 실제 자살률도 같은 연령대의 백인에 비해 10배나 많다는 것······. 이는 못 본 척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문제였다.(p89~p90)  


때론 문명이란 게 모질디 모질다는 인간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가 버릴 수도 있는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비록 내가 처한 상황이 ‘그네들’보다 편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을 뿐. 그네들이 일으킨 그네들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모른 척 이해해 볼 수도 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저지른 혹은 쓸데없을 만큼 오지랖 넓게 관여한 탓이리라. 이는 침략과 다를 바가 없고 파괴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암 덩어리와 같다. 세상 어느 누구도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이런 도박과 악취미를 즐길 권리는 없다.  


화폐경제가 침투하고, 전통의 샤머니즘이 추방되고, 학교에서는 새로 영어를 가르치고, 토착 언어를 말하면 비누로 입을 씻어야 하는 시절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동화정책이라고는 해도, 태곳적부터 그들의 삶을 엮어주고 서로를 맺어주었던 보이지 않는 끈은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문화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94) 

 

우리 눈엔 쉽사리 와 닿지도 상상할 수도 없는 그네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소위 ‘동화정책’이라는 것도 이렇게 끔찍한 모습인데, 과거 식민지시대의 모습은 얼마나 처참한 모습이었을까.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끈’을 모조리 자르고 잘라 그 씨를 말리려했던 그때를 경험한 건 아니지만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그네들과의 거리를 좁혀본다. 그네들이 겪는 고통은 얼마나 클까. 몇몇은 애먼 환상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네들에게 품은 이 연민은 괜한 오지랖일까. 
 

 

전쟁이 끝나자 셀리아는 유럽을 여행한다. 거기서 본 것은 집을 잃고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구걸하는 어린이들이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셀리아는 두 대륙의 차이에 아연실색한다. 많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미국은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고, 롱스커트 유행에 들떠 있는, 허영과 자만에 가득 찬 사회로 보였던 것이다.
마침내 셀리아에게 알래스카로 비행할 기회가 찾아온다. 알래스카에서 부시파일럿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한 남자가 본토에서 알래스카까지 누군가 소형비행기를 가져다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이 1947년 1월 1일. 블리자드 속에서 페어뱅크스에 착륙을 감행하는 비행으로 연결된 것이다.
알래스카라는 땅은 모험심 강한 셀리아를 금세 매혹했다. 
“어떤 행색이든, 돈이 있든 없든, 또 어디 태생이든 이 땅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고, 무엇을 하든 자유였어.”(p108~p111)   

 

여행이란 살아 있는 역사의 한 조각을 직접 만질 수 있는 뜻밖의 ‘행운’을 늘 잠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살아 있는 역사, 진행 중에 있는 역사를 만난다는 것은 글과 영상에 갇힌 죽은 것과는 분명 다른 것. 여행을 통해 비로소 신념은 더욱 두터워지고, 두려움은 얄팍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비로소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제 삶을 모조리 태워 버릴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느낀다는 것, 마주한다는 것, 함께 호흡한다는 것은 과거라는 시간에 갇힌 채로 누군가에 의해, 어떤 것에 의해 걸러진 ‘사실’로는 이루기 힘든 것일지라.  


‘진실’이란 늘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는 것이고, 그것과 마주하기 위해 한걸음 떼어낼 수 있는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여행이 늘 초행길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로부터 연마할 수 있는 테크닉이 통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멈춰 서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또한 아닌지도 모른다. 용기를 내어, 신념을 가지고 부지런히 쫓지 않는다면 언제나 우리는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떻건 간에, 무엇을 하건 간에 모든 건 자유라지만. 

 

물보라를 뿜어 올리며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 고래가 자연이라면, 그 고래에 작살을 던지는 에스키모 사람들의 생활도 역시 자연인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의 삶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마저 포괄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름답고 잔혹하고, 그리고 작은 것에서 큰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강하고 연약하다.(p244~p247)  


‘도서관은 우주와 인간과 책을 함께 품고 연결해주는 있는 거대한 자궁과 같다’는 글귀를 어느 책에선가 본 기억이 난다. 자연 또한 거대한 자궁이 아닐까 싶다. 진화와 생산만을 낳는 자궁이 아니라 재생산의 이치도 함께 낳는다. 영원불변한 것은 없으며 늘 그런 것만도 아닌 지혜를 낳는 게 자연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을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미약한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밀어내고 파괴할 만치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욕망일지라도 태연히 품어내는 지혜로운 존재가 바로 자연이 아닐까.  


