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김홍희 글.사진 / 마음산책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감기로 본격적인 골골거림을 시작하던 지난 월요일. 전날 종일토록 잠을 자둔 덕분에 본의 아니게 월요일을 일찍 맞았다. 아침을 거의 안 먹는 습관에도 불구하고 그 전날 집에서 먹은 게 하나 없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대충 밥상을 차려서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돌리는데 구수한 경남 사투리가 새어 나온다. 볼리비아의 소금사막 위를 달리면서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그 특유의 말씨는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어느 아프던 날 새벽녘, 신기루처럼 펼쳐진 소금사막 위에서 사진작가 김홍희 씨를 만났다.

몸을 좀 움직일만할 무렵, 그립던 도서관에서 그의『방랑』에 동승했다. 그가 생각하는 삶에 함께 골몰해보고, 그가 바라보는 눈을 통해 세상을 다시보기 위한 연습을 했다. 함께 여행하고 유학했으며 방랑했다. 죽음에 대한 그의 고백들을 통해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아예 그를 부둥켜 앉고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그가 가진 기억들과 만나면서 내 지난 일들을 회상해보기도 하고, 미래를 가늠해보기도 하면서 방랑자의 눈으로, 몸으로 밤을 고스란히 안아보기도 했다. 그의 발길을 평생 쫓아가고 싶다는 욕망과 만나고, 그가 가진 카메라를 훔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내 그런 내 생각들이 어리석었다는 걸 알았다. 훔쳐내 봐야, 쫓아봐야 결코 그와 같아지거나 혹은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그의 푸근한 미소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조금은 ‘촐싹거리는(?)’ 분위기로「방랑」은 시작된다. 무게감이 없어 보였다는 말이다. 역설적이지만 그 분위기는 청춘 특유의 진지함이었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설익은 채로 세상을 몸으로 받아들이려고 부산하게 움직이며 일으키는 흙먼지 같은 것이랄까.「죽음」부터는 그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조금은 촐싹맞은(?) 그 특유의 분위기와 더불어 삶과 죽음에 관한 그의 철학이 지난 날 경험한 일들과 어우러져 더없이 오묘한 맛으로 드러난다. 특히나 [삼촌], [참새], [통표], [벚꽃]에서 보여준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은 ‘맛깔스러움’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또동경東京」에서는 지난 일본유학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질적으로 사진에 관한 철학을 형성해가는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오직 좋은 사진을 건져 올리기 위해 흘린 땀방울과 팍팍한 생활담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또 하나의 맛을 들자면, 김홍희 씨의 구수한 사투리를 들어본 분들이라면 아마 이 책을 좀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평소의 표준어체로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 어색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의 조금은 익살스러운 특유의 말씨가 잘 배어 있기 때문에 색다른 맛이 난다. 마치 사투리로 내레이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그만큼 재미를 더해주고 편안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또한 사진에 달린 ‘캡션’들은 쉽사리 풀리지 않는 암호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다. 그 덕분에 우리는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돌이켜 보게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화두’라 하기엔 너무 거창하다손치더라도, 적어도 사진에 배어 있는 삶의 ‘단상斷想’ 쯤은 되지 않나 싶다.

등잔 밑이 어둡다던가.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선물 받은『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속 사진을 김홍희 씨가 담당했다는 걸 뒤늦게야 알고 다시 찬찬히 사진만 뜯어 봤다. 또 햇귀님이 내주신 숙제(?)를 통해『편집자 분투기』속에 있는 그를 만날 수도 있었다. 모두 예전에 보았던 책들인데 어째서 그때는 그 이름자를 기억하지 못했을까. 도대체 나는 책읽기를 통해 무엇을 담고 무엇을 흘려버리는 것일까. 괜스레 나 자신이 꼴통 같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이렇게 다시금 만날 수 있는 연(緣)의 오묘함에 감탄해보기도 했다. 