호시노 미치오. 그는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면만 보려하지 않았다. 좋은 것만을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단지 그 속에 동화되어 대자연의 일부이면서 유일하고 전부인 알래스카를 보여준다. 한 인간으로서 강하고도 연약하며, 아름답고도 잔혹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연과의 괴리를 좁혀 코앞까지 들이민다. 그가 남긴 많은 사진들의 피사체는 대자연의 모습, 알래스카의 모습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호시노 미치오의 일상의 모습이고 삶인 것이다. 동시에 여태껏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우리의 또 하나인 일상이다.  


이제 그는 없지만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친구들은 남아 있다. 대자연과 알래스카가 그이자 친구이며, 셀리아 헌터와 밥 율, 알, 케니스 누콘 역시 그를 추억할 수 있는 내 친구로 남았다. 카리부 떼와 그리즐리 가족, 고래, 무스, 북극곰, 늑대들과 이 친구들의 숨결에서도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먹힘으로써 종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삶으로 다시 시작한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언제나 생명과 생명 속을 여행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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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 가는 북한 풍경 : 1950-2008
임영균 지음 / 눈빛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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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 언제 그리도 변덕스러웠냐는 듯이 말갛게 웃는다. 말간 웃음꽃 피우던 오월의 오늘 역시 잔인한 달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향내 가득한 오월이 저물고 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짝사랑했던 열 살 연상의 교회선생님과 꼭 닮은 장영희 교수, 젊어서부터 노인연기만 전담하며 오로지 일에 묻혀 지내다 간 배우 여운계, 5공 청문회와 3당합당 반대에 핏대 세워가며 강단 있던 모습과는 달리 한없이 유약한 마음 숨긴 채 속 앓다 세상을 등져버린 노무현 전 대통령, 얼마 전 있었던 아는 동생의 모친상까지, 이 모두가 잔인한 오월 속으로 걸어 멀어져간다.

경주행 버스에서 펼쳐든『변해 가는 북한 풍경』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의 두 번째 사진을 보던 중이었다. 부디 이제 남은 며칠은 무탈하겠거니 했는데, 문자 한 통이 날아들면서 내 바람은 잔인한 향내 속에 묻히고 말았다. 내가 살아온 햇수의 반을 함께한 친구 녀석의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문자와 마침 내가 펼쳐 보고 있던 그 두 번째 사진 속 상여를 지고 가는 상여꾼들의 모습은 어느새 잇닿아 있었다. 오묘하고 절묘하다고 하기엔 서글픈, 그 알 수 없고 표현할 길 없이 밀려드는 감정선에 속수무책일 뿐이다.

『변해 가는 북한 풍경』은 1950년에서 2008년 최근까지의 북한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국내외 이름나있는 패기에 찬 사진가들의 북한 풍경을 담고 있으며, 대구포토비엔날레 특별전 중 하나였던「변해 가는 북한 풍경展」사진을 모아 정리한 책이기도 하다. 촬영 장소는 대체로 몇몇에 국한돼 있다. 북측이 마련한 그 제한된 장소들은 대표적으로 평양 풍경이 가장 많다. 그리고 개성, 함흥, 청진, 묘향산, 북청군, 금호지구, 노동자구, 원산, 강서고분 등의 풍경이 소수이지만 인상 깊다. 제한된 공간에서 자신만의 색깔과 기술로 당시 풍경을 함축적·상징적으로 전하려는 노력이 진하다.

인상 깊었던 사진이 몇몇 있는데 최근 사진보다 그 이전의 사진에 더 매료되었다. 마가렛 버크-화이트의 상여와 상여꾼들, 크리스 마커의 군사분계선 팻말 위에 앉은 새와 강서고분에서 찍은 꼬마, 김희중의 황해도 어디쯤에 펼쳐져있을 황금빛 들녘, 야니스 콘토스의 칼리슈니코프를 나란히 든 채 평양거리를 지나는 소녀들에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누구의 상여일까, 저 새는 비둘기일까 아닐까, 황금빛 들녘이 펼쳐진 황해도는 무릉도원이 아닐까, 저 꼬마는 지금쯤 살아있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칼리슈니코프를 든 채 내게 시선을 던지는 소녀의 복잡한 표정은 무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김희중의 ‘무릉도원’과도 같은 사진에서 나는 뒤숭숭하던 마음을 잠시 뉘었다. 영롱하고 오묘한 풍경색과 그로부터 한없이 밀려드는 평화로움은 나를 잠시나마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이끌었다. 아낙들, 꼬마, 소, 염소 그리고 눈부신 들판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했다. 그네들 곁에 섞여 들어 황금빛 태양 아래 편안히 몸 뉘여 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특히나 이 잔인한 오월은 더더욱 그런 충동이 인다. 향기로 날릴 듯 한 멋들어진 풍경 덕분에 조금의 위안을 삼아본다.

나는 착각 속에 있었다. 북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안타까움’과 ‘불쌍함’, ‘가련함’ 등등이다. 이러한 연민이 착각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누구’와 ‘누구’가 되어 서로를 연민하고 혹은 동경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싶다. 한 몸이 둘로 갈라진들,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간들 결코 ‘누구’와 ‘누구’로서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를 그리워하고 때론 동일한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이란 시선을 주고받을 뿐임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분열과 통일에 대해 어느 강의 시간에 들은 적이 있다. 한반도만이 가지는 특수성과 이 분단 상황을 ‘분열과 통일’이라는 이론을 그대로 접목시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그것이 꼭 남과 북의 통일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이 있다면 분열이라는 뼈아픈 과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과 ‘관’의 분열, 제도권내의 분열, 민족의 분열 그리고 소소한 많은 분열들까지 품고 살아온, 앞으로도 살아갈 역사 앞에서 통일이란 달콤하고 편안한 휴식이요, 구원이지 않을까 싶다.

분열은 죽음 혹은 초죽음이다. 분열된 당사자들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분열은 고통이고 죽음이다. 새로운 삶 혹은 새로운 생명수를 갈구하는 ‘분열자’들은 통일을 염원하기 마련이다. 그 통일이 멈출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이건,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철옹성의 탄탄한 구원이건 간에 통일은 우리가 일궈야할 소망이고 바람이다.

민과 민, 민과 관, 권력과 권력, 남과 북, 국가와 국가 등등 어떤 곳에서도 분열은 혼란만을 야기할 뿐임을 안다. 더러는 죽음을 초래하고 그 앞에 후회하고 슬퍼하고 노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분노는 여지없이 분열을 가속화할 뿐임을 안다. 하나가 되는 것, 한마음으로 바라고 바라는 것, 그저 먼저 손 내밀어 품을 수 있는 작은 여유야말로 분열을 종식시켜나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잔인한 오월이 저물고 있다. 2009년 아래, 더 이상 이런 혹독한 시간이 없기를 바라본다. 사분오열의 지리한 역사의 선상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갈구함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좀 더 목소리를 높여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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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6-0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어젯밤 읽어봤답니다.^^ 잔인한 오월이 가는군요. 오월아 안녕.^^

ragpickEr 2009-06-01 08:18   좋아요 0 | URL
잔인한 오월..오늘부터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해요..^^* 후훗..
저 역시 '오월아 안녕~' 유월의 시작을 활기차게 맞으시길 바라며..
 