        ‡‡‡‡‡‡‡‡‡‡‡‡‡‡‡‡‡‡‡‡‡‡‡‡‡‡‡‡‡‡``주워 담기``‡‡‡‡‡‡‡‡‡‡‡‡‡‡‡‡‡‡‡‡‡‡‡‡‡‡‡‡‡‡

헤어진 모든 것들은 사랑한 것들이고, 사랑한 모든 것들은 낯선 것들이다. 우리는 낯선 것들과 만나 사랑하고, 낯선 것들과 이별한다. 방랑 역시 낯선 것들과의 조우다. 조우는 고통이고, 고통은 신음한다. 그래서 방랑은 신음이다. 그러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음이다. 오히려 아프기 위한 신음, 그것이 방랑이다. (개정판을 내며 中..)

사람들은 묻는다. 그 많은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냐고. 내 대답은 언제나 간단하다.
“사랑에 빠졌던 곳.” (글머리에 中..)

불빛에게 물었다.
“거기가 끝이냐?”
불빛이 답했다.
“여기가 시작이다.” (사진; 2001 변산 새만금)

한 톨 쌀알 크기의 눈송이가 히말라야의 정상, 면도칼처럼 날을 세운 꼭대기로 떨어지면 티벳 평원에 쌓이고, 남쪽으로 떨어지면 억겁의 세월을 거쳐 갠지스의 물방울이 되어 바라나시로 흐른다.
히말라야에서 갠지스로 오기까지 성수는 무엇을 보고 왔을까? 사람이 수없이 나고 죽는 동안 히말라야의 백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지금 그들이 마시는 바라나시의 성수는 역사 이전의 시간에 지구의 정수리 히말라야에서 녹아내린 눈일 것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에 서면 모두가 숙연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p65)

인도에 가려거든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동물 중에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챙기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 문명의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을 때, 문화의 주머니가 없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 여행이 충분히 가능할 때, 당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갠지스 강에 몸을 맡기게 될 것이다.(p67)

배에 묶인 물
선술집 없는 젓가락 장단
떠돌지 못하는 사진기 (사진; 2001 변산 곰소항)

어물전에 누워 낄낄대는 생선들
산자의 바바리 코트 속을 보았니? (사진; 변산 곰소 시장)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던 시절, 참새가 죽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왁자지껄한 잔치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저 조용하게 잠자듯이 오는 것이라는 것. 살아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죽어 있더라는 것.(p88)

아들과 딸을 키우는 나는 짐이 많다. 여러 번 이사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쓰고 있는 것과 앞으로 쓸 것, 그리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쓰일 것들이라고 재어둔 물건들이 집안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평생을 쓰고도 남을 물건들이 사람이 써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풍요가 가져다 준 공간의 빈곤이다.(p99)

통표는 모가지가 빠지도록 채여 갔다가는, 돌아오는 열차에서 춤추듯 패르르 돌며 통표걸이에 목을 건다. 통표란 길을 떠날 때 반드시 가져가야 하고, 돌아와서는 또 반드시 되걸어두어야 하는 단선수동(單線手動) 역에서나 볼 수 있는 운행허가증.
압록역에 가면 통표를 건네준 빈손으로 열차마다 손 흔드는 등 굽은 노인의 뒷모습이 보이고, 젊은날 길 떠난 아비는 어느새 백발로 돌아와 먼길 가는 아들에게 또다시 통표를 건네준다. 통표를 거머쥔 아들은 또 다시 아비의 길을 떠나고······.(p100~p101)

“젊은날 어디에 살았는가 하는 것은 긴 인생여정을 살면서 참으로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할 걸세. (······)”(p105)

개 짖는 소리
걷던 사진기가 주춤.

흐릿해지는
파-인-더 (사진; 2001 변산 곰소항)

진실로 울어본 자들은 알 것이다. 운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인지. 더구나 그 울음을 혼자 우는 자는 또 얼마나 순수해지는지.(p131)

“결혼이라는 것은 다른 꽃을 포기하는 것이야. 이 꽃을 쥐고 다른 곳에서 더 이쁜 꽃이 필지도 모를 거라는 상상을 하면 결국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지.”(p149~p152)

사랑은 말하지 않는다
니가 말해야 한다

사랑은 니 말 속에 있다

잘 자라, 변산. (사진; 변산 나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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