말과 사람 -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을 만나다
이명원 지음 / 이매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그것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아니면 체제형이건 반체제형이건 간에
앞으로 출현하게 될 새로운 지식인들은 그러한 근대적 범주로는 포괄될 수 없는
난제들에 대한 해결 능력과 패러다임 구성 능력이 필요하다.
모든 근대적 사유는 발전론적 세계관과 이항대립적 인식론의 기반 아래서 출현한 것이지만,
새롭게 출현할 ‘비체제적 지식인’들은 그러한 분류 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회의함으로써, 좌와 우의 가느다란 이데올로기적 협곡을 관통해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새로운 지식인들은 분과 학문 체계는 물론이고,
인식론과 존재론을 둘러싼 모든 칸막이들을 지혜롭게 횡단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 그리고 유머 감각이 있어야 한다.
....
|여는 글; 비체제적으로 횡단하는 사유 中..|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이 책을 만났다. 적당한 크기에 깔끔한 디자인이 내 눈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읽고는 며칠 전에 사들였다. 솔직히 제목『말과 사람』만 보고는 그다지 내 구미를 당길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표지를 보면 저자 이명원이 만난 여섯 명의 ‘사람’이 보인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들어온 건 이문열이다. 여태 불거진 이문열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를 떠나서 그가 구설수로 공공의 적(?)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 밋밋한 제목이 군침 도는 호기심으로 달리 보였다고나 할까.  


『말과 사람』은 앞서 인용한 구절을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비체제적으로 횡단하는 사유’가 절실하게 필요한 현재와 미래, 그 속에서 진정한 지식인을 대변하는 ‘말’을 찾아, 그런 ‘사람’을 찾아 발품을 팔고 판 기록에 관한 책이다. 사람은 없고 말만 반질반질 윤이 나는 세상, 영양가 없는 말들이 무수히 많이 부유하는 세상, 책임질 사람은 없는데 책임감 있는 척 시건방지게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말, 말, 말. 저자는 총대를 메고 이처럼 부유하는 많은 말 중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말을 잡아다가,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의도와 책임을 따져 묻고 있는 듯하다.  

 

그럼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비체제적으로 횡단하는 사유’를 가지고 현재의 많은 모순들을 타계해나가는 진정한 지식인인가, 하고 묻는다면 내 능력으로는 확답을 낼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반질반질한 말로 뺀질거리기 바쁜 여타 어처구니없는 인사(?)들에 비해서 조금은 ‘말’이 통한다는 것과 현재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몸담고 있지만 영양가 있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또한 자신들의 색과 닮은 이들의 주장이 그릇되었을 때 과감하게 들은 귀를 자르고 그 수족을 잘라낼 수 있는 강단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모든 책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먼저 장점은 저자가 되도록 중립적인 시각을 갖고 인터뷰를 한 것이다. 여섯 사람의 말을 주워 담아 있는 그대로 기록하되, 자신의 견해를 덧붙임으로써 말을 ‘전달’하고 마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애쓴 흔적이 그것이다. 물론 저자의 견해와 비판이 죄다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적어도 여러 시각과 주장들을 비교하고 보다 합리적인 주장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또 책의 구성이 비교적 깔끔하고 주제에 따라 단락구분이 잘 되어 있어 보기에 편한 것도 이 책이 주는 장점이라 하겠다.  


반면에 아쉬웠던 점을 들자면, 저자가 책속에서 구사하는 말은 참 고답적으로 다가온다. 좀 쉬운 말, 알아듣기 쉽게 풀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게 책을 읽어나가는데 적잖은 방해요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물론 지적소양이 모자란 내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은 듣고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하지 않나 싶다. 그것이 독자를 위한 정보 전달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세상에는 말이 존재하고 무수히 많은 말들이 부유한다. 또 그 말들은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카드라!’ 통신을 생산한다. 그 사이사이에 오해와 억측이 난무하고 그 또한 영양가가 있든 없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당당히(?) 말로써 존재하고 부유한다. 소위 말을 ‘인격’이라고 한다. 출처가 불분명한 말들이 이토록 많이 부유하는 세상에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도 명확하지 않은데 더더욱 말에 인격이 붙은 말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또 인격이 없는 말은 ‘화’를 부르기 십상이고, 그 화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물을 사람을 찾아내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나름대로 제목과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짐작컨대, ‘비체제적으로 횡단하는 사유’를 가진 지식인들은 적어도 말을 함에 있어 그 출처를 분명히 하고 제 입을 통해 뱉어낸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생각과 좋은 의도를 담은 말을 가감 없이,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강단만큼이나 그 기본을 잘 지키는 사람이 미래의 지식인으로서 갖춰야할 기본적인 소양임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좋은 말을 듣고 그렇지 못한 말을 가려낼 수 있는 것은 일반의 대중들의 몫임을 알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종속됨이란 자본에 의해서, 이념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건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지름길임을 명심하고 그릇된 말로 더럽혀진 귀를 자르거나 때에 따라 여닫을 수 있는 소양을 갖추는 것 또한 무척이나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주워 담기¨¨‡‡‡‡‡‡‡‡‡‡‡‡‡‡‡‡‡‡‡‡‡‡‡‡‡‡‡‡‡‡

∥결심과 현실; 이문열∥
진정성과 행위와 이념의 일관성, 과거에도 기능했고 앞으로도 기능해야 할 중요한 세대가 386세대다. 물론 내가 이 소설에서 386 찌꺼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비판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간 사람, 특히 원한에 주목한 것이다. 권위주의 정부와 싸우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 고통에 망가진 것 같다. 원한을 벗어나지 못해 원한으로 미래를 결정하거나, 단순한 ‘적’의 논리로 간 친북 좌편향에 빠진 사람들을 비판했다면 비판한 것이지. 386세대 전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p32)  


그러나 나는 남북한의 문학 교류가 이문열이 말한 대로 단합대회로 비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지적한 바처럼 남북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문인들의 성향은 다양했다. 이념적으로는 가장 오른쪽에서 가장 왼쪽까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 교류는 말하자면 동일한 모어母語의 구성원이지만, 문화어와 한국어라는 다른 명칭의 언어권으로 재편된 언어들의 어려운 만남이었다. 거기에는 한국의 노무현과 북한의 김정일로 상징되는 정치 체제와는 그 층위가 다른 문화적인 전망과 자율성이 있는 것이다. 이산가족이 만나면, 껴안고 울지 서로 이념을 묻지 않는다. 나는 언어적 재회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p35)

∥민족주의자의 초상; 조정래∥
문인이 현실 정치에 대해서 발언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모순과 갈등을 감시 감독하는 관점에서 발언해야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자기의 사적 견해, 개인의 감정,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면 안 된다. 자기에게 불리하더라도 대의를 위해서 객관적으로 해야 한다. 작가들이 사회적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헌신성과 희생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p53)  


강준만 교수가 문단 권력을 주제로 한 책을 냈을 때,『오마이뉴스』에서 내게 인터뷰를 나온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군사정권 30년만 나쁜 것이 아니고 문단권력 40년이 더 나쁘다. 그랬더니 기자가 이대로 써도 됩니까 하더라. 기사가 나간 후 구설수에 많이 올랐다. 한국의 문단이 그 정도로 소아병적이고 폐쇄적이고 편협하다. 자기 파 아니면 언급을 안 하고 묵살해버리는 패거리 의식이 너무 심하다. 문화에 종사하는 자들이 가장 반문화적 행위를 하는 셈이다.(p54)  


∥디자인과 사회철학; 김민수∥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독한 군중이 되고 있다. 남들이 소비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소외된다는 사회적 공포감이 한국 사회만큼 높은 곳이 새삼 그 어디에 또 있겠는가. 애고 어른이고 얼짱·몸짱 신드롬에, 왕따는 죽음을 의미한다. 리스먼은 대중매체가 발달된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타인을 의식하고 개인의 개성이나 인격보다 집단 동질성 속에서 안주하려 한다고 말했다. 풍요 속에 고독감과 획일성으로 점차 인간들이 고독한 군중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인 지향적인 현상은 출생률과 사망률이 낮아지고 고령화 사회가 돼가는 인구의 초기 감퇴기에 나타난다고 한다.(p117)  


왜 우리의 대학은 학생들 스스로 창의적일 수 있게 하는 동기를 유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대학에 대해서는 학생이고 교수고 모두 냉소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대학이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자신의 잠재력을 퍼올릴 수 있는 창조적인 곳이 되려면, 적어도 지금처럼 창조적이지 못한 기업 문화가 요구하는 그런 시스템과 맞물려서는 안 된다. 그건 자살 행위인 것이다. 지금은 대학이 창조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주도권을 기업에 내준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신자유주의 정책에 발 빠르게 부응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가시적 효과를 만들어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학의 창조적 지성을 훼손할 여지가 많다. 지금 한국의 고등교육 체제에서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전문대학이 152개나 존재하면서 4년제 대학을 전문대학 차원으로 몰고 간다는 점이다. (······) 그런데 전문대학이 지향하는 교육 목표를 보자.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각 분야의 전문적인 직업 교육을 실시하는 데 있다. 요즘 4년제 대학에 대해 정부와 기업이 요구하고 있는 목표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공급하기 위한 전문대학이 엄청나게 존재하고 있는데, 4년제 대학을 포함해서 전 대학에 획일적으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건다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
지난 20세기 산업사회에서 지구의 원시림은 단지 개발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가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속에서 뿜어 나오는 한 줌의 산소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자본의 지배와 권력에 물들지 않는 천연의 지성력으로 산소 같은 지식과 학문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이 아쉬워지는 때가 언젠가 올 것이라고 본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급조된 산업화의 여파로 긴 호흡을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하고 붕어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p131~p133)  


∥씨알의 자기 실현; 김상봉∥
국가기구가 자기 존립의 정당성을 확증하려고 할 때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현실적인 어떤 국가기구의 현실성 그 자체를 증명해 보여줌으로써 ‘내가 국가다’라고 하는 걸, 국가가 여기 있다고 하는 걸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뭘 통해 보여주나? 폭력밖에 없다. 자발적인 동의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시대가 이제 시작이다.(p163~p164)  


국가가 ‘서로 주체성’의 현실태일 때는 법이라는 것이 자유의 형식이다. 자유가 방종이 아닌 한에서 나름의 형식과 질서가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국가와 자본을 대리한 국가 폭력의 형식이 되어가고 있다.

국가가 약자를 보호해주지 못할 때, 오히려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는 약자들을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먼저 나서서 억압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노동자들이 어떤 합법적인 저항의 수단도 없을 때,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전쟁 상태다. (······)

추상적으로 표현해서 국가는 시민들의 서로 주체성의 현실태인 한에서 서로 주체성의 표현이고, 그 실현인 한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국가가 씨알을 모두 보호하고 최선을 다해서 모든 씨알을 위해서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국가기구 또는 헌법적 질서라고 하는 것이 법을 빙자해서 극소수의 특권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때, 수탈과 억압의 도구에 지나지 않을 때, 씨알들과 국가 사이에는 전쟁 상태 말고는 다른 것이 조성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국가기구와 씨알들 사이의 전쟁 상태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5·18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그 역사가 과거 어느 한때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다시 있을 수 있는 역사가 5·18이다.(p166~p167)  


∥비체제를 향하여; 김종철∥
(······) 이 세상에는 지금 두 가지 종류의 탱크가 있다. 하나는 전쟁무기로 쓰이는 탱크이고, 또 하나는 지식인들이 모인 조직인 싱크탱크다. 그런데 싱크탱크란 무엇인가. 실제 탱크를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아, 그 사람들이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조직 아닌가. 대학도 지금은 일개 싱크탱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교수들이야말로 가장 노예적인 신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정말 흙 속에서 땀 흘려 자기 손으로 일하고 먹고 사는 사람들인 농민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다. 농민들은 국가에서 농업에 대해 지원금을 주느니 마느니 하는 것들에 콧방귀를 뀐다. 농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다만 자신들이 기른 작물을 제값 받고 팔게 해 달라는 것이다. 제발 국가와 시장이 이걸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물론 농촌에 가면 국가 보조금에 목을 단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대개 뿌리 있는 농민이 아니다. 대개가 대규모의 시설농, 축산업, 상업농을 하는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야심을 가진 사람들은 비즈니스맨이지 농민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농민은 기본적으로 자급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국가의 도움을 성가시게 여긴다.(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